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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7
#성경공부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드는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교회에는 간혹 성경해석에 탁월한 신도가 있을수 있지만,그렇다고 그 신도가 개인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만든다거나 교회에서 그 신자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할 권한을 주게되면,그 신도가 교만함에 빠지거나, 그 신도의 가르침에 매료된 교인들이 파당을 만들거나, 보편적 성경진리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해석을 주입하는 등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더크다.또한 교회로서는 그 신도가 신실하게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면 교인들이 교역인들을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교회에서 교역인을 하대하게 된다고 본다.그래서 나는 아무리 교회내 어떤 신도가 성경해석에 탁월하다 하더라도 교회내의 모든 성경공부는 반드시 목사들이 이끌어야하며,교인들도 성경에 대한 모든 질문과 가르침은 개별 신도가 아니라 반드시 교회목사에게 요청해야 한다고 본다.
#성화
이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은 두다리를 전부 저는 므비보셋과 같아서 어떤때는 왼쪽으로 넘어지고 어떤때는 오른쪽으로 넘어진다.그러나 처음에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넘어져 나동그라졌더라도,갈수록 조금씩 그 넘어짐의 정도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좌로나 우로나 기우뚱하기만 할뿐,넘어지지는 않게되는 것이 성도의 성화이다.그리고 넘어지지 않기위해 짚는 지팡이가 성령과 성경과 교회 등의 내외적 신앙수단들이다.
#20220307
#요한계시록 #Revelation 4:1-4
제 4 장
하늘의 禮拜
1 이 일 後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門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喇叭 소리 같은 그 音聲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後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And the voice I had first heard speaking to me like a trumpet said, "Come up here, and I will show you what must take place after this."
Post hæc vidi : et ecce ostium apertum in cælo, et vox prima, quam audivi tamquam tubæ loquentis mecum, dicens : Ascende huc, et ostendam tibi quæ oportet fieri post hæc.
Μετὰ ταῦτα εἶδον, καὶ ἰδοὺ θύρα ἠνεῳγμένη ἐν τῷ οὐρανῷ, καὶ ἡ φωνὴ ἡ πρώτη ἣν ἤκουσα ὡς σάλπιγγος λαλούσης μετ’ ἐμοῦ, λέγων Ἀνάβα ὧδε, καὶ δείξω σοι ἃ δεῖ γενέσθαι μετὰ ταῦτα.
이 일 후라는 것은 주님께서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낼 편지의 내용을 말씀하신 직후라기 보다는 요한 사도가 주님의 음성의 명령대로 일곱 교회에 보낼 주님의 경고와 책망과 칭찬과 위로의 말씀을 적은 편지를 쓰고 보낸 이후의 어느 때를 의미할 것이다. 만약에 요한 사도가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부지런히 써서 보내지 않았다면 새로운 계시를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입으려면 먼저 회개를 해야 되고, 주님께 크게 쓰임받고 싶으면 먼저 주님께서 부여하신 작은 책임과 의무에 충실해야 하며 복음의 넓고 깊고 큰 것을 깨달으려면 먼저 받은 복음의 작은 부분을 깨닫는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요한 사도처럼 주님께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요한 사도만이 선택받은 것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의무와 책임의 내용과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고 좋은 것을 받을 요량으로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가장 크고 좋으며 적합한 것인줄 알고 만족하며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2 내가 곧 聖靈에 感動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寶座를 베풀었고 그 寶座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At once I was in the Spirit, and there before me was a throne in heaven with someone sitting on it.
Et statim fui in spiritu : et ecce sedes posita erat in cælo, et supra sedem sedens.
εὐθέως 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ἰδοὺ θρόνος ἔκειτο ἐν τῷ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ὸν θρόνον καθήμενος,
요한 사도는 하늘에 열린 문을 보고 올라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성령에 감동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미 감동되었기 때문에 하늘에 열린 문을 보고 그리로 올라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로 올라가 열린 문으로 들어간 요한 사도는 지난 날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을 품에 안으실 정도로 아끼시고 사랑해주신 그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늘의 찬란한 보좌에 온갖 권세와 위엄으로 앉아계신 것을 보게 된다. 요한 사도는 더이상 예전처럼 주님의 품에 편하게 안겨 있을 수 없었고 다만 그분의 높으신 위엄 앞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요한 사도처럼 하늘의 환상을 보아야만이 성령충만을 받은 것이라 하면서 이러한 환상을 보여달라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는 그저 다른 신자들보다 자기들이 좀 더 특별해보이고 우월해보이고 싶은 교만함의 발로에 불과하며 그들의 노력은 불을 내려달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에 상처를 내가며 발광하는 바알의 제사장들의 허망한 몸짓에 불과하다. 신비주의자들 중 얼마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무언가 신비한 환상과 체험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백이면 백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마귀가 주는 허황된 환상에 불과한 것들이다. 신비주의자들은 그렇게 마귀가 주는 환상을 맛보고 더 열광하다가 점점 그것에 취하게 되고 급기야는 중독되어버려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버리게 된다. 신비주의자들과는 정반대로 요한 사도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으로 인해서 성령에 감동되어 셋째 하늘로 올려지고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게 된 것이다.
3 앉으신 이의 模樣이 碧玉과 紅寶石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寶座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綠寶石 같더라
And the one who sat there had the appearance of jasper and ruby. A rainbow that shone like an emerald encircled the throne.
Et qui sedebat similis erat aspectui lapidis jaspidis, et sardinis : et iris erat in circuitu sedis similis visioni smaragdinæ.
καὶ ὁ καθήμενος ὅμοιος ὁράσει λίθῳ ἰάσπιδι καὶ σαρδίῳ, καὶ ἶρις κυκλόθεν τοῦ θρόνου ὅμοιος ὁράσει σμαραγδίνῳ.
하늘의 주님과 보좌에 대한 요한 사도의 묘사가 그저 한 두 보석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은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주님과 보좌의 찬란함을 사람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크게 무시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과 권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이나 여인들이나 예전처럼 자신들과 함께 지내셨던 분으로 편하게 대할 수 없었고 그야말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신 분으로 섬겨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의 모습만을 바라보는데서 벗어나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4 또 寶座에 둘려 二十四 寶座들이 있고 그 寶座들 위에 二十四 長老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金冠을 쓰고 앉았더라
Surrounding the throne were twenty-four other thrones, and seated on them were twenty-four elders. They were dressed in white and had crowns of gold on their heads.
Et in circuitu sedis sedilia viginti quatuor : et super thronos viginti quatuor seniores sedentes, circumamicti vestimentis albis, et in capitibus eorum coronæ aureæ.
καὶ κυκλόθεν τοῦ θρόνου θρόνους εἴκοσι τέσσαρας, καὶ ἐπὶ τοὺς θρόνους εἴκοσι τέσσαρας πρεσβυτέρους καθημένους περιβεβλημένους ἐν 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καὶ ἐπὶ τὰς κεφαλὰς αὐτῶν στεφάνους χρυσοῦς.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둘러 앉은 24명의 하늘의 장로들이 사람들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천사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위인들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정도의 인간적인 상상력이 허용된다면, 이 24명의 장로들은 구약에서 12명, 신약에서 12명으로 이뤄졌을 것 같다. 구약에서 12명을 뽑자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이 될 것 같고, 신약에서는 12명의 사도들이 될 것 같다. 어쩌면 요한 사도는 저 24명의 장로들 중에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20210307
#신명기 #Deuteronomy 6:1-9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실체를 드러내시지 않는 대신에 율법과 규례 등으로 당신의 존재와 속성 등을 알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이방족속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하고 기이한 것들 뿐이다. 그래서 통상적인 인간으로서는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데다 미련해보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리가 만무하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이 믿음이 있어야만이 하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첫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고 강론하며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이가 없으면 혼자서 복음을 깨달을 수가 없으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가르침을 받고 들은 복음이 성령의 감화로 내 영혼에 심기면 이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내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하나님께 선택된 성도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으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의 의지로 복음을 믿게 되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게 되며 이로 인해 자원하는 심령으로 복음에 순종하게 된다. 이 또한 우리에게 계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현상인데 우리의 모든 생애에 복음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계속 반복되고 확장되며 성숙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됨으로써 구원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가르침 받을 때 너무나 쉽게 저지르는 잘못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다. 말씀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을 우선으로 삼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서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교인 개개인이 말씀을 감탄고토하게 되면 타 종교처럼 기복적인 공로주의에 순식간에 빠져버리게 되고, 목사가 말씀을 감탄고토하게 되면 순식간에 주님의 교회를 사탄의 회당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니골라 당과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배척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 까불면 죽인다고 하는 목사, 복음이 아니라 정치경제 이념을 우상으로 삼는 목사, 북한주민 2천만명을 한명씩 끌어안고 죽자는 목사, 교회 세습을 정당화 하는 목사, 교회를 이용해서 문어발 사업을 하는 목사,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발뺌하는 목사, 이런 교회들을 옹호하고 따르는 교회들이 바로 복음을 감탄고토 하고 니골라와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목사와 교회들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또 한가지는 듣고 배우는 것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물론 성도의 신앙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지만, 가르침을 받아 말씀을 깨달아가는 재미에 빠져서 지식만 추구하게 되면 마치 성경지식을 자기의 믿음과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성경지식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보다는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만을 더 익히려 하므로 역사작이고 보편적인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들을 식상하게 여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따른 삶의 행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를 행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에게 있다고 하였고, 행함이 없는 지식만으로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다. 따라서 남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자기가 아는만큼 과연 실천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20200307
#창세기 #Genesis 제 44 장
은잔이 없어지다
1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2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3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4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6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10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11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12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13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요셉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왜 요셉이 이번에도 무언가 계략을 썼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저 형들 몰래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옆에 두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20여 년 전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들에게 그 때의 죄를 상기시키려고 그런 것인지 불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요셉은 청지기를 시켜서 자기 은잔을 베냐민 짐 속에 몰래 숨기게 하고 형제들이 떠날 때 그들을 뒤쫓아가서 짐 검사를 하게 지시하고 청지기는 비록 그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주인 요셉의 신실함을 믿고서는 그대로 순종한다. 하물며 인간사회의 주종관계에서도 종 된 자는 주인의 명에 복종하는데도 정작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심을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삶으로는 내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거나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성경의 가르침은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이해했다고는 해도 그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해서 행하기도 한다.
누명을 쓴 형들은 청지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누구든지 잔이 나오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이 되겠다고 맹세한다. 청지기는 자기가 베냐민의 짐 속에 은잔을 숨겼기 때문에 최대한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르우벤부터 나이순으로 그들의 짐을 조사한다. 베냐민을 조사하기 전까지는 모두에게서 은잔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형들은 득의양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냐민의 짐에서 그 은잔이 나오자 그들의 기쁨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형들은 물론이거니와 베냐민으로서는 자기가 훔친 적도 없는 물건이 자기 짐에서 나오자 더욱 어쩔줄 몰라 했을 것이다. 억울함은 둘째 치고라도 자기가 잡히게 될 경우 아버지 이스라엘은 어찌 될 것이며 자기를 위해 스스로 담보가 된 형 유다의 입장은 어떻게 될 것이겠는지가 더 걱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들은 비록 절망에 빠졌을지언정 그 원망과 책임을 베냐민에게 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에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요셉을 해한 것처럼 베냐민을 해코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왕복한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떠올렸고 회개했으며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출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베냐민에게서 은잔이 나왔을 때 이를 베냐민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들의 잘못으로 여겨서 옷을 찢음으로써 참회를 드러냈던 것이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인질을 청하다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17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요셉의 형들과 동생 베냐민이 참담한 심정으로 요셉 앞에 와서 엎드리자 요셉은 짐짓 엄하게 그들을 꾸짖는다. 베냐민은 자기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으나 거기서 직접 항변하지 않고 대신 담보가 된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해서 변론을 하게 된다. 명확한 증거가 있으므로 상식적으로도 베냐민만 붙잡히게 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풀려나도록 청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러지 않고 도리어 형제들이 다 함께 요셉의 노예가 되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막내의 죄를 같이 담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베냐민만 남기면 된다고 하자 유다는 왜 그를 혼자 놔두면 안되는지 아버지 이스라엘의 생명이 달린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런데 22년 전 자기가 주도해서 요셉을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버렸을 때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면서도 아버지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도 아니고 요셉보다 더욱 심한 편애를 받던 베냐민과 아버지의 생명을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였다.
아마도 요셉의 형들 중에서는 이 22년 동안 유다의 성품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성화되어 온 것 같다. 당시 요셉이 39세, 이스라엘이 130세였으므로 유다는 대략 80세 전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셉을 팔아넘길 당시애 유다는 50대 후반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 유다는 엘과 오난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 다말과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쌍둥이 아들을 얻게 되는 일을 겪음으로써 자기 죄를 돌아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후에 기근으로 인해 애굽을 오가면서 겪는 이상한 일들로 인해서 더욱 그의 성품은 겸손하고 너그럽게 다듬어졌을 것 같다. 그래서 유다는 자기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도 그 형들보다 더 맏형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반면에 장자 르우벤은 여기서도 실망스럽다. 설령 유다가 자기를 담보로 해서 베냐민을 데려온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해도 르우벤은 맏형이라는 위치가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만큼은 자기가 유다를 대신해서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기에서도 르우벤은 일신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책임까지 전부 유다에게 넘겨준다. 비록 르우벤이 에서처럼 한그릇 음식에 장자의 명분을 팔지는 않았어도 그는 자기의 메네메네데겔 같은 행실로 스스로 장자의 명분을 유다에게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은 임종 전에 아들들을 위해 축복할 때 르우벤에게만큼은 축복을 거두고 그의 장자의 명분을 유다에게 넘겨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단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라면 다른 이의 책임을 함께 또는 대신 져주는 성도는 잠깐은 힘들어도 결국에는 유다처럼 높임을 받을 것이지만,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자는 당장은 편하겠지만 결국에는 르우벤처럼 비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