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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에 관한 시
차례
느티나무 / 신달자
聖 느티나무 / 나희덕
5월의 느티나무 / 복효근
젊은 느티나무 / 박남준
아버지와 느티나무 / 손택수
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 신경림
느티나무 타불 / 임영조
느티나무 아래서 / 이상국
하늘의 집 / 이상국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 곽효환
젊은 느티나무에게 고백함 / 정호승
느티나무(노래) / 하춘화
느티나무 / 신달자
혼자 되고
첫 고향길
큰길 두고
외곽길 고요히 돌아
어릴 적 업히고 업어 주던
느티나무 앞에 서다
아무 말 않고
서로 삭은 등을 바라본다
엄마 보듯 뜨거워지는 목줄기
- 신달자,『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문학수첩, 2001)
聖 느티나무 / 나희덕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잔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 그루 榕樹처럼
제 아궁이에서 자꾸만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 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 가지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5월의 느티나무 / 복효근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 복효근, 『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젊은 느티나무 / 박남준
지난 가을의 잎들
온전히 떨치고 나서야 봄은 온다
세월의 나이테가
한 줄 한 땀 켜켜로 쌓여갈수록
이 땅, 사람의 곁에 내린 뿌리들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
무성한 가지들 부끄러움 없이 곧게 뻗고
푸르게 푸르게 잎들을 키워내서
품안이 너른 그늘도
드리워야 한다는 것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추운 겨울 건너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랜 가뭄 이겨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큰바람 앞에 꺾이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범람하는 홍수를 막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돌아보면
아득하지 않은 길이 어디 있으랴
어질병의 현기증 일던 모진 시련 없었으랴
말문이 막히고 기막히던 일들 이루 말할 수 있으랴
여기 이 땅의 바람머리 언덕에 서서
나는 보았다
사람의 아이가 자라나서
아버지가 되어가는 일
세상의 한 하늘을 넉넉하게 받쳐줄
기둥을 세운다는 일이다
그것은 떳떳한 삶의 밥을 지어 나누는 집을 짓고
어둔 밤길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등불을 내건다는 일이다
처음 한 알의 씨앗으로
새싹을 틔웠을 때를 잊지 않는다
까치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의 마을에 희망의 일들을 전하는
나의 이름은 언제나 젊은 느티나무
무더운 여름날 일하는 자의 아름다운 땀을 식히는
나의 나이는 하늘 아래 싱싱한 푸른 그늘의 나무
- 박남준,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2000)
아버지와 느티나무 / 손택수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기 위하여 그렇게 기울어 간 것이나 아닌지, 쓰러질 듯 기울어가면서도 기울어 가는 둥치를 끌어당기느라 뿌리를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 사람들 등의 굴곡에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기울어 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고단하게 쓰러져갔을 나무, 풍성한 머릿결을 바람에 비다듬고 내가 알 수 없는
노래에 수만의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흑백 속 에서도 그 노래 빳빳하게 살아 있다
언젠가 구겨진 선처럼 내 몸에도 깊은 주름이 패이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생생한 한 그루 아래로, 돌아가서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아름드리 둥치에 지그시 기대어볼 수가 있을까
처음 나무는 낯선 나를 의아해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품고 지쳐서 돌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겠지만, 구겨진 생의 실핏줄마다 새순 같은 초록물이 번지고, 몸과 박동음과 물관을 타고 오르는 은지느러미 미끄러운 물소리가 다시 눈부시게 만나는 한때
나무는 이내 알게 될 것이다, 약간 굽은 내 등의 굴곡을 통해, 무너져가는 가계를 떠맡은 채 일찌감치 그의 곁을 떠나간 청년 하나를, 그가 꾸다 만 꿈과 슬픔 까지를
어쩌면 흑백의 저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부를 노래 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도 좋을는지 모른다 사진 안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어느 먼곳을 향하여 아버지의 스무살처럼 속절없이 나는 또 그 어느 먼곳을 글썽하게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뿌려주기 위해, 좀더 멀리 보내주기 위해, 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주는 한 그루, 바람을 몰고 잠든 가지들을 깨우며 생살 돋 듯 살아나는 노래의 그늘 아래서
-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사, 2003)
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 신경림
산비알에 돌밭에 저절로 나서
저희들끼리 자라면서
재재발거리고 떠들어 쌓고
밀고 당기고 간지럼질도 시키고
시새우고 토라지고 다투고
시든 잎 생기면 서로 떼어 주고
아픈 곳은 만져도 주고
끌어안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이렇게 저희들끼리 자라서는
늙으면 동무나무 썩은 가질랑
슬쩍 잘라 주기도 하고
세월에 곪고 터진 상처는
긴 혀로 핥아 주기도 하다가
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머리와 어깨와 다리에
가지와 줄기에
주렁주렁 달았다가는
별 많은 밤을 골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떼어 온 고을에 뿌리는
우리 동네 늙은 느티나무들
-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
느티나무 타불 / 임영조
곡우 지나 입하로 가는 동구 밖
오백 년을 넘겨 산 느티나무가
아직도 풍채 참 우람하시다
새로 펴는 양산처럼 綠綠하시다
이제 막 어디로 나설 참인지
하늘로 빗어올린 푸른 머리칼
무쓰를 바른 듯 나붓나붓 윤나는
싱그러운 주책이 정정하시다
그런데 이런! 다시 보니
꺼뭇한 앙가슴이 동굴처럼 허하다
얼마나 오래 속 태우며 살았는지
정말 마음 비운 노익장이다
배알까지 빼주고 지은 절 한 칸
스스로 空이 되는 적멸궁이다
저 늙은 느티나무는 아마
어느 날 느닷없이 날벼락 맞고
문득 깨쳤으리라 몸을 비웠으리라
중심을 잡기 위해 무게를 덜고
부질없는 노욕을 버렸으리라
속 비우고 여생을 지탱하는 힘
마지막 안간힘이 곧 나무아미타불
이승에서 이름을 완성하는 것이리
이제는 저승의 명부에도 빠졌을
저 늙은 느티나무는 이 다음
죽어서도 느티나무 陀佛이 되리.
- 임영조,『시인의 모자』(창작과비평사, 2003)
느티나무 아래서 / 이상국
여름이 되자 매미들이 머슴처럼 울었다
느티나무 그늘 속에서였다
내 딸아이는 어려서 그 밑에 쉬를 하고는 했다
그애도 커서 이제는 처녀가 되었지만
느티나무가 아니라면 예의바른 그애가
그런 실례를 할 리 없었을 것이다
느티나무를 두드리기 위하여 소나기는
후드득후드득 아프게 왔고
새들은 아침을 소란스럽게 했으며
가지에 몸을 다친 바람들은
쓸데없이 돌아다니며 울었다
가을에도 그랬다
멀리서 보면 동네가 근사해서
아파트값이 너무 올라간다고
관리소 사람들이 이파리를 털거나
그의 몸을 잘라내기도 했다
최근에 사람들은 느티나무 때문에 벤치를 만들었으며
거기에 앉기 위하여 노인들은 나이를 먹었다
- 이상국,『뿔을 적시며』(창비, 2012)
하늘의 집 / 이상국
전깃줄에 닿는다고
인부들이 느티나무를 베던 날
아파트가 있기 전부터 동네를 지키던 나무는
전기톱이 돌아가자 순식간에 쓰러졌다
옛날 사람들은 가지 하나를 꺾어도 미안하다고
나무 밑동에 돌멩이를 던져주었고
뒤란 밤나무를 베던 날
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흙으로 그 몸을 덮어주는 걸 보았는데
느티나무의 숨이 끊어지자 인부들은
그 커다란 몸을 생선처럼 토막내 싣고 갔다
이파리들의 그늘에 와 쉬어가던 무성한 여름과
동네 새들이 깃들이던 하늘의 집을
그렇게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 이상국,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 곽효환
언제부터였을까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동리의 정자를 품은 느티나무
사방으로 가지를 곧게 뻗어
무성한 그러나 인적 없는 여름을 떠받치고 있다
비늘처럼 껍질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늙은 느티나무 그늘에
몸 들이고 기대었던 사람을 생각한다
그를 닮고 싶었던 더러는 그렇게 살았던
바람이 전하는 말과
시간이 쌓아둔 흔적,
무수히 드리웠다 사라지는 삶들을
그는 오랫동안 켜켜이
몸 안에 쌓아두었을 것이다
얼음처럼 투명한 세포들이 쌓은 나이테
이제 그는 단단한 풍경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쉽게 흔들리지도 그렇게
일찍 지지도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 곽효환,『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 2014)
젊은 느티나무에게 고백함 / 정호승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젊은 느티나무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무량수전 무거운 기와지붕을
열여섯 개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선 까닭이
천 년 전
느티나무가 사랑했던 모란 때문임을
늦어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오늘 홀로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느티나무 무늬로 남은 모란꽃을 쓰다듬어봅니다
오늘부터 다시 천 년 동안
무량수전 열일곱 번째 배흘림기둥이 되어
당신을 받치고 서 있겠습니다
- 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비채, 2013)
◇ 느티나무(1971)
작사 / 정두수, 작곡 / 박춘석
노래 / 하춘화
https://www.youtube.com/watch?v=JsjCHM8vfMU
오막살이 옛집엔 느티나무 한그루
귀한 손님 오실 때마다 까치가 울었지
그러나 느티나무 고목 된 지금
까치도 울지 않고 옛날이 그리워서
그리워서 잡초만 푸르렀네
오막살이 옛집엔 어머니와 둘이서
외로워도 어린 가슴에 즐겁게 지냈지
그러나 느티나무 고목 된 지금
어머님 안 계시고 옛날이 그리워서
그리워서 풀벌레 슬피 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