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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티투어
오백년 도읍지를 쓸쓸히 필마로 석양에 돌아오니 산천은 옛날과 같은데 그 시절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아! 저녁연기 자욱한 곳에 달빛이 은은하니 한가한 가운데 꿈만 같구나. (五百年來都邑地 蕭蕭匹馬夕陽還 山川依舊人何在 煙月依俙夢裏閒) 이시는 고려 말 야은 길재의 시다.
오백년 도읍지 한양은 일명 한성이라 일컬으며 수 백 년 간 크고 작은 환란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온 지역으로 수많은 인걸들이 사라지고 태어나기를 반복한지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었다. 이 한 많은 역사를 삼각산은 수 천 년 간 지켜봤고 그 애환의 줄거리를 한강은 지금도 속삭인다. 역사의 현장을 주저리 주저리 간직한 한강이 지역 한복판으로 넘실대고 북으로는 역사의 증인 삼각산이 내려다보고 있으며 한강 남쪽에는 관악산인 火山이 버티고 있는 서울은 한민족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이다.
지명의 유래는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한양은 1946년 9월28일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서울시로 승격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에 의해 수도의 지위를 얻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 되었다. 이후 68년 동안 서울은 인구 1000만 명의 세계적 대도시로 발돋움했다. 이 명성에 걸맞게 문화의 도시이며 관광의 도시로 변모되었다. 서울시는 근자에 서울의 문화와 문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울거리를 찾는 외국인들을 위하여 서울 시티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서울은 최첨단의 도시형 건물과 고색창연한 고궁들이 어울려 관광 시너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서울은 대한민국역사의 한복판이다. 우리가 사는 이러한 서울의 면모를 누구나 깊이 알기는 쉽지 않다.
이 투어는 진달래회원들과 같이했다. 지난달 7월 장마기간에 부여백제고궁과 궁남지 연꽃축제를 관람하면서 10월의 관광여정을 서울 시티투어로 결정한 바에 따라 어제 14일 투어를 실시했다. 택일은 다행히 손 없는 날로 정해서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며 새털구름이 아름답고 부드럽게 서울하늘을 떠다닌다. 청명하고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이런 연유로 마음과 기분이 기쁨으로 가득했다.
같이한 분들은 이권행, 이영휘 이석범, 오봉진, 박래윤, 육종각, 황복희, 김옥재, 김종미, 황정자, 오석순, 박원숙 12명이 함께했다.
2017년 오만방자하게 열기를 과시하던 폭염의 여름은 가을의 계절에 쫓겨 가고 가을은 동장군에 밀려가는 10월의 환절기에 우리들은 서울의 수도 도심속살을 구경하려 14일 시티투어에 탑승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크게 성장한 빌딩가에 고색창연한 고궁과 조화를 이룬다. 이 여행은 걷기여행이다. 아무튼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내가 적응해가는 과정의 일부다. 젊음을 떠나보낸 65년 이상 버텨온 신체의 일부가 무리한 걷기여행을 마다한다. 그래서 걷기 여행을 다녀오면 그 후유증이 퍽 길게 우리 삶의 언저리를 맴돈다. 어제 시티투어여행은 발품 파는 여행이라 오래된 근육질이 견디기 어려워 피곤이 겹쳐옴을 느낀다. 우리들은 지나간 세월에도 서울 근교에 살면서 서울의 진면목을 견학하지 못했다. 서울에 주소를 두었던 연전에도 서울이라는 대명사가 고단한 삶의 일상에서는 그리 주목할 만한 이름은 안 되었다. 그냥 사는 곳의 지명에 불과했다. 그러한 서울이 관광명소로 바뀌면서 외국인들이 북적대고 내국인도 투어 하는 관광지로 정착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나 자신도 서울근교에 거주하면서 서울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였다.
가을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10월 중순 14일에 서울시티투어에 선택한 코스는 고궁코스다. 이 코스의 전구간은 22코스로 하루에 모두 구경하기란 무리다.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즐겨야한다. 마침 고궁주변과 종로길이 집회와 데모로 교통 혼잡을 이뤄 투어가 어렵다고 안내방송이 나온다. 시대가 흘러 각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세상이다. 우리세대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 그리고 참고 견디는 삶의 방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존재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으로 변환되고 있다.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동안만이라도 우리의 존재를 확인 하고 그리고 대면하는 이사회에서 문화와 문명에 좀 더 알차고 내실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있다. 사람은 새롭고 기이한 환경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식한다. 걷고 구경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일부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울의 가을 하늘은 화창하고 맑다. 푸르고 높은 하늘에 새털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서울의 시티투어버스는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찬란한 서울 도심을 달린다.
첫 번째 둘러본 곳이 덕수궁이다.
시티버스는 시청 앞 덕수궁 대한문 앞에 정차했다.
원래 이 궁궐은 경운궁이었다. 선조당시 임시궁궐로 사용되었던 덕수궁은 궁궐의 격식은 갖추지 못했던 곳이다.
오늘날 대한제국의 슬픔을 함께한 궁으로서 우리가 덕수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경운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 존재했던 대한제국이 시작된 곳이며, 짧았지만 가장 비극적인 역사가 펼쳐진 궁궐이다.
오늘날 경운궁의 정문으로 쓰이는 대한문의 본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경운궁에 1904년 큰 화재가 발생해서 1906년 전각들을 새로 지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그러나 안내간판은 이 중요한 내력을 생략했다. 대한문의 내력을 잠시 소개하면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 진다’는 뜻이다.「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樑文)」을 보면,“伏以, 河淸屬千一之運, 邦 永昌, 漢都奠萬億之基, 門號特揭.”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 고 나와 있다. 즉, 한양을 수도로 정하며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한양(漢陽)은 한수(漢水), 곧 한강(漢江)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漢)’은 ‘하늘’, ‘한수(漢水)’는 ‘은하수(銀河水)’를 뜻한다.「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樑文)」에는 “乃立大漢正門, 備皐門應門之規. 塗勤丹 , 取霄漢雲漢之義, 德合 蒼. (“이에 대한(大漢)이란 정문을 세우니 고문(皐門: 왕궁의 바깥문)과 응문(應門: 왕궁의 정문)의 규모를 다 갖추었도다. 단청을 정성스레 칠하고 소한(霄漢, 동쪽하늘)·운한(雲漢, 은하수))의 뜻을 취하였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하도다.” 라고 하여 ‘한(漢)’이 ‘하늘’을 뜻함을 분명히 했다.
이 덕수궁은 근대 역사에 많은 이정표를 간직한 궁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앞에서 3 · 1 만세 운동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이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곳이고 아울러
고종이 승하했을 때 백성들 사이에 독살설이 파다했다는 이야기의 진원지가 덕수궁이다. 역사의 진실이 궁금해지는 덕수궁의 석조전은 과거의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잃고 쓸쓸히 관광객만을 맞이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장 길의 안쪽인 궁궐터안의 초목은 가을의 싸늘한 냉기에 그 푸르름이 더욱 색조 있고 고종의 러시아를 등에 업고 아관 파천을 실현코자한 연장선상에서 고종은 이곳 덕수궁 함년전에서 생을 마감한 장소로 한 많은 조선말의 망국의 슬픔이 서린 곳도 덕수궁이다. 역사가 옅어져가는 오늘 그 현장은 가을 날씨에 조용하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시선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역사를 잊은 민족은 모두 망했다는 두려운 글귀가 생각나는 덕수궁 흙길을 조용히 걸었다. 대한문 밖으로 나와 다음 시티버스를 기다렸다.
두 번째 코스는 용산 전쟁기념관이다.
시티버스는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 세웠다.
전쟁기념관에 들어서면서 이 간판을 생각해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 엄청난 건물의 이름을 이렇게 무식하게 명명될 줄이야 알았겠는가! 외국관광객들에게 창피하고 부끄럽기 한량없다. 이 뜻은 속 내용 풀이야 어찌되었건 전쟁을 기념한다는 건물이란 뜻이다.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이 어찌 기념 될 수가 있겠는가? 전승기념관도 맞지 않다. 또한 승전기념관은 남북한 휴전상태에서 어불성설이다. 이 기념관에 적당한 이름은 ‘항전 추념관’ 혹은 ‘항전 추모관’ 이라야 대충 걸 맞는 이름이다. 이 기념관을 들어서려면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서 한참을 발품 들여 들어간다. 그것도 정문이 아닌 옆문이다.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 배양, 선열들의 호국 위훈 추모를 목적으로 1990년 9월 착공해 1993년 12월 완공하고, 1994년 6월 10일 개관한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에 처음 들어서면 남한산성의 휘호가 나부낀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와 주화파들의 당파논쟁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된 인조는 정축년 1637년 지금의 송파 삼전동에서 9계단위의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조아려 항복했다. 이를 인조는 항복대신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 정축하성(丁丑下城)은 정축년 1637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 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같은 해 2월 24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표현된다. 정축년 장욱과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청나라에 바쳤다. 그 비문 앞에 ‘대청황제공덕비’라 쓰였고 이비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다만 당시 인조는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下城)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기념관 초입에 병자호란의 참상을 문서와 실물로 상세히 나열했다. 지금 기념관에 부각되는 남한산성의 휘장은 작금에 상영되는 영화 ‘남한산성’의 역사의 의미를 현 시국에 빗대어 경각심을 고취하고 반성하는 의미도 있지만 속내는 영화선전물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동족상잔의 6.25 참상을 전시하고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겨 기리고 역사를 거슬러 일본과의 강제 을사늑약의 기록도 임란의 기록도 민족의 아픔을 기록으로 사진으로 전시했다. 망국에 처녀의 몸으로 일본 위안부로 끌려간 기록은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역사의 반복인가 위안부의 전신은 환향녀(還鄕女)이다. 병자호란 시 청나라로 끌려간 아녀자들이 청나라 사람들의 노리개로 사용되어 그 세월을 다 한뒤 만신창이 된 심신이 버려지자 오매불망 고향의 부모가 그리워 조선의 고향을 찾을 때에는 환향년이란 욕설로 다시 한 번 여성의 몸으로 피를 토해야했던 아픈 역사! 이는 1637년의 병자호란이 생산해 난 피 눈물 나는 전란의 후유증이며 위안부의 전신이었다. 나라가 약하면 그래서 국가를 잃으면 반드시 찾아오는 비극이다. 애국을 해야 하는 이유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3층까지 전시실이 있지만 간신히 1층만을 돌고 퇴관했다. 나이 탓이다.
이 기념관 입구에 이런 글귀가 없음이 아쉽다.
조국을 위해 산화하신 전사자 앞에
불타는 애국으로 헌신하는 우국정신으로 나라를 사랑한 이들은 많으나 총칼 앞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진 전사자들의 우국충정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기막힌 싸움은 사상과 이념이 초래한 전염병 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에 속지 아니하고 지조와 신념으로 조국의 통일과 동족의 아픔을 치유하려했던 나라의 젊은 아들들이 숨져간 이 강토에 다시 우국충정의 대나무가 되어 사시사철 푸른 애국정신으로 되살아나 조국을 지키는 울타리로 번창할 것이고 아름다운 그들의 넋은 가을날 찬 서리에도 꿋꿋하게 국화가 되어 대한민국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분단의 조국이 반세기를 넘어서고 있으나 동족의 혈맥은 이어지지 않고 민족의 아픔이 고통스런 가운데 우리의 국력이 세계10위권에 도달한 것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영령들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사랑하는 우리의 조국강산을 위해 꿋꿋이 전진한 것은 그래서 경제대국을 달성한 것은 우리 앞에 전사자 당신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전사자 당신들이 보여주신 고결하신 애국충정을 어찌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있으리요. 당신들의 애국을 기리고 무공을 흠모하는 정성을 모아 이 기념관에 이글을 올립니다. 뒤에 오는 국민들은 모름지기 옷깃을 여미고 전사자들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2017년 10월 15일
율 천
위와 같이 나는 마음속에 비문을 세우고
다시 시티버스를 탑승코자 하차지점으로 향했다.
점심때가 다가와 출출하기에 잠시 찐 밤을 한 개씩 파먹었다.
세 번째 코스는 이태원 거리다.
시티버스는 이태원에 정차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이어지는 외국인 거리축제 행사에 동참했다. 마침 휴일이라 사람도 북적거리고 인도노래와 음악 같은 공연이 가설무대에서 흥겹게 음률을 탄다. 때는 시장기도는 점심 때로 12시가 넘었다. 왼쪽은 먹거리 좌판대 오른쪽은 마시기 좌판대로 나눠져 시끌벅적하다. 우리들은 왼쪽 끄트머리 좌판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시장기를 때웠다 한 잔술에 인삼튀김, 토토리묵, 파전, 홍어삼합으로 입가심으로 시장기를 때웠다 막걸리 두어 잔에 홍어삼함으로 안주를 삼아 백주대로에 전통시장 맛 나는 분위기에 장똘뱅이 기분으로 사물놀이에 흥타령 부르며 어깨춤에 엉덩이 둥실대고놀고 싶어지는 이태원 하늘가이다. 외국인 거리축제에 외국인은 없고 서울 시민들만 시끄럽다. 일어나서 중간지점에 있는 좌판대에 다시앉아 잔치국수로 서운한 배를 채우고 봉진이가 주문한 닭발무침에 막걸리한잔 거나하게 하니 약간 취기 머리가 돌면서 느끼는 감정! 햐!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이다. 갑자기 소변이 급해 임시화장실을 다녀오니 갑자기 그 좋던 취기가 사라져 서운했다. 말로만 듣던 이태원거리는 축제거리 보광동 아줌마 바가지 씌우는 먹거리좌판대만 기억된다. 서울은 요상한 도시다 이태원거리는 축제의 분위기고 현 시각 고궁거리와 종로통은 시위대와 데모대가 악을 쓰는 살벌한 분위기다. 정말 웃기는 나라다. 이게 민주화라는 탈바가지를 쓰고 좌파정부가 들어섰는데도 그래도 시위대는 여전하다. 남산 한옥마을로 가기위해 시티버스를 탑승했다.
네 번째 코스는 서울한옥마을이다.
일명 남산 한옥마을이다.
퇴계로 스타빌딩 앞에서 하차해서 MBN건물을 끼고 우회전하면 한옥마을 입구가 보인다. 도심 속 고색창연한 한옥마을로 수시로 많은 도시민이 힐링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1998년 조성된 남산골한옥마을은 남산 북측 옛 수도방위사령부 부지 총 79,934m²(24,180평)에 한옥 5동, 전통공예관, 천우각, 전통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새천년타임캡슐 광장으로 구성되어 시민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또 번화한 도심 한 가운데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거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남산 자락을 따라 전통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계곡과 정자, 각종 화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정원 가장 높은 곳에는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고 400년 후 서울정도 천년을 기대하며 1994년 당대의 기억을 매설한 서울천년타입캡슐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선생 기념비도 있다. 옛정취가 물신 풍기는 한옥마을은 연전에 몇 번 와본 경험이 있어 소나무 그늘 가에 잠시 몸을 쉬는 것으로 한옥마을 체험을 대신했다.
퇴계로 다시 스타빌딩 앞에서 N서울타워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시티버스를 기다렸다.
다섯번째 코스는 N서울타워다.
N서울타워(영어: N Seoul Tower)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2가 남산 공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 및 관광용 타워이며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7월 30일 완공되었고 높이는 236.7 미터, 해발 479.7 미터라 한다. 수도권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 타워를 이용하여 전파를 송출하고 있다. 안전행정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라 그냥 N타워라 칭한다.
서울 어디서나 보이는 N서울타워는 서울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산 정상에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선 N서울타워는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세운 종합 전파탑이다. 1969년 12월 착공해 1975년 7월에 완공했다. 1980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명실 공히 서울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 남산 타워는 2000년 YTN이 인수한 뒤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 남산타워라 불린 지 30년 만에 N서울타워로 변신했다. '남산(Namsan)'과 '새롭다(New)'를 상징하는 알파벳 'N'을 합성한 이름이라 한다.
남산은 해발 262m, N서울타워 높이는 236.7m이고 N서울타워 높이가 남산의 높이와 엇비슷하기에 N서울타워의 전망대 높이를 고려하면 적어도 370m 높이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셈이다.
이태원을 출발한 시티버스는 서울타워 코앞까지 운행하기에 하차해서 조금만 오르면 타워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이번 오르는 길은 그 옛날 남산에 오르던 그 길이 아니고 경사가 급하고 왼쪽 한강 편으로 구멍이 뚫린 성곽이 하차장에서 타워 쪽으로 이어져 있는 폭 약 20미터 아스팔트포장도로다. 울창한 갈참나무를 비롯한 이름 모를 큰 나무들도 생경하다. 전에는 계단으로 기억되는데 힘들여 오르는 이 길이 처음 같다고 하자 동행한 김옥재님께서 그 옛날 오르던 계단은 이곳 너머에 있다고 알려줘서 방향감각을 잡았다. 오랜 만에 남산에 오르니 남산타워 이름도 변하여 N타워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오늘따라 사람이 인산인해다 타워광장에 도착하니 사물이패가 신명나게 뚜드리고 치고 돌리고 흔들고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관람객들도 기분 좋아 박수치고 즐겁게 쉬고 있다. 다시 전망대 타워 출입구에서 오는 사람마다 무작위로 4명씩 짝을 이루게 하여 고속엘레베이터 탑승순서를 기다리게 한다. 두 대의 승강기가 오르내리며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전망대가 붐빈다. 남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은 가히 대도시의 면모에 손색이 없다. 원근의 경관이 화려하고 수많은 빌딩과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강남권이 돋보인다. 잠실 롯데 123층 고층빌딩이 서울의 랜드마크로 이름나면서 유난히 새롭다. 가는 길이 바쁘다보니 전망대 한 바퀴를 돌고 이내 하강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바쁘게 버스 탑승지점으로 서둘렀다. 사람들이 모두 시티투어관광객으로 여겨져 마음이 급했다. 해는 서산 쪽으로 기울고 시계는 오후 4시를 넘었다. 다음 여정은 신사동 이지만 시내가 시위로 인한 교통 혼잡으로 성사가 불투명했다.
나는 이후 역삼동 결혼식장에 가야하기에 더욱 저녁을 같이하지 못해 아쉬웠다. 나는 부인과같이 동대문플라지 앞에서 하차하고 2호j선 선릉역으로 향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모임에 반드시 참석해야하는 임무임에도 양해를 구해 하차했지만 같이 저녁을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이 글은 훗날 다시 한 번 회고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
2017년 10월 15일 오후 2시
율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