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막달라 마리아
요한복음 20:11-18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린다. 13년 전 부활주일에 색동교회가 태어났다. 우리 교회는 부활의 자녀이다. 세계교회가 이어온 부활절 인사를 해보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봄이 왔다. 부활절이면 세상 어디든 봄이 온다. 미국 위스콘신에 사는 민학기 목사에게 물어봤다. “봄이 왔니?” 그곳은 5월에도 눈이 온다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봄이라고 했다. 사실 겨울 속에도 이미 봄이 존재한다.
지금 꽃샘추위를 겪고 있고, 앞으로 잎샘추위도 남아있지만, 어김없이 봄은 봄이다. 꽃샘추위를 견디는 나무는 반드시 자신의 꽃을 맺을 것이다. 그것을 감당한 결과가 바로 열매이다.
T.S 엘리엇은 장시 ‘황무지’의 에서 434줄 중 그 첫 행을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부활 신앙도 마찬가지다. 죽음 안에 부활의 씨앗이 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첫 번째 소식이다.
1)
복음서는 첫 번째 부활의 경험을 한 제자들의 감동을 여러 가지 시선으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은 새벽에 어둠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를, 마가복음은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아가는 세 여성의 모습을, 누가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에 실망하여 엠마오로 되돌아가던 중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체험한 두 제자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확인한 후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한 도마를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모두 감동적인 첫 번째 부활절 사건이다.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을 때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절기가 아니라, 첫 번째 사건으로 그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사도신경의 한 구절이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가 매번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단순히 되풀이되는 의미 없는 암송이 아니다. 내 삶의 부활 신앙을 일깨우는 감동과 긴장과 도전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의외의 ‘죽음’이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갑작스러운 십자가 처형이 아니라, 이미 세 차례 반복하여 예고했던 ‘부활’이 더 충격적이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처음에는 두려움과 놀라움이었고, 나중에는 환희와 기쁨이 되었다.
부활 사건의 증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들어보자.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아갔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려면 시체가 부패하기 전에 발라야 하는데, 안식일 규정 때문에 늦었다. 또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무덤을 찾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벌써 사흘째가 되었다.
그이의 마음은 얼마나 조급했을까?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새벽 일찍 어둠을 뚫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무덤에 찾아온 것이다. 어울리는 말씀이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주님에게 받은 은총이 그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였다.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무덤은 비어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가서 이 사실을 즉각 알렸다. 두 제자가 급히 달려와 사태를 파악했지만, 아직 빈 무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2)
막달라 마리아는 참 대단한 여성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두 남자 제자가 의문을 품고 돌아간 후 다시 무덤을 찾아왔다.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가 남다르다. 그이는 울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살펴보았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11-12).
요한복음의 시선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조금씩 따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는 두려움을 이기고, 의심을 극복하고,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였다.
빈 무덤에 앉아 있던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들은 어찌 우느냐고 물었다. 그냥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다. 천사들의 판단에 지금 울 상황이 아니고, 또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울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막달라 마리아는 엉뚱하게 반문하였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
그러고 나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무덤 앞에서 섬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마리아는 담대하다. 마리아는 등을 돌이켜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으레 동산지기로만 추측하였다. 그도 역시 마리아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
마리아는 다시 초조한 마음에 대답한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
막달라라 마리아는 자기 홀로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고 가겠다는 것인지 비록 대책은 모르겠으나 그 용기, 그 진심, 그 믿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그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그 자신이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혔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복된 사람이었다(막 16:9). 이후로는 예수님에게 목숨을 걸고, 희망을 걸고, 믿음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여성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단과 동행하면서 모든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진 듯하였다. 그이에게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은 상실감과 슬픔으로 가득하였다. 그때 등 뒤에서 주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다.
“마리아야!”(16).
주님이 부른 이름 때문에 불투명한 상황은 모두 종결되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어둠 속의 그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셨다. 그 반가운 목소리, 자기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 그 음성을 듣자마자 마리아는 즉각 몸을 돌이켜 대답한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6).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의 최초의 목격담이며, 첫 번째 부활절의 진실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먼저 다가오셨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 주신다. 마리아가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친밀한 그 음성을 듣고 즉각 응답했을 때, 비로소 마리아의 눈이 열렸다.
3)
수요기도회에서 ‘누가가 그린 예수님’을 40차례 이어왔다. 3년 만이다. 이제 다음 주 수요일(4.19)이면 마친다. 화가들이 집중적으로 소재로 삼은 예수님의 생애가 여럿 있다. 수태고지, 십자가 처형, 부활 등이다.
그중에 ‘놀리 메 탄게레’가 있다. 본문에 있는 “나를 붙들지 말라”(17)란 뜻이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만남을 그린 것이다. 화가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최초의 부활 사건의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 종착점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선에 선 인물이 되었다. 그 여자의 첫 번째 부활절은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첫 번째 부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막달라 마리아에 이어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변하였던가? 그 비겁한 남자들이 180도 바뀌었다. 주님의 부활 사건은 다시 사신 주님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제자들 때문에 더욱 분명해졌다.
이제 안식 후 첫날은 진정 새로운 아침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매주일 예배하는 주일의 의미이다. 부활주일이 가장 커다란 축일이라면, 주일은 일주일마다 경험하는 작은 부활절이다.
더 이상 막달라 마리아는 슬퍼서 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이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무덤 주변을 서성이지 않고, 마을로 달려가 첫 번째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 내 삶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신다. 내 슬픔을 닦아 주시고, 내 진심을 알아주시는 분이다.
주님의 부활의 은총이 언제나 여러분에게 희망의 봄으로 임하기를, 친밀한 목소리로 다가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