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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개요
質問 / Question
There's no such thing as a stupid question.
바보같은 질문은 없다.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묻는 것을 말한다. '물음'이나 '질의'(質疑)라 불리기도 한다. 반대말은 대답.
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문제나 궁금한 점을 질문함으로써 그 문제나 궁금한 점을 해결하게 되거나 해결할 단서를 찾게 된다. 질문을 하는 것은 사회조사에서도 핵심 콘텐츠가 될 수 있다.
2. 질문의 가치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노엄 촘스키, 「만만한 노엄 촘스키」
소크라테스가 "산파술" 로 불리는 문답법을 통해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하며, 유대인들은 스승이 제자에게 끝없이 질문하고, 제자들이 스승에게 끝없이 질문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지식을 쌓는 걸로 유명하다. 항간에는 유대인 어린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부모들이 "오늘은 스승에게 무엇을 물어보았느냐"며 질문한다는 말도 있다. 이런 전통을 받아들인 구미권에서도 오히려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을 좋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 강사나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것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요점을 단순히 암기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심화 학습의 단계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경의 경우 석가모니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어떤 내용의 설법을 행하거나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제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고[1] 그것에 대해 석가모니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설법이 진행된다.[2] 석가모니 부처는 또한 자신의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 앞에서도 "내가 이제 곧 열반에 들려고 한다. 나중에 가서 스승께서 계실 때 여쭤볼 걸 후회하지 않게 지금 너희가 궁금한 것을 질문하라. 너희 일이 아니라면 너희 친구들의 일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 질문해라."[3]라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사회 각지의 프레젠테이션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질의응답 과정이고, 여기서 질문이 얼마 나오지 않거나 내용을 재정리하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면 청중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여 발표자가 좌절감을 겪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교육법 중 하나이며, 모든 학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2.1. 대한민국에서의 인식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질문을 자꾸 하면 오히려 대인관계에 지장을 주는 행위로 인식해서 지못미스럽다.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은 눈치가 없다거나, 오지랖이 심하다거나, 사생활을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 이런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향해 '물음표 살인마'라는 멸칭까지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상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정보가 있을 때는, 직접적인 질문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짜증내하는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정보를 주면서 부담을 덜어 상대방이 정보를 스스로 말하도록 유도하는 등의 완곡어법이 어느정도 필요하다. 실무를 익힐 때에도 입사 초기에 사수가 붙기는 하지만, 핑거 프린세스처럼 모른다고 무조건 질문할게 아니라, 스스로 외부 환경을 살피면서 익혀나가는 습관도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다른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첫인상을 준다. 남들보다 질문을 자꾸 하는 학생에게는 주변 학우들이 "왜 저렇게 혼자 나대냐. 재수없다."고 비난한다.수업 진도 빨리 나가고 끝나야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으니까[4] 물론 '이미 가르친 내용인데도 모른다', 혹은 '감히 선생한테 질문을 한다' 등의 이유로 질문한 학생을 때리는 선생도 은근히 많다.
제가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몹시 두려웠습니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게 가장 많이 두려웠었죠. 그래서 선배한테 자문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학생들 앞에서 떨지 않을까요? 그때 그 선배가 저한테 큰 용기를 준 말이 있었습니다.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학생들은 결코 질문하지 않는다."
- 정효찬, 한양대 교수
이는 대학 프리젠테이션에서도 동일해 거의 일상적으로 발표 말미에 질의응답을 실행해도 학습이 실속있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질문을 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소극적으로 "이러이러한 점이 이해되지 않는데 보충 설명 좀 해주겠냐"고 질문하게 된다. 이에 대해 질문의 느낌이 날카롭거나 강도가 센 사람들에게는 상술한 내용과 동일한 반응으로 "왜 저렇게 혼자 나대냐. 재수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에서 취업한 이후에도 회사에서 미팅도 하며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질문이나 제안을 하는 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금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감히 상사의 프로젝트나 제안에 질문을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예배 중에도 목사의 설교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금기인 경우가 많다.[5] 그러나 미국 등지에서는 설교 중에 신도들이 자유롭게 손을 들고 "목사님 그 말씀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코멘트를 하는 경향이 더 크다.[6] 대한민국에서 목사들이 신의 대리자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질문을 꺼리고 질문하는 것과 질문했다가 나올 결과에 부담스러워하게 만드는 눈치 문화는 국제망신을 부르기도 했다. 2010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버락 오바마가 한국 기자들을 콕 찝어 질문할 기회를 재차 줬지만 한국 기자들이 끝내 질문을 건내지 못해 질문받지도 않은 중국 기자에게 기회를 뺏기는 추태까지 일으켰다.[7] 그리고 비슷한 사태가 2021년 한국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도 일어났다.[8] 참고논평
이와 관련된 외부 링크
EBS 다큐프라임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 5부 말문을 터라
주간조선 : 왜? 우리는 질문을 잃어버렸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왜 질문을 싫어하는가
4. 다른 영장류에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질문하는 모습이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침팬지, 보노보 등 영장류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기도 하고 공감능력도 있으며, 연구자의 질문에 답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학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같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는 전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의견이 다수이다. 이 가설은 다음과 같은 수화를 배운 영장류들이 다음 시험에 실패함에 뒷받침된다.
갑돌이와 을순이가 한 방에 있었다. 갑돌이는 과자를 찬장 속에 두고 방을 나갔다. 을순이는 과자를 옮겨 책상서랍속에 숨겼다. 갑돌이가 방에 다시 들어왔다. 갑돌이는 과자를 찾기 위해 어디를 볼까?
다른 영장류들의 답: 서랍속
인간도 어렸을 때는 다른 영장류들과 같은 대답을 했다는 보고가 있다.
5.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
질문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아서 질문을 무조건 좋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동양이나 서양의 고전에선 나쁜 질문의 예가 자주 등장하고 모든 질문들이 가치를 높게 사는 것은 아니다.
5.1. 주요 유형
좋은 질문의 예
구체적인 질문
본질적인 질문
맥락이 있는 질문
다른 청중들도 궁금해하거나 궁금해할 사항에 대한 질문
나쁜 질문의 예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묻는 것
답정너
누구나 뻔히 아는 사실을 언급함
남의 질문이나 말에 제대로 응답하지도 않고 되묻기
맥락을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엉뚱한 질문을 하기
5.2. 되묻기
나쁜 질문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대단한 결례가 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되묻기를 해야 할 수도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청자가 화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질문자(청자)가 화자의 말에 대해 착각 혹은 이해를 못한 상황이라 확인이 필요할 때.
A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중 '그런데 B는 요즘 어떤가요?' 라는 질문에 대하여 'A 말씀하시는 거죠?' 라고 되물을 수 있다.[9]
어려운 내용들을 요약해서 확인해야 한다.
'XX는 YY하고 ZZ한데, 왜 AA하나요?' 라는 질문에 대해 'XX가 왜 AA하냐는 질문이죠?' 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고 절대 되돌릴 수 없다.
'100만원짜리 XX를 사고 싶은데 몇 일이면 받을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해 'XX 상품에 대한 문의 맞으시죠?' 라고 되묻기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되묻기가 결례가 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의도적이지 않은 경우
습관적으로 되묻는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사과도 하지 않고 되묻는다.
부분적으로 못 들은 내용이거나 일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두고 네? 왜? 뭐?라며 전체를 화자에게 다시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10][11]
"죄송하지만 방금 설명을 한 번 더 부탁합니다" 와 같이, 정중하게 부탁하더라도 맥락없이 전체적인 설명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결례이니 주의할 것.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을 명확히 하여야 화자가 재설명을 하기도 용이하므로 "죄송하지만 왜 XX가 YY로 변했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수준으로 상세히 질문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12][13]
의도적인 경우
특별한 이유도 언급하지 않고 남을 의심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회피한다.
대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합의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대화 주제를 바꾼다.[14][15]
번외 : 화자가 결정권을 가지지 않은 입장에서, 청자가 화자의 말을 납득할 때까지 계속해서 되묻는다.[16]
일본 서브컬처에서 가끔 등장하기도 하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는 대사 역시 바로 되묻기를 뜻한다. 하지만 해당 분야에서도 되묻기가 예삿일에 해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의도적인 경우는 아예 상대방을 무시하는 의도도 있으니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뜻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의도적이지 않은 되묻기를 자주 하면 행동교정을 받아야 한다.
이런 언어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대답하기 전에 제대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되묻는 것에도 요령이 있어서, 그래서 XXX에 대해서 말하는 거지?라며 요약해서 되물으면 그나마 적절하다.
[1] 이를테면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어떤 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보살의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어떤 나라의 왕은 어째서 어떤 나라를 멸하게 되었는지 등등
[2] 몇 안 되게 석가모니 부처가 먼저 말을 꺼내서 설법한 경우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전을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라고 부르며, 이 무문자설경에는 아미타경, 법화경 등이 있다.
[3] 디가 니까야 수록 '대반열반경' 및 장아함경 수록 유행경
[4] 질문은 하고 싶은데 정 눈치가 보인다면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거나 쉬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다.
[5] 설교 도중에 끼어드는 상황이라면 이해가 갈 수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자기 말을 하려고 말을 끊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설교를 마치고 예배가 끝난 상황인데 질문이나 제안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 목사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든 신도에게도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성경에서 사도 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다가 예수의 부활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야 믿은 것을 두고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한 것이 임팩트가 좀 크다보니... 물론 예수가 그런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도 토마스 문서로.
[6] 일례로 미국의 흔한 목사 중 하나인 더글러스 코넬리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목사에게 궁금한 점을 묻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렇게 하셔서는 안 됐습니다!" 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7] 이 추태는 국민들로 하여금 질문을 꺼리고, 질문을 꺼리게 만드는 자국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주었을 정도다.
[8] 참고로 기자는 질문이 직업상 매우 연관이 깊은 직업이어서 아예 기자 질문력이란 말까지 있다. 이 기자 질문력에 대한 의구심이 다른 나라 기자들에게도 없는건 아니나, 한국 기자들이 이 때 질문할 기회를 받았음에도 전혀 써먹지 못한건 한국 기자의 직업환경상 출입처 관행이란게 있어서 질의응답이라면 몰라도 자유롭게 질문하는 훈련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9] 이는 분명 필요한 되묻기이기는 하나, 이러한 확인 자체를 껄끄럽게 여기는 이들도 많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굳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 A에 대해 계속 얘기를 나누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정말로 B에 대한 대화로 오해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확인 자체는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10] 당연하지만 이 경우 국소적으로 질문하는 게 예의이다. 이해를 하지 못한 청자 본인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화자가 떠넘겨 받은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화자도 청자가 국소적으로 못 들은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하다못해 화자의 수고를 덜도록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한 결례로 느낄 수 밖에 없다. 흔히 군대나 회사에서 말하는 '니가 들은 게 맞아, 이 XX야'. 는 괜히 나온게 아니다.
[11]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상대에 대한 트집을 잡고 싶어서 일부러 한 번 더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라던가, 상대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사용되고는 한다. 물론 이런식으로 되묻기를 할 경우 '니가 들은 게 맞아, 이 XX야'. 가 돌아올 수 있으므로 각오할 것.
[12] 물론 개인의 이해력에 따라서 콕 찝어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자신이 뭘 모르는지 조차 모른다는 상황인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고, 상대방에게 전체적인 재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자제하도록 하자.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은 그저 책이나 글만 읽는다고 되는 것은 절대 아니며, 본인 스스로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흔히 인터넷 게시판에서 누군가의 의견에 222 하면서 댓글놀이 하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습관이니 주의할 것.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공감' 만 중시하는 습관 또한 좋지 않다. 이 역시 스스로 생각 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나쁜 습관인 셈.
[13] 의외로 대학원생이나 젊은 연구자들도 자주 범하는 잘못 중 하나. 아무래도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면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대화가 서툴어질 수 밖에 없는데, 상대방은 버튼을 누르면 자동적으로 음성이 재생되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이것이 교정되지 않은 채로 교수직에 앉은 중장년층 교수들 중에는 본인들의 태도를 연구자로서의 귀감마냥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속 빈 강정들이니 닮지 말자.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보다 위치가 더 높거나 대외적으로 유명한 교수/연구자 앞에서는 설설 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야말로 강약약강.
[14] 한국 사회에서 자주 범할 수 있는 결례 중 하나. 이에 대해서는 성차가 있는 편인데, 직설적인 대화를 선호하는 남성은 대화 주제가 바뀌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며 이런 식으로 임의로 주제를 바꾸면 심각한 결례로 인식하므로 대체로 성인이 되기 전에 교정이 되는 편이다. 잘못하면 주먹다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 반면 분위기를 중시하는 여성은 내용이 좀 껄끄럽다 싶으면 대충 공감하는 척 하면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자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XX 말이지? YY도 XX 이상하다고 하던데, 그런데 YY는 어떻게 생각해?" 이런 식으로 주제를 확 바꾸어 버리는 경우는 제법 흔하며,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은 여성의 대화가 정신없다는 편견을 갖고는 한다.
[15] 물론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되묻기가 아닌 다른 수단도 많다. 예를 들어 대충 대답 내지 공감하는 척 하면서 대화를 종료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화자 입장에서는 무시 받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이를 무마하고자 상대의 의견이 궁금한 척 되묻기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도 바보가 아니므로 어느쪽이건 불쾌한 것은 변함이 없으므로, 굳이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다만 대체로 본인외의 다른 사람들은 껄끄럽게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으므로, 애초에 분위기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잘 검토할 것. 주변에서 보면 분위기를 바꾸려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16] 하지만 이 경우는 되묻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체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매우 이기적인 행위이다. 또한 소수의 입장 역시 존중받아야 하지만 단체 행동에서는 다수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우선시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