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계 구거(梅溪 舊居)인 율수재(聿修齋)는 김천 봉계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기와집이다.
앞뜰에 아담한 연못이 있고 뒤는 낮은 산으로 둘러 싸여
고즈넉한 옛 선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매계구거 율수재 (梅溪舊居 聿修齋)
매계구거인 율수재는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선생이
태어나서 공부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1686년에 지은 건물로, 가는 기둥으로 작은 건물을 짓고
정면에 매계구거(梅溪舊居)란 액자를 걸어 놓았다.
율수재( 聿修齋) 편액
율수재( 聿修齋)의 율수( 聿修)란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시에
"너의 할아버지가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德)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天命)에 합함이 스스로 많은복(福)을 구하는 길이니라
(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즉 성대한 복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상의 덕을 닦으면
저절로 구해진다는 의미이며, 여기에서 "조상의 덕을 닦는다"는
의미를 취하여 율수(聿修)라는 말을 가져 왔다
율수재기(聿修齋記) ~ 권진응(權震應,1711~1775)이 쓰다
율수재는 율수재기와 중수기 등을 살펴보면 1686년에 지은 후,
1747년(정묘,丁卯)에 중수하고, 1773년(계사,癸巳)에 권진응이
율수재기를 쓰서 걸고, 1891년(신묘,辛卯) 10월에 다시 중수하여
이때 관찰사 조시영(曺始永)이 율수재 중수기를 썼으며,
1986년 5월에는 문장공파 대종회에서 다시 중수하였다.
율수재중수기(聿修齋重修記) ~ 관찰사 조시영(曺始永,1843~1912)이 쓰다
율수재기(聿修齋記)
이 금산(金山)의 매계당(梅溪堂)은 곧 문장(文莊) 조(曺)선생이 학문을
전력하던 유허(遺墟)로 그 수석이 그윽하고 깨끗하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노닐만한 곳이다. 내가 일찍이 한번 찾아가 놀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작년 가을에 선생의 후손(後孫) 박이 나에게 글을 보내어
“나의 선조 문장공(先祖 文莊公)이 사화(史禍)를 입은 뒤로
매계당(梅溪堂)이 폐허(廢墟)된지 이미 백여년이 흘렀다.
율수재 중수 기공기(聿修齋 重修 紀功記)
그때에 나의 조부 우졸당공(祖父 愚拙堂公,휘 유,諱 逾)이 그곳에
움집을 짓고 글을 읽다가 불행이 일찍 별세하시고 집도 따라서 무너졌으므로
중부(仲父) 인제공(認齋公,휘 세룡, 諱 世龍)과 계부(季父) 경지재공(敬知齋公,
휘 세붕,諱 世鵬)이 뒤를 계승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내가 모든 제질(弟侄)과 의논하여 집을 지으니, 모두 아홉칸으로
중부(仲父)와 계부(季父) 두 분의 유지(遺志)를 어느 정도 이루어드린 셈이다.
매계구거(梅溪 舊居)
마침 선사(先師) 구암(久菴) 윤선생(尹鳳九)의 유상(遺像)이 이곳을 지나기에
당중(堂中)에 모신다음 사자(士子)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이어 제질(弟侄)과 마을의 수재(秀才)들을 거느려 날마다 학문을 강독(講論)하니
지금 감히 조여부(祖與父)의 유지(遺志)를 원만히 계승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자네는 이 기(記)를 써 달라. 고 하였다.
매계유허(梅溪遺墟)
아! 사람이 그 조상의 어짊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불명(不明)이요,
어짊을 알고도 천양(闡楊)하지 않는 자는 불인(不仁)이니
불명(不明)과 불인(不仁)은 불효(不孝)라 이른다. 그러므로
사전(思傳, 중용,中庸)에 효(孝)하는 자는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며
조상의 일을 잘 서술한다. 하였고 또 승전(曾傳, - 대학,大學)에
선대(先代)의 어진 이를 어질게,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긴다. 하였다.
지도재(志道齋)와 유예재(遊藝齋)
지금 문장(文莊)선생의 도덕 문장(道德 文章)과 우졸당공(愚拙堂公)의
독지역학(篤志力學)은 다 세상의 준칙이 될 만하고 그대의 제부(諸父)는
그 미적(美蹟)을 계승하였는데 그대가 또 여기에 전력, 일체 옛
모습대로 당(堂)을 중건(重建)한 다음 시경(詩經)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여
스스로 덕을 닦아야 한다. 는 뜻에 경경(競競-두려워하고 삼가는 것)하여
더욱 근면하고 그 자제들에게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으니,
이는 그 어진 이를 어질게,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의(義)를 알았고
또 그 뜻을 계승, 이를 서술하는 효(孝)를 다한 것이다.
8월의 율수재
내가 다행히 이 다음 병이 낳아 그곳에 가서 노닐게만 된다면, 그곳에
있는 이들이 다 독서 수신(讀書 修身)하여 능히 그 가업을 계승하는가 하면
혼가(婚嫁), 상장(喪葬), 음식(飮食)에 예절이 맞고 읍양(揖讓), 진퇴(進退),
제사(祭祀)에 질서가 정연한 것을 구경하고 나서 그 교화(敎化)의 성취를
즐거워하며, 제군자(諸君子)의 말석에 앉아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율수재 연못과 홍교(무지개다리)
노래 소리를 듣고 헌수(獻酬,술잔을 주고받는 것)하는 술을 마시고 나서
시(詩)를 지어 선생의 덕을 찬양하고 계산(溪山)의 절경(絶景)을 기록해도
기회는 늦지 않을 것이다. 아직 이만 쓰며 다음을 기다린다.
"숭정왕 계사중춘 안동 권진응 기(崇禎王 癸巳仲春 安東 權震應 記)"
즉 1773년 2월 안동 권진응이 쓰다"
※ 율수재기를 쓴 권진응(權震應,1711~1775)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이며,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명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자이다.
또한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독서에 전념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의정부 대신들과
이조의 당상관들이 모여 인재를 추천하는 초선(抄選)으로
시강원의 정7품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율수재 정문인 도덕문(道德門)
율수재의 도덕문(道德門)은 매계선생이 사망한지 204년이 지난
1707년(숙종 34)에 나라에서 문장(文莊)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자 그 기념으로 세운 문이다.
안에서 본 연못과 도덕문
시법(諡法)에서는 도덕박문으로 가로대 문(文)이라 하고,
행함이 바르고 뜻함이 온화하므로 가로대 장(莊)이라 하여
즉 "도덕박문왈문 이지화왈장(道德博文曰文 履志和曰莊)으로
줄여서 도덕문(道德門)이라 했다. 문장(文莊) 시호의 근원이다.
※ 시법(諡法)이란 시호, 묘호, 존호 등을 붙이는 데 쓰는
법칙을 말하며, 시호법(諡號法)이라고도 한다.
율수재 주련(柱聯)
백련사에서 서형인 자진의 시에 차운하다
(在白蓮次庶兄子眞韻)
고갯마루 나무는 새벽바람에 윙윙거리고 / 영수명잔야(嶺樹鳴殘夜)
산매화 꽃이 핀 이른 봄이라 / 산매후조춘(山梅候早春)
푸른 댕댕이 덩굴 있는 곳을 떠나려니 / 욕사록라거(欲辭綠蘿去)
원숭이와 학이 성낼까 조바심 든다 / 원학공생진(猿鶴恐生嗔)
※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4개의 주련은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 선생이 백련사에서
서형인 조전(曺佺), 자(字)는 자진(子眞)의 시에 운을 따서
오언절구 시를 읊은 것으로 매계문집에 실려 있는 시(詩)다.
마지막 왼쪽 주련은 매계의 시를 후세에 전한다는 내용이다.
시의 뜻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한다 / 시의소후인(詩意沼後人)
율수재에 걸린 시판(詩板)
이 시판에는 삼당 김영(三塘 金瑛)과 적암 조신(適庵 曺伸),
몽정 김희수(夢禎 金希壽), 구촌 유경심(龜村 柳景深) 등이
1607년(선조 40) 6월 상순에 한자리에 모여 읊은 시(詩)다.
성주목사와 저녁노을이 깃든 매화나무 가에서 함께 마시며
성목군재공음서하매상(星牧郡宰共飮栖霞梅上)
삼당 김영(三塘 金瑛)
회포를 풀려고 처서가 지났어도 높은 누각에 오르니
태수의 오늘 아침은 점 쾌가 한가롭게 좋게 풀렸네.
인사를 나누고 바둑을 두는데 엎치락뒤치락
연못 속의 연꽃은 오동나무 대나무 가린 틈으로 보이네.
개회도서고루상(開懷度暑高樓上) / 태수금조호점한(太守今朝好占閑)
인사수담번복희(人事手談翻覆戱) / 지하오죽폐휴간(池荷梧竹蔽虧看)
노래는 슬픈 곡조가 되고 잔을 돌리라고 재촉하고
산에 가린 저녁노을에 물 기운도 싸늘하네.
십리 황혼 길을 말을 걸터타고 돌아오는데
숲 바람 개울물 소리가 패옥소리처럼 울리네.
가성고조배행촉(歌成苦調盃行促) / 산엄잔양수기한(山掩殘陽水氣寒)
십리황혼과마반(十里黃昏跨馬返) / 임풍거류향산산(林風渠溜響珊珊)
※ 삼당 김영(三塘 金瑛,1475~1528)은
사헌부 감찰, 영천군수,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김응교 영의 시에 차운하다 / 차김응교영지운(次金應敎英之韻)
적암 조신(適庵 曺伸)
세월 따라 누대도 다시 오래된 것을 새롭게 짖고
높은 곳에 오르니 감회가 새로워진 시인이 있네.
저녁노을은 물속에 닿아 연꽃을 밝히고
빗 기운은 온전히 나무의 몸통까지 적셨네.
수세누대갱고신(隨世樓臺更故新) / 감회등척유소인(感悔登陟有騷人)
하광도침명연작(霞光到浸明蓮芍) / 우의전침습수신(雨意全沈濕樹身)
이앙한 모가 모두 뿌리를 내린 논 두둑을 어슬렁거리다가
거울처럼 잔잔한 물을 흡족한 마음으로 막고 서있네.
부들자란 마당에 매화와 대나무는 진실로 나의 익우이니
문서를 깨끗하게 쓸어내고 복건을 벗으리라.
추무농공개착본(趍畝農功皆着本) / 의란수감흡전신(倚攔水鑑恰傳神)
포정매죽진오익(蒲庭梅竹眞吾益) / 소정문서탈폭건(掃靜文書脫幅巾)
율수재 뒤 극락산 풍경
매번 높은 누각에 오르며 한 번 씩하고 웃으니
고을 안의 늙은이들은 우리들 친구
일곱 차례나 연경에 갔다 왔어도 아직도 혀가 남아있고
세 차례나 성난 바다를 건넜어도 아직 죽지 않은 몸
매상고루일소신(每上高樓一笑新) / 군중유로속오인(郡中遺老屬吾人)
칠분연새유존설(七奔燕塞猶存舌) / 삼섭경파미사신(三涉鯨波未死身)
주인장이 때대로 불러주는 잔치에 참여하고
원옹과 약속하고 토지신에게 제를 올리네.
지금의 왕찬이여 부를 짓지 마라.
돌아가 거친 책상을 쓸어내고 갈건을 써보네.
지주시초참객연(地主時招參客宴) / 원옹유약새전신(園翁有約賽田神)
지금왕찬휴제부(至今王粲休題賦) / 귀불조상시갈건(皈拂糟床試葛巾)
※ 적암 조신(適庵 曺伸,1454~1529)은
사역원정, 통신사군관을 역임하였으며, 조위선생의 동생이다.
김천 연화지 벗꽃야경
제목없음(무제,無題)
관찰사 김희수(觀察使 金希壽)
늦봄도 지나 고향땅은 애석하게 꿈속에서나 돌아오고
나그넷길에 또다시 자만한 사이 사월이 왔네.
온종일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는 코에 가득하고
푸른 숲 여기저기엔 팥배나무꽃만 붉게 피어있네.
삼촌감석몽중회(三春堪惜夢中回) / 객로환과사월래(客路還誇四月來)
진일풍훈향옹비(盡日風薰香擁鼻) / 청림처처야당개(靑林處處野棠開)
※몽정(夢禎) 김희수(金希壽,1475~1527)는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
글씨에 능했음
김천 선돌 입석지
운을 따옴(차, 次) ~ 적암 조신(適庵 曺伸)
태평성대의 한해도 돌아 다시 봄이 오게 하니
죽마 탄 아이처럼 자사(관찰사)가 오시는 것을 맞이하네.
떠난 후에도 자사를 사모하는 마음이 아직도 연연한데
하물며 향안을 품평하고 화개시를 짓기까지 하셨으니
남훈화축사성회(南薰化逐使星回) / 기죽아영자사래(騎竹兒迎刺史來)
거후감당유연연(去後甘棠猶戀戀) / 황제향안부화개(況題香案賦花開)
율수재입구 매계 조위, 적암 조신 신도비와 점필재 김종직 사적비
또 (又) ~ 적암 조신(適庵 曺伸)
청춘시절은 되돌리기가 어려워라
70먹은 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네.
대를 심고 꽃에 물을 주며 한가한 일로 만족하니
다만 인간 세상에 나처럼 좋은 흥취 열린 사람 없구나.
청춘백일만난회(靑春白日挽難回) / 칠십리옹귀거래(七十裏翁歸去來)
종죽요화유사족(種竹澆花幽事足) / 독무인간호회개(獨無人間好懷開)
율수재의 여름
운을 따서(차, 次)
구촌 유경심(龜村 柳景深, 1516~1571)
만고의 영웅이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높은 하늘엔 오직 달만 돌아왔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앞산의 막힘을 깎아내어
술 취함 속에 두 눈을 유쾌하게 한 번 떠 보리라.
만고영웅거부회(萬古英雄去不回) / 장천유유월귀래(長天唯有月歸來)
하방잔각전산옹(何方剗却前山擁) / 취리쌍모쾌일개(醉裏雙眸快一開)
*삼당 김영(三塘 金瑛,1475~1528) : 사헌부 감찰, 영천군수,사헌부 장령을 역임
적암 조신(適庵 曺伸,1454~1529) : 사역원정, 통신사군관을 역임(조위의 동생)
몽정(夢禎) 김희수(金希壽,1475~1527) :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 글씨에 능했음
구촌 유경심(龜村 柳景深,1516~1571) :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매계 조위선생 사적비와 신도비
조위(曺偉,1454∼1503)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로 아버지는 울진 현령 조계문(曺繼門)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3년(1472)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첫번으로 뽑혔다.
매계 조위선생 초상화
그 후 홍문관의 정자 저작 박사 수찬, 사헌부 지평,
시강원 문학, 홍문관 교리 응교 등을 거친 뒤 함양 군수가 되었다.
그 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사헌부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 참판 충청도 관팔사 동지중추부사, 한성우윤,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조위선생 생가 유오(曺偉先生 生家 遺埡)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 시고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체포, 투옥된 후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이배)진 뒤 병으로 별세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金宗直)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율수재입구 연못
중종 6년 정묘년(1507년), 원통한 죄를 거슬러 올라가 풀어주고,
공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경연춘추관성균관사
(經筵春秋館成均館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예문관(藝文官) 제학(提學),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하였으며, 자손에게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황간 송계서원, 금산 경렴서원, 순천 옥천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매계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오른쪽)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2, 매계선생의 자형) 선생 사적비
(왼쪽) 적암 조신(適菴 曺伸,1454~1528, 매계선생의 동생) 선생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