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져 있던 사람들 (외 2편)
김소연
선생님 댁 벽난로 앞에서 나는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과를 깎았고 누군가
허리를 구부려 콘솔 위의 도자기를 자세히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창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비를 올려다보았고 누군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뭘 보는 거야?
비 오는 걸 보는 거야?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다 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처마 밑에 벌집이 있는데요?
119를 불러서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선생님을 처마 아래로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말벌만 쳐다보았다
겨울이 되면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는댔어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온다구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앉으며
말벌의 독침은 연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옆에 다가와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벌에 쏘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벌집을 들고 내려왔다 이건 작년 겨울에
처마 밑에 있던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저 벌집도 내 차지야
벌집은 정말로 육각형이었다
까끌까끌했지만 보석 같았다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선생님은 2층에 벌집이 하나 더 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촉진하는 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푸른 얼음
나를 숨겨주는 밤 더 많은 나를 더 깊이 은닉해주는 밤 두 손을 둥그렇게 모아 입가에 대고서 들어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은 밤 과즙처럼 끈적끈적한 다짐들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밤 모든 게 녹고 있는 밤 누군가가 가리키는 과거가 미래라는 지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누군가가 가리키고자 하는 미래가 과거라는 것을 눈치챘다가 미래가 더 이상 미지가 아님을 증명해보는 밤 걸어가보는 밤 모르는 데까지 돌아올 수 없는 데까지 상상도 못 해본 데까지 가는 밤 어플을 켜고서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흘린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 4차선 도로 한가운데에서 오래 서 있고 고양이의 사체 앞에 오래 서 있고 날벌레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밤 사로잡히는 밤 형광등 케이스 속에서 죽은 벌레들을 털어냅니다 여름은 참 징그럽지요? 시끄럽지요? 밤은 더하지요? 바깥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런 식이지요? 좋나요? 잘했나요? 뿌듯하지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좋은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람이 된 것도 같은 이 밤 신뢰할 만한 인상에 걸맞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 밤 되고 싶지 않음이 오롯해지는 밤 나은 사람 같은 것을 거절하는 밤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를 뜻하는 것은 공들여 찾아낸 모욕 중의 하나이다. 저녁에 읽은 문장 하나를 받아 적으며 미소 짓는 관념적인 밤 관념이라는 말이 터무니없어 씨익 웃는 밤 관념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 발자국이 찍힌 눈 위에 또다시 눈이 내리는 일처럼 있는 것을 없다고 하기 정말 좋은 말 일괄 소등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이 검정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밤 모서리로 밀려나는 밤 가속이 붙는 밤 귀한 것들을 벼랑 끝에 세워둔 것처럼 기묘하고 능청스러운 밤 벨벳 같은 부드러움을 한껏 가장하는 밤 단 한 순간도 고요가 없는 지독히도 와글대는 밤 무성해지는 밤 범람해지는 밤 꿈이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기 푸른얼음처럼 지면서 버티기 열의를 다해 잘 버티기 어둠의 엄호를 굳게 믿기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에게 굴하지 않기
―시집 『촉진하는 밤』 202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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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