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셉 데 갈라상스 사제
이 성인은 1556년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에 있는 페랄타 데 라 살 근교의 아버지 성에서 태어난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다.
아버지는 갈라산즈의 돈 베드로라는 남작(男爵)이요, 어머니는 돈나 마리아라는 분으로,
모두 신심이 두텁고 그 아들이 마음속에 하느님을 공경하는 정신을 심어주는 동시에 서로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으므로,
요셉은 어려서부터 수덕에 힘쓰며 무슨일이든지 하느님의 뜻을 중히 여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장성해서 그는 레리다, 발렌시아, 알칼라 등 스페인의 유명한 대학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청춘기에 떨어지기 쉬운 위험한 유혹을 물리치고 신앙과 정덕을 훌륭히 보존했다.
특히 재산이 많고 신분이 높은 귀부인과 교제할 때는 먼저 성모상 앞에 엎드려 열심히 기도하며
동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서원을 새롭게 함으로써 그러한 위험을 능히 이겨나갔다 한다.
그 시절의 일이다. 중병에 걸려 일어날 희망이 없었던 요셉은 만일 병을 완쾌하게 해 주신다면
후에 꼭 신부가 되어서 하느님을 위해 일생을 바칠것을 서약했던 바,기이하게도 그런 중병이 차츰차츰 차도가 있어서
곧 완전한 건강을 회복했으므로 그 서약을 이행해 군인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158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로부터 요셉은 소속 교구의 주교 대리로 근무하며 열심히 기도와 고행으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며 냉담한 신자들을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성덕과 박학함을 전해 들은 마르코 안토니오 고론여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초청해 여러가지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요셉은 이 같은 명예로운 직에 있으면서도 안락한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가톨릭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근무할 때에도 낮에는 직무에 충실히 분주한 하루를 보냈고,
저녁에는 7개의 대성당들을 모두 순례하지 않고서 쉬는 일은 없었다.
그뿐 아니라 페스트가 시중에 만연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성 가밀로등과 더불어 환자를 간호해 주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위험 중에 있는 자들에게 병자 성사를 주고,사망한 이들은 정성껏 매장해 주고 기도해 주는 등 그야말로 맹렬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로마의 소년 소녀들의 교리지식이 부족함을 통탄해 그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며
성인 행적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으나, 그들을 만나면 만날 수록 그들을 가르치기 위한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마침내 피아리스트회(교회 학교의 정규 성직자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1617년에 교황 바오로 5세에게 그 인가를 신청, 1621년에 그 허가를 얻었다.
이리하여 요셉은 교황의 명으로 초대 총장이 되어 그 중책을 잘 완수했으며,
그의 뛰어난 애덕과 겸덕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어
그 수도회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 각국에 전파되어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성스러운 사업을 하는 데는 꼭 악마의 방해와 시기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것으로,
이 피라이스트회 안에도 역시 유다와 같은 사제가 있어,그 발전을 시기하고 학교 교원들에게 선동되어
요셉의 사업에 대해 자꾸 거짓 투서를 했으므로, 결국 그는 총장직을 내놓게 되고
그 수도회 자체도 해산될 비운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요셉의 인내와 성덕은 이런 때일수록 더 빛을 발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국왕 필립보는 그를 자기 나라의 주교로 영접하려 했고, 또 교황은 그를 추기경에 임명하려 했으나,
그는 일체를 사양하고 세인들의 오해를 사면서도 오직 귀여운 아동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단 하나의 위로였다.
그러는 동안 그를 모략하던 간계가 드러났고, 요셉은 청천백일과 같이 결백한 몸이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수사는 불치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험을 느꼈을 때에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사과하는 편지를 요셉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받자 요셉은 먼 거리도 헤아리지 않고 즉시 달려가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그를 끌어안고
"형제여! 나는 일생동안 오늘과 같이 기쁜 적은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마음을 고쳐서 하느님의 품안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기를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했다.
이리하여 요셉은 52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아동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헌신했고,
피아리스트회의 장래의 발전을 예언하고 1648년 8월 25일에 영원한 상급을 받기위해 하느님의 품으로 달려갔다.
그 유해를 백년이 지난 후에 열어본즉, 혀와 심장은 조금도 썩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전구로 인해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1767년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또 그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어 그 수도회는 현재까지 계속 발전해 전 세례를 16관구로 나누고, 2천 2백며의 회원과 더불어
다수의 학교 기숙사를 운영하며 5만여명의 아동을 교육하고 있다. 그는 학교들의 수호 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