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했을 만큼 그의 가창력과 무대매너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의 노래 중 <동백아가씨>는 이미자의 대표곡이라 할 만큼 유명하다. ‘이미자’의 이름과 함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중가요가 바로 이 노래다. 간장을 끊는 듯한 곡조도 그렇지만 이어지는 노랫말이 매우 애절하다.
우리 가요사에서 이 노래만큼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가요도 드물다. 군사정권시절엔 왜색이 짙다며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1987년 해금됐다. 음반발매 2년만인 1966년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 등과 함께 방송금지를 당한 데 이어 1970년엔 판매금지까지 당한 것이다. 해금 때까지 21년간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소개되지 못했지만 서민들의 밑바닥정서를 타고 끊임없이 불려졌다.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 헤어진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애창됐고 노래방 인기곡으로 자리 잡아왔다.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4분의 2박자 트로트풍인 이 노래는 원래 영화주제가로 1964년 9월 태어났다. 신성일, 엄앵란이 주연한 영화 ‘동백아가씨’는 주제가가 히트하면서 관객들의 인기를 모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서울 명보극장에서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했던 영화 ‘동백아가씨’는 을지극장으로 상영장소를 옮겨가면서 노래와 더불어 주가를 높인 것이다.
노래탄생에 얽힌 스토리를 더듬어보면 꽤 재미있다. 우선 작곡에 걸린 시간이 2시간 남짓 밖에 안 걸렸다는 점이다. 영화내용을 훑어본 작사가 한 선생의 노랫말에 작곡가 백 선생이 곧바로 곡을 붙였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가요지만 작품성이 아주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리 전통민요나 판소리 같은 가창양식을 자연스럽게 도입, 한민족의 한과 정서를 잘 나타냈다는 찬사가 이를 입증한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부산에 있는 동백섬을 소재로 하고 영화내용을 중간 중간 적절히 접목시킨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한국여성들의 인내와 한을 구구절절이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 가요가 <동백아가씨>다. 우리민족의 정서에 잘 어울리고 이미자의 가창스타일과 가사, 선율, 화성이 대중적 공감대를 이끌어 히트곡이 되는데 일조했다.
가사를 쓴 한 선생과 곡을 만든 백 선생은 둘 다 고향이 항구도시 부산이다. 그곳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음악인으로서 호흡이 척척 맞아 <동백아가씨> 말고도 함께 만든 노래들이 많다.
노래제목이 촌스러워 음반이 처음 나왔을 때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비화다. 가수 이미자는 작곡가 백 선생과 자신이 부른 노래레코드를 직접 들고 다방에 찾아가 ‘한번만 틀어달라’고 DJ에게 사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 활동에 힘입어 <동백아가씨> LP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LP음반 한 장에 당시로선 결코 적지 않았던 금액인 330원 했음에도 지구레코드사 앞엔 이틀이상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었을 정도였다. 전국 음반대리점에서 판을 달라고 줄을 섰지만 음반제작이 이를 당해내지 못했다. 음반이 나오고 이듬해까지 10만장이 넘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그 때의 10만장은 지금의 1백만장보다 더 놀라운 물량이다.
이 노래는 어려운 가정을 끌고 가던 이미자가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취입한 작품이지만 그의 뛰어난 목소리가 MBC, TBC 등 민간라디오 방송사들의 전파를 타면서 공전의 히트곡으로 자리잡게 됐다.
요즘 이미자는 60대 중반의 ‘원로가수’ 소리를 듣지만 무대에 서면 30~40대 못잖다. 낭랑한 목소리와 세련된 몸짓은 관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특히 2004년 4월 7~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미자 가수데뷔 45주년기념공연’과 2002년 9월 27일 북한에서 열렸던 ‘2002 MBC 평양특별공연’은 화제가 됐다.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북한공연에선 <동백아가씨> 등 자신의 노래 22곡과 북한노래 <다시 만납시다>를 불러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2006년 새해엔 어떤 노래와 공연으로 노익장을 과시할 지 기대가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