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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에 이르는 믿음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된 병자가 나옵니다. 또한 거기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끔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하여 각색 병자들이 그 연못 주변에서 물의 동함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가끔’이라는 단어가 사람 죽이는 말입니다. 글쎄요, 사람마다 어느 정도가 ‘가끔’인지 다 다를 겁니다. 1년에 한 번인지, 10년에 한 번인지, 100년의 한 번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가끔’입니다.
대학생 때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듀엣드라마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옆의 친구는 소경, 저는 절뚝발이역을 했어요. 베데스다 못에 소경과 절뚝 발이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상생의 비밀협약을 맺었답니다. 달릴 수 없는 절뚝 발이는 소경의 생생한 다리가 필요했고, 볼 수 없는 소경은 생생한 절뚝발이의 눈이 되어 주기로 한 거죠. 그러던 어느 날 그 가끔이 찾아왔답니다. 소경은 절뚝발이의 지시를 따라 정말 쏜 살같이 내리달려 베데스다 못에 도착했습니다. 순간 ‘물이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말이 뇌리에 번뜩 스치는데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인거예요. 이 희소성의 한계 앞에 둘의 우정은 더 이상 갈 수 없었답니다. 소경은 등짝의 절뚝발이를 팽개치고, 절뚝발이는 소경에게 다른 곳이라 소리치며 동시에 먼저 뛰어들려고 연못으로 다이빙.....
소경과 절뚝발이 모두 자신이 가장 먼저 뛰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들어갈 때와는 달리 여유롭게 V자를 그리며 유유히 나오는데, 아 플라시보 효과였을까요 처음엔 몰랐는데 여전히 눈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저쪽을 보니 절뚝발이가 미친듯이 소리지르며 두 발로 뛰어다니고 있는겁니다.』어찌된 영문일까요? 소경은 자신이 제일 먼저 뛰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스게와와 아들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행하는 놀라운 일을 목도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둘렀던 치마를 갖다 얹으면 병이 낫고 마귀들이 떠나갔습니다. 이를 본 스게와와 아들들은 바울과 같이 모방을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병이 고침받고, 마귀들이 떠나갔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니 이들은 더욱 신이나서 도취된 나머지 자신들 스스로조차 자신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계속 사기행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된 통 걸려 들었습니다. 동일하게 어떤 사람에게 있는 마귀를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 마귀들린 사람이 스게와와 아들들에게 달려 들어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냐?” 그리고는 달려 들어 옷을 벗기고 무자히 하게 팼습니다. 너무 뜻밖에 당한 일이라 당황스럽고, 무섭고, 창피해서 이들은 벗은 몸으로 줄 행낭을 놓았습니다.
스게와와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 소개된 사도행전 18장의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열 두 사람쯤 되는 제자들의 이야기도 사실은 같은 내용입니다. 이 모든 내용들이 말하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나요? “예, 짝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잠시 제 간증을 좀 하겠습니다.
성경이 믿어지는 체험도 했고,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숨기고 싶은 정욕죄를 드러내어 고백할 때 죄사함으로 가슴이 시원해 지는 것도 체험을 했습니다. 이로인해 용기를 내어 어려서 봤던 미션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UBF 모임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식은 다음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듯한 저의 신앙생활에서 오는 회의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인해 진정 나는 거듭났는가? 갈등했습니다. 분명 주님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목마름과 허무와 기갈에 이토록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모임에 사람들이 간증(소감)을 발표하면, A.D와 B.C가 명확히 갈라졌습니다. 하나 같은 레파토리는 “예수를 만나기 전 자기는 참 죽일 놈이었는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개과천선하게 되었다” 것 이었습니다. 아닌데.... 그러면서 성경을 읽을 때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우상숭배자들과 개들과 거짓말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라, 다시 죄를 범하는 자들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다시 구정물에 들어가 뒹구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들을 접할 때는 이거 내 이야기인데 하며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죄악의 굴레에서 진정 벗어나는 길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모임에서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상사중에 순복음교회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한때 세상에서 잘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술 잘 마시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폐병에 걸렸습니다. 결핵약을 한 움큼씩 먹으며 토혈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하루 하루 죽어가던 차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신유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회개하게 되었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얼마나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던지 사람들이 그를 만날까 싶어 피해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금호고속 비서를 하던 자매님이 신 내림을 받은 후 자궁암에 걸렸는데 이 분이 그 자매님을 만나 신주단지 등을 깨 버리고, 안수기도 하는 중에 자매님의 자궁암덩어리가 빠져 나오고 치유가 되었습니다. 이후 자매님은 신학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또 이 상사분이 중증환자들을 대상으로 차량봉사를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하반신마비자를 이 분의 차로 모시고 예배에 데려 가시는 그런 봉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분이 마비자의 손을 잡고 당기는데 순간 손에서 전기같은 것이 나가더니 마비자가 치유되어 일어선 것입니다. 이런 신유의 경험은 직장 상사분의 인생을 달리 만들었습니다. 그는 결단하고 직장생활중에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시더니 부장승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회사를 그만두고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이 분과 만나며 갈급하던 차에 ‘성령세례’에 대해 듣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제 문제의 해결은 ‘성령세례’에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갈급하던 차에 순복음교회도 나가보고, 여러 책들도 읽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모임과 방향이 달라 오는 갈등으로 그 길을 계속 추구하지 못 했습니다.
그렇게 모임에 주저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는 제 한계 속에서 오는 괴로움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혹시 내가 거듭나지 못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이때부터 정말,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찾기 시작했습니다. 워치만 니, 삼일교회 손성은 목사님의 간증, 스테반차녹, 조나단에드워드, 이현수 목사님, 귀용부인, 제씨펜루이스, 앤드류머레이, 정동석 목사님, 그 외 인터넷상의 수많은 글들, 안식교의 책, 장로교의 책, 감리교의 책들과 수많은 간증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신앙생활을 해 온 지가 30여년 가까이 되는데 초보중에 초보인 ‘거듭남’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이 문제는 영벌과 영생의 문제였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 문제는 자유의지와 예지예정 등 알미니안주의, 칼빈주의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신학을 한 것은 아니더라도 대강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알아야 했으므로 관련된 글과 책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회개할 수도 없는 자에게 “죄의 소원은 내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회개하라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칼빈주의보다는 알미니안주의가 옳다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회개가 중생이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정에 의하면 회개는 중생한 결과이지, 회개가 중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말을 확인해 보십시오. 마틴로이드존스의 책, 그 외 청교도들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시면 금방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츰 예정은 교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요, 정말 성경적인 것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정은 인간편에서 참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라기에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그 외 수많은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말합니다. 바울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미리아심에 따른 은사와 부르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신인합동이니, 자유의지니 많은 주장과 교리들이 있고, 그리 볼 수 있는 성경말씀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참 믿음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원함으로 말미암음도, 달음질함으로 말미암음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고 한 데살로니가서의 말씀은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KJB에서도 오늘 사도행전 13:48절 말씀은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만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신 혈육에 속한 그 자녀들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거듭남이란? 우리 주님이 혈육속에 들어오심으로 한 몸에 두 생명을 가진 나사렛 예수로 이 땅에 태어나 사셨던 것처럼, 한 몸에 혈육(육신)과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동시에 갖은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죠. 이미 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정하기 힘드시죠? 그런데 어찌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걸요. 수많은 모압여성들이 있었지만 오직 룻만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진실로 거듭났다고 하시는 분들의 간증을 잘 들어보세요. 박보영 목사님이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이기웅 목사님이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성경에 사도바울이 먼저 주님을 찾았나요? 삭개오가 주님을 찾았나요?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습니다. 본질이 바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참 된 나의 본질을 주님 안에서 발견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 짝퉁입니다. 중세(4세기로부터 16세기) 약 1,200년간 기독교천지였습니다. 러시아의 화려한 빼떼르스부르크의 황금성당, 유럽의 고색창연한 성당을 보십시오. 그와 같이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는데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참 생명은 정말 드물게 나타날 뿐 이었습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이나 제도, 교육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위에서 태어나서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다만 미운오리새끼마냥 사람이 자신의 그 본질적 생명을 깨닫지 못하다가 이를 깨달을 뿐입니다.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주신 바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 생명을 가진 사람(거듭난 사람)인가?, 달리 말하면 택자인가? 오늘 말씀처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 내가 가면 너희 말이 아니라 능력을 살펴보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정 그 속에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자녀의 생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열매로써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복 있는 자입니다. 복을 소유한 자가 어찌 사는지 시편 1편, 마태복음 5-7장을 보시면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소유한 자가 어찌 사는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시면 압니다. 진정 내 속에 하나님의 자녀의 씨가 있다면 그 증거가 실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누가 거듭난 자의 표지가 이러 이러 하다고 말하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론일 뿐입니다. 이미 성경에 다 나온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론을 말하는 까닭은 상상임신하지 말라는 것이요, 덮든지 차든지 할 것이지 미적지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적지근한 것이 가장 불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백보좌 심판의 비극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이 염소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항의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지 노릇하고” 정말 거듭나지 못 하고도 선지자 노릇이 가능합니까? 예. 도교와 불교의 선승들이 마귀를 쫓고, 병을 고치고 환상을 보고 진언(방언)을 말하는 것을 모르십니까? 누가 가룟 유다만큼 체험과 신비역사를 하실 수 있으신지요? 출애굽기의 술사의 기록을 인정하시지 않으시려는지요?
이런 글이 환영받을 수 없겠지요, 이런 글을 쓰기 힘이 듭니다. 정말 태생적으로 구분되어 태어나는 것이 중생이요, 운명적인 것이라면 모든 종교적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런지 마음이 참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영생에 이르기까지 그 긍휼하심을 사모하십시다. 이 본질에 충실하십시다. 마땅히 진실한 성도라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하지만 내가 양인지, 염소인지도 모르면서 재림을 사모하는 것은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것을 복스러운 소망이라 하였습니다..재림소망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다보면 조금은 더 온전해지려 하고 한번더 찬송하며 기도할꺼라 여겨지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점을 안타까워 하시지 않을까요?
저도 님의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이 공감했습니다. 창세기에 시작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서부터 시작된 혼란...이였지만...그어떠한 신학의 근거에 상관없이 우리는 누가 주님께 속한 자인지 모른다는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서로 세우는 일을 해야겠지요...그렇지않다면 제자를 보내시고 사역을 시키지도 않으셨을것같습니다. 또 모르는것이 주님의 은혜인것같습니다. 저사람은 누구에 속한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은 저희에게 있지않기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으로 열방을 섬기고 기도하며 한사람의 영혼이라도 주님이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주님의 날에 주님보기위해서 기도로 파수로 섬겨야한다고 믿습니다.
깊이 고뇌하고 묵상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심을 압니다. 그 성령님께서 님께 많은 고민을 하게하시고 깊이 묵상하게 하시면서 또다른 영역으로 높이실것입니다...주님은 참으로 인격적이기에 일방적으로 강압적으로 하시기보다는 많은것들을 씹고 또 씹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면서 끌어가시는 분이신것같습니다.. 주님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따라 거룩한자로 서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