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야구부를 해체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연습 게임에서 1승도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다. 야구는 내가 아무리 간절해도 팀원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팀 스포츠이다. "저게 팀이냐?" "고등학교 어떻게 가려고 저러지?" "야구 그만 해라!" 우리 팀의 결과는 언제나 처참했다. 심지어 우리 학교가 상대로 호명되면 상대 팀은 1승을 거저 챙긴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독한 패배감 속에서 3학년 마지막 동계 훈련을 맞았다. 다른 팀은 따뜻한 남부 지방으로 전지훈련을 가는데, 우리는 학교 지침으로 추위와 싸우며 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이어갔다. 어느 날, 간밤에 내린 눈이 운동장을 하얗게 뒤덮었다. 하루 쉴 생각으로 들떠 있는데, 감독님이 전원 훈련 준비를 하고 운동장에 집합하라고 했다. 툴툴거리며 운동장으로 향하던 우리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부모님들 아니야?" 감독님과 코치님, 부모님들이 땀으로 얼어붙은 머리카락과 언 손으로 그라운드를 정리하고 있었다. 삽, 빗자루, 리어카를 총동원해 눈을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추운 날씨에 눈을 치우는 어른들의 모습은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너희는 운동만 해라, 나머지는 우리가 해 줄게. 올해는 1승 꼭 하자."
어른들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모두 달라붙어 눈을 치웠다. 그날을 계기로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체 훈련이 끝나면 시키지 않아도 남아 개인 훈련을 더 했다. 물집과 멍이 생기고 다들 말라 갔다.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1승을 해서 보답하리라는 결연한 의지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시즌 시작 전 치른 연습 게임에서 모두 졌다. 돌아가는 버스 안은 침묵만 가득했다. 희망의 불씨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루는 주장이 과자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동계 훈련 때 정말 열심히 했잖아? 우리보다 열심히 한 팀은 없다고 생각해. 땀은 배신하지 않아. 서로를 믿고 1승이라는 목표만 보고 달리자. 어른들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이번 시즌 첫 경기에 모든 걸 걸자!" 모두 각자 손에 과자를 들고 희망의 구호를 외쳤다. "해 보자!" 그 뒤부터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학교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거두고 모두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우리 학교는 후배들이 매년 프로에 진출하는 명문 중학교로 거듭났다. 꼴찌라는 오명을 벗고 야구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감독님과 코치님, 부모님들까지 한 팀이 돼 이룬 결과였다.
언제 어디에서 현실의 벽을 마주할지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깨부수려고 노력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이때의 경험으로 좋은 친구와 땀은 배신하지 않고,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이뤄진다는 교훈을 얻었다.
강인규 | 소설가
일본 교토국제고 야구 우승과 재일동포들의 조국애
일본에서의 고교야구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에는 4,000여개 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는데 고시엔(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야구대회는 소위 꿈의 대회라고 할 정도로 인기도 높아 그 정상을 차지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재일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1947년 설립한 교토국제고등학교가 일본의 최고 권위 고시엔야구대회(일본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지난 달 23일에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이 열리던 날 오전 10시부터 간토다이이치고와 결승 경기가 일본공영방송인 NHK가 경기를 생중계하여 전국에서 시청하였다. 이미 준결승전에서 승리하여 한국어로 된 교가가 나오고 선수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됨으로서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에서도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같은 대회의 우승을 놓고 한·일간 관심이 높자 일본에서는 단순히 한 스포츠 경기의 이벤트로 축소하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번 교토국제고등학교의 고시엔고교야구대회 우승은 단순히 겉으로 표출된 사실만 집착하고 순간적 흥미로 그칠 수만은 없는 많은 내면과 연결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동포들이 설립한 학교와 동포의 후세들의 교육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학교는 당초 1947년에 교토조선중학교로 설립되었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인가를 받고, 2003년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 학교인가를 받아 교토국제고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재학생 중에는 약 30%가 한국계 학생이라고 보여진다. 필자는 2009~10년 교토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교환교수로 있을 때 그 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다. 조그만 학교로 지금은 전교생 160명인데 과거와 달리 많은 일본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과거 ‘70년대까지도 일본에는 동포들이 설립한 학교가 일본 전국에 많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는 정규학교로 인정하지 않아 재정 지원을 거의하지 않았고 졸업시 대학진학에도 걸림돌이 많았다. 일본 동포들은 역사의 아픔과 질시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으려 눈물겹도록 한국혼을 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무정하리만치 도외시 해왔던 적이 많았다. 조국 한국이 세계에서 최빈국인 시절 재일동포들이 보여주었던 조국애는 실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참가 시 부산거쳐 일본 요꼬하마로 왔을 때 재일동포들은 모든 경비를 모금ㆍ제공했다. 또한 1997년 IMF 위기에 직면했을 때 조국의 경제 위기 극복 지원을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하였다. 그들은 조국의 경제 위기 극복캠페인을 전개해 약 1년간(1997.12-1999.1) 재일동포가 한국에 송금한 금액은 780억엔에 달하였다. 일본 주요 도시에는 10개 한국 공관이 있다. 이 가운데 9개 공관은 재일동포들이 기증한 것이다. 필자가 교토에 거주할 때 오사카총영사관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때 총영사관 건물에는 매우 큰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이 태극기에 대해 오사카 거주 한 재일동포는 오사카 일대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 번화한 곳에 총영사관을 건립·제공하면서 단 하나 조건으로 ‘세계의 여러 공관들 중 가장 큰 태극기를 게양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다. 이후 필자는 오사카를 갈 적마다 그 큰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동포들의 그 뜨거운 조국애에 가슴깊이 감동의 물결이 인다. 재일 동포들이 조국을 위해 한 일이 어디 이것뿐이었는가?
그러나 우리 정부에서는 역사적 아픔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그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던 그들을 위해 제대로 된 관심을 갖지 않았고 조선학교에 대해서도 거의 방기하다시피 하였다. 지방자치단체로서 서울시의 조선학교 한글교육 지원과 경기도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 조례제정 노력 등이 그나마 있을 뿐이다. 교토국제고 교가(校歌)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중략- 힘차게 일어나라 대한의 자손/ 새로운 희망 길을 나아갈 때에/ 불꽃같이 타는 맘 이국 땅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되자' 일본 땅에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그는 한국인이 아닐 것이다.
국립목포대 명예 교수 신순호
|
첫댓글
잘했어요.대한민국 화이팅
고운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기쁨과 웃음 가득한
좋은 하루보내세요
동길짱 님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좋은 글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추석 명절 잘 보내시고..
23일 반갑게 뵐께요^^
감사합니다
핑크하트 님 !
풍성한 한가위,
남은 한 해 보름달처럼
마음도 풍요로우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추석 명절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