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연기처럼 피어오르지만
이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나아갑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나아가오니
진리를 보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본문 주해)
23~25절 : 그랄 사람과 계속된 다툼 속에서 이삭은 브엘세바로 밀려나간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반복하여 주시며, 이삭과 함께 하여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에 이삭이 그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우물을 주심으로 이삭에게 복을 내리신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맹세를 한 곳이고 아브라함의 노년에 그곳에서 살았던 곳이다. 아브라함이 그 브엘세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창21:31~34, 22:19)
26~33절 : 하나님께서 이삭을 브엘세바로 인도하신 후 아비멜렉 왕의 일행이 찾아와서 상호 평화조약을 맺자고 한다. 그들은 이삭에게서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삭이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융숭하게 접대하고 서로 맹세함으로 조약을 맺고 돌아가게 한다.
바로 그날, 마치 이 일을 칭찬하시듯 하나님께서 또 다른 우물을 주신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불렀던 것처럼 그 우물을 세바라 불렀는데, 세바는 ‘맹세’ 또는 ‘일곱’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 성읍이 지금까지 브엘세바(일곱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로 불린다.
34~35절 : 에서는 가나안 족속의 딸들과 40세에 결혼한다. 헷 족속은 오래전부터 가나안에 정착해 살고 있었던 원주민으로, 해브론과 중앙 산지에 퍼져 살고 있었는데 가나안 족속 중 가장 큰 족속이었다.
에서의 결혼은 상호 공생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생각의 정략결혼으로서, 며느리로 들어온 이방인 헷 족속의 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다.
(나의 묵상)
이삭이 떠밀리다시피 하여 브엘세바까지 이른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브엘세바로 이끌어 오시고는 다시 한 번 아버지 아브라함의 복을 이삭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오래 살았던 곳이고, 이제 이곳에서 드디어 이삭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이다.
온유한 이삭, 어찌 보면 무능하다시피한 이 족장을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찾아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자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삭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의 참된 복은 재산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인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복은 세상적 형통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다들 족장이고 지도자이며 왕의 자리에까지 이른 자들이니 세상의 형통으로도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형통의 복에 함몰되지 않고,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이야말로 자신들의 가장 큰 복임을 깨닫는다.
성경은 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보게 한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죄악 된 인간의 본성으로 성경을 대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씀을 보기는 보아도 언제나 자기 소원으로, 자기 욕심을 가지고 대하니 사탄이 진리를 보는 눈을 가리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의 손가락으로 모아져 가리키는 분이 계시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오늘날 내게 주신 복이 바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요, 나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마치 이삭이 받는 복이 바로 아브라함으로 인해 받는 복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 때문에 주어진 복처럼......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고 사는 자가 되니 그렇게 세상의 형통에 목을 걸었던 마음, 땅에 찰싹 붙었던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철저히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악 된 본성의 나로서는 이것을 떼어낼 수가 없다. 아무리 결심하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나로서는 이 본성을 어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분이 계시니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제 그분께 연합되어 살아가는 나, 주어진 본성으로 살지 않는 나 때문에 사탄이 가슴을 친다.
십자가에 연합되어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형통이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요, 또 그렇게 살아가면 갈수록 진리이신 주님을 더 잘 알게 되니, 그 기쁨의 삶을 떠나 엉망진창의 더러운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지(벧후2:22) 않는 것이다.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24b절)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은 이삭을 보며, 예수님 때문에 복을 누리는 나를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예수님 안이요, 바로 말씀 안이다.
이 말씀 안에서 날마다 아버지께로 달려가 아버지 품속의 평안을 누리는 자,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니 이 세상에서는 가히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누리는 자가 된 것이다.
이 넉넉함으로 이제 내 주변의 수많은 아비멜렉들에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 바로 복음을 전하고 생명으로 사는 삶이다.
(묵상 기도)
주님,
날마다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으니
허상과 거짓의 세상 형통에 목매지 않습니다.
와, 어떻게 이런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깊게 파고 들어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은혜’입니다.
우물을 얻을 때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이삭이 되는 것처럼
저로 하여금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께 집중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