안식도 계명입니다
히브 6,10-20; 마르 2,23-28 / 연중 제2주간 화요일; 2025.1.21
2024년도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표한 교세 통계에 의하면, 전국 천주교 신자는 모두 5,970,67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주일미사에 꾸준히 참례하는 신자의 비율은 13.5%에 불과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입교한 신자들 중에서 성사생활을 쉬고 있는 냉담자들이 대다수라는 이 통계는 한국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빨간 신호등입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 사회에 이미 만연하고 있는 종교의 세속화(世俗化) 현상과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현상이 한국에도 상륙한 것일까요? 코로나 펜데믹이 종식된 2023년 이후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대량 냉담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동력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은 바다와 강을 배로 이동할 때 짧은 거리라면 노를 젓거나 먼 거리라면 바람의 힘으로 움직였습니다. 바람의 힘으로 배를 움직일 때는 돛을 올려서 배를 지나가는 바람을 모아야 했습니다. 거의 언제나 바다에는 어느 쪽으로든지 바람이 붑니다. 그러니 진행하려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지 않는 경우에도 돛을 조종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진행시키는 일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고 노동력도 솔찮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행선지에 닿으면 닻을 내려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고정시켰습니다. 이렇게 배를 통해 물 위를 오갈 때 필요한 것들이 노, 돛 그리고 닻입니다.
안식일은 일상 생활의 닻과도 같아서, 한 주간 동안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기도도 바치고 세상에서 겪은 경험과 지혜도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는 한편 다음 주간의 노동을 위한 휴식도 취하고 그 노동이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되도록 필요한 교육도 받고 이제까지의 노동이 그 계획에 부합되었는지도 평가해 보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유다인들의 안식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이 되었는데, 따라서 주일의 의무는 비단 주일 미사를 참례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 미사에서 행해지는 강론과 나눔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참여해서 이룩하고 있는 하느님의 질서와 계획을 숙고하고 명심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심신의 휴식과 가족과 함께 하는 오락은 그 다음의 순서인 것이지요. 주일에 이루어지는 미사 참례, 강론과 나눔을 통한 숙고와 결심 등이 일상 생활의 닻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이르는 평일 주간의 노동과 활동은 일상 생활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돛과 같은 기능을 수행합니다. 몸으로든 머리로든, 육체 노동이든 정신 노동이든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발휘하여 나와 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노동을 하면서도 그 노동이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고 하느님의 계획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수행하는 일상의 닻 기능이나 노동이 수행하는 일상의 돛 기능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이, 오로지 예수님과 제자 일행의 흠집 내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고발했습니다. 배가 고픈 제자들이 어느 안식일에 남의 밀밭을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몇 알 따서 비벼먹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왜 안식일에 남의 밀밭에서 밀 이삭을 따 먹었는지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왜 그들이 그토록 배고파 있었는지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고플 정도로 노동하기를 포기하고 – 그들은 원래 자기 자신의 정당한 직업이 있었던 어부 노동자였습니다 –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지를 물어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렇게 율법 준수를 강조할 정도로 하느님을 열성적으로 믿는 바리사이들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완고한 마음가짐에서 솟아나는 충동적인 질문만을 던졌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ㄴ)
한심한 질문만을 던지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의 인도주의적 의미를 겨냥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ㄴ) 그리고 아마도 오늘날 주일을 육신이 쉬는 날로만 알고 있거나 가족들과 함께 쉬는 날 정도로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라면, “사람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라고 대답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주일 의무가 고작 미사 참례로만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라면, 무어라고 대답하실지 저는 몹시 궁금합니다. 게다가 그마저도 쉬고 있는 냉담자들에게라면 또 무어라고 말씀하실른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십계명으로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관행은 전 세계에서 일반화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는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어 일주일에 이틀을 쉬고 있습니다. 육체 노동이든 정신 노동이든 노동으로 피곤해진 몸을 쉬게 하는 일은 기본 인권에 속합니다. 이는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진보에 해당한다고 보아야지요.
그런데 본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느님의 뜻은 이러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10,8-11) 그러니까 노동 후에 몸을 쉴 수 있게 한 안식일은 몸의 노동을 그치고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몸도 세상도 창조하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몸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도 생기를 얻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상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방책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달라지실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구원의 은총을 얻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효성을 바치면, 자녀들이 오히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빋게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마음이 다스리고, 마음은 혼이 다스립니다. 그리고 사람의 혼에 하느님의 영이 소통되어야 생기를 얻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구원 현실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문화가 온통 몸을 섬기는 행위 일색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와 사람들의 삶 사이에 충돌 현상이 생깁니다. 온갖 스트레스와 질병이 생겨납니다. 이는 일종의 무질서 현상입니다. 이를 물리적으로는 엔트로피라고 하고, 사회적으로는 아노미라고도 합니다. 무질서한 혼돈 즉 카오스 상태에서 질서있는 창조 특 코스모스 상태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우주적 차원에서나 역사적 차원에서 한 순간도 멈춤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가 인류 문명 역사 안에서 발견한 질서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서의 신앙을 뿌리로 해서, 사람들 상호간의 믿음으로 나타나는 신뢰를 줄기로 하고, 사람들이 이룩한 사회 질서에서 서로를 믿는 신용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뿌리와 줄기와 열매가 건실할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안식일이 왜 제정되었는지 또 안식일의 주인이 왜 예수님이신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몹시 어지러운데 이 무질서 현상도 역시 믿음이 없는 자들이 정치 권력을 탐해서 사리사욕을 노린 탓입니다. 검찰 권력에다가 무속의 힘까지를 보태서 한국 사회를 온통 엔트로피 투성이, 아노미 상태로 어지렵혀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악인들만이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질서를 본보여야 할 신앙인들이 그렇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바라보아야 할 빛이 없으니 어둠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을 거룩히 지냄으로써 우리 사회에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