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생을 바쳐 이룩할 사명이 무엇인가? -윌리엄 윌버포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는 25세에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의 평생을 바쳐 이룩할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고민을 시작한 지 2년 후, 그는 노예 폐지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787년 스물일곱 살의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두 가지 사명을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악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정치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하원의원에 진출했다.
18세기 말 영국의 노예 무역은 국가의 핵심 사업이었다. 그때까지 150년 동안 200만 명 이상의 노예를 수송했는데, 당시의 노예무역은 영국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식민지 산업이었으며, 국가 안보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예들은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해 항해 도중 25%가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지만 경제적인 이득이라는 이유로 묵인되었다. 그러다가 1783년 노예선 ‘종’에서 벌어진 잔학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서양 중앙 항로에서 길을 잃은 이 배는 노예 60명과 선원 7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식수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선장은 식량보전을 위해 132명에 달하는 노예를 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그렇게 해서 배의 안전을 도모하고 보험회사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족쇄를 채운 채 물에 던져진 노예는 대부분 죽었고, 몇 명이 족쇄를 풀고 간신히 살아나와 이 사실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참상에도 불구하고, 주로 왕족이나 귀족으로 구성된 노예 지지자들은 그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매국’으로 몰아붙여 잠재워버렸다.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무역은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노예 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다. 왜소한 체격의 윌버포스는 150번이 넘는 국회논쟁을 통해서 당시 영국 제일의 웅변가답게 불같은 사자후를 토해냈다.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노예 제도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오래 살아남은 국가는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윌버포스의 최종적인 목표는 노예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노예를 해방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노예 무역을 중단함으로써 그의 참혹함을 없애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런 윌버포스에게 온갖 중상모략과 여러 차례의 암살 위협이 가해졌다.
“골통이 작은 윌버포스는 가라. 고향인 헐로 돌아가 거기서나 설교해라. 교회당에서나 어울리는 어투로 의회에서는 더 이상 떠들어대지 마라. 나는 너 같은 조무래기의 조소와 너의 건방지고 거만한 달변을 증오한다. 무역의 피해가 너의 입술에 내려와 앉으니, 벌레들이 가장 고상한 배들을 갉아먹을 것이다. 윌버포스야, 부끄러운 줄 알고 꺼져라.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름과 함께, 이 꼬마 난쟁이야.”
하지만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윌버포스는 키가 작고(160cm) 허약한 체질이었으며 시력까지 나빠서 일생 동안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기나긴 투쟁을 계속해 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갔으며, 시와 노래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접근하기도 했고, 노예를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운동을 벌였으며 탄원서를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하원의원으로서 입법 활동에 총력에 총력을 기울였다.
윌버포스는 전년도에 이어 1791년에도 노예 무역 페지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4시간 동안 연설했다. 하지만 하원에서 8표 차이로 패배했다. 1793년에는 2표 차이로 패배했고, 1794년에는 4표 차이로 패배했다. 1797년에는 74대82, 1798년에는 83대87, 1799년에는 54대84로 연거푸 패배했다. 1804년에는 하원에서는 124대49로 이겼지만 상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805년에도 70대 77로 패배했다.
그리고 1807년 마침내 283대16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윌버포스의 기대감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으며 그의 결심을 더욱 확고해져 갔다. 사람들은 윌버포스의 마음 속에는 ‘강철 스프링’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노예 무역 폐지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긴 지 20년이 지나는 동안 윌버포스는 영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윌버포스가 사명을 품은 지 45년 후인 1833년, 그의 나이 72세에 노예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노예해방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보다 30년 이상 빨리 이루어진 것이다. 윌버포스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평생의 사명을 완수한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환희와 감격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마쳤다. 노예해방법이 의회를 통과한 사흘 후, 윌버포스는 “영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얻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평생을 던졌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윌버포스는 악습의 개혁이라는 두 번째 목표도 잊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시스템을 20년에 걸친 국회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야만적인 형벌시스템을 대폭 개선했으며, 남성들의 결투 관습 폐지에 앞장섰다. 접대를 없애는 법안도 제출하였다. 또한 호화로운 파티를 일삼는 귀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해 사회 봉사에 힘을 쏟도록 하였다.
윌버포스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으며, 신념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 ‘영국의 양심’으로 칭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