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8-04-23)
<
군식구
>
문하 정영인
우리 아버지는 유난히 군식구가 오는 것을
싫어 하셨다.
군식구로 온 사람이
눈치를 챌 정도로 마뜩찮게 여기셨다.
오직 우리 식구
만이었다.
먼 일가붙이 군식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가 생각컨대,
아버지의 성격은
쪼잔하고 잗다랗다.
그래서 우리 집엔
자연적으로 군식구가 끼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니 당신의 친구도
별로 없었고,
우리 집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약주
한 잔도 못 하시는 체질이셨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모님이 한 분 계셨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형제를 데리고 어렵게 사셨다.
그때는 내남없이
웬만하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었다.
낮이 짧은 한
겨울철에는 아침을 느지막이 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일 일찍이 먹던 시절이었다.
장날이 되면 이모는
어린 형제를 데리고 장터에서 가까운 동네에 있던 우리 집에 들렀다.
그러면 어머니는
보리밥일망정 뜨신 점심을 지어 먹여 보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심기는 온통 먹구름이
끼었다.
말로 내색은
않지만,
이마에는 내천 자가
그려지고,
매서운 아버지의
눈초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한참 먹을 나이의
이종형제들은 수북하게 고봉으로 담은 보리밥을 게 눈 감추듯이 하였다.
아버지의 마땅치 않은
안색을 이모네 식구가 갈 때까지 풀지 않았다.
더구나 영특한
어머니와 달리 이모는 눈치가 적은 편이기도 했다.
이렇게 아버지는 군식구가 우리 것을 축내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다.
제털 뽑아 제 구멍에
박는 꽁생원이셨다.
어린 내가 보아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세월이 그분들은 다 세상을 떠나게
하셨다.
부전자전이랄까,
유전이라
할까,
보고 배운 것이라서
그런지 내가 아버지의 잗다란 성격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내가 살아오면서 우리
집에 군식구가 오는 경우가 드물다.
거기다가 우리 딸도
우리 집에 객 손님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집에서 돌아가며
친목하는 모임이 오면 아예 자기 방문을 잠가 걸고 나오지도 않았다.
핏줄과 성격은 어쩔
수 없고 태생적으로 대물림하나 보다.
더구나 손님 대접을
못해 보고 일머리가 적은 사람은 우리 집에 술친구가 온다면 미리 안절부절못하고 끌탄을 한다.
대학생까지 밥 한
번,
양말 한 번 자기
손으로 빨아 신지도 않았다고 한다.
손위 큰 올케가 다
해주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6학년 때까지 장인어른이 연필을 깎아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들이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성격이라 더욱 그랬다.
군식구는 그리도
싫어하셨지만,
자식들한테는 끔찍이
잘 하셨다.
특히
아들들에게만!
집사람과 맞벌이하던
시절,
우리는 가정부를 두고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 어린 가정부에게
과자 같은 간식만 많이 주어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다.
사실 아버지는 베풀고
사는 것과 거리가 머셨다.
달랑 수저 두
벌,
부랄 두 쪽만 가지고
분가하셨다.
어려웠던 시절 때문에
더욱 베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우리 집을 우리 동네에서 두 번 째로 큰 집과 농토를 일구셨다.
함석집
다음의…….
뒤란도 넓고 안마당과
앞마당도 넓은 그런 집이었다.
그 많은 문전옥답은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깡촌에서 오형제를 서울과 인천으로 고등교육까지 유학을 시키셨다.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
바람에 문전옥답은 다 날아가 버렸다.
아무리 쪼잔하고 잗다란
아버지이지만,
나는 늘 아버지께
감사해 한다.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한 기틀을 뒷바라지해주신 분이다.
내가 인천 숭의동
109번지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할 때도 당신들은
보리밥을 먹을망정 내가 먹을 자취 쌀은 늘 입쌀이었다.
아버지는 술 한 잔도 못
하셨다.
어쩌다 친구 분과
약주 한 잔 하시면 춥다고 덜덜 떠는 체질이셨다.
그 반면에 단 것을
좋아하셨다.
설탕물에 밥을 말아
잡수실 정도로.
아버지의 유일한
군것질은 단것과 담배였다.
군식구는 싫어하셨지만
군것질은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감주나 엿,
떡을 잘
만드셨다.
강정,
과줄,
연시 들을
마련하셨다.
담배는 장수연 봉지로
신문지로 말아 피시거나 곰방대로 피우셨다.
세월이 하마 지나갔다.
지금 나에게 군식구가
올 사람도 없는 나이다.
이즘 모임은 대개
밖에서 해결하는 것도 한몫을 한다.
나는 늘 부모님께
감사한다.
중학교 때부터 아예
교사의 길을 가라고 인천으로 보냈다.
그 당시 가난한
시골뜨기가 돈을 적게 들이고 공부할 수 있는 진학은 사범고등학교,
철도고등학교,
체신고등학교였기
때문이다
머리 영리하시고 공부를 잘하시던 아버지는
그리도 하고 싶어하던 진학을 중퇴로 마감하셨다.
중학교 입학 때
신체검사시,
빤쓰를 못 입어
보자기로 가리고 신체검사를 받으셨다고 한다.
공부도 늘
1등,
잽싸서 운동회 때
달리기도 늘 1등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넷째 아들인
나는 운동회 때 맡아 놓고 꼴등을 하였다.
그런 나를 본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셨다.
나는 달리기는
외탁했나 보다.
이젠 하늘나라에 가신지
오래다.
그렇게도 속을 썩이던
큰 아들,
찔통 셋째
형,
여자라고 소학교만
보냈다고 원망하던 한 분의 누님,
그리고 두 분의
어머니와 함께 계실 거다.
거기서도 쪼잔하고
잗다랗게 군식구를 싫어하실까?
그 성질 어디에다
버리시랴!
그래도 자식들 일이라면 불불 떨던 우리
아버지셨다.
그 당시 모든
부모님들 다 그러셨다.
문제는 갈수록 나의 생김새나 성질머리가
아버지를 빼다 박은 것을 볼 때,
내 스스로가
깜짝,
깜짝 놀란다는
것이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힘들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좋아하시던 생선 한토막을 당신 목에 넘기기 어렵고 자식에게 건져 주시는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으레 돼지비게만, 생선대가리만, 눌은 밥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던 지나간 모정의 세월, 당신은 꽁보리밥만 먹지만 내가 먹을 자취 쌀은 늘 입쌀만 보내셨지요. 고맙습니다.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것만해도 기쁨이시죠.
이젠 추억이 자꾸 그리움으로 변하니 늙어가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