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스케치
우리 큰 딸이 올해 재수하는 관계로 처음에는 수능 감독을 신청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 여선생님 한 분이 임신했다면서 대신 감독을 나가 주실 수 있냐고 간절한 눈빛 깜빡이며 부탁을 해서 당근 들어 주었답니요.
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건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일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라고 감히 믿고 있기에 부탁하는 즉시 0.3초 만에 오케이 바리를 외쳤던 거지요.
반포고등학교에서 감독을 하게 되었는데요, 난 모범 시민답게 대중 교통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3호선 고속 터미널 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는데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매트로틱하고 모던한 내부 건축양식 안으로 들어가면 종종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급행열차를 타 버리는 바람에 목적지인 사평역을 지나쳐 버려서 급행열차안에서 급 당황해 버렸습니다.
수능 당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포고등학교 정문 앞은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응원하러 온 후배 학생들과 함께 온 학부모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관계자 몇 분(경찰, 커피 파는 아줌마, 학교 수위등)만 무연한 표정으로 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수능 응원 구호 소리가 너무나 우렁차서 인근 아파트 부녀회에서 민원을 제기했거나 새벽부터 나와 개 떨 듯이 떠는 자녀들이 안쓰러워 이 곳 학부모님들이 한마음으로 대동 단결하여 동시 패션으로 아이들을 응원하러 보내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수능 감독은 매년 하는 일인데도 살짝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워낙 내가 자유분방하다 보니깐 사고치기 십상인데 국가 대사에 그러면 안 된다는 나름대로의 투철한 국가관 때문입니다.
아침 8시 5분 쯤에 시험지와 답안지 필요한 서류등 한 보따리 챙겨들고 고사실로 들어서면 아이들은 순정한 눈빛의 사슴처럼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감독 교사들도 이 때부터 10시까지 말없이 부동자세로 그냥 교탁 앞에 서 있습니다.
가끔 수험생들에게 방해 되지 않는 선에서 살짝 몸을 뒤틀기도 하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기 감독을 2시간에 걸쳐 3번 하게 되면 그 지루함의 극치에 내면 고요히 진저리를 칩니다.
묵언 수행하듯이 견디는 그 시간동안 정말 인생 전반에 걸쳐 반성도 많이 하고 미래에 대한 설계도 하고 아이들에게 시험 잘보라고 氣를 보내기도 하고 아이들 관찰도 하고 별의 별짓을 다해 보지만 시간은 국방부 시계보다 훨씬 천천히 흘러갑니다.
지금 내 앞에서 수험생들은 자기 인생을 걸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풀고 있는데 그걸 감독하는 감독 교사는 학생들 진지함의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정신자세로 무료하게 시간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합니다.
시험 문제가 어려운지 사악 사악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가 무겁습니다.
2교시 수리 영역 시간, 내가 들어간 고사장에는 결시생이 12명이 됩니다.
회송용 답안지 봉투 앞면에 결시생 명단을 쓰는데 정확히 12칸을 꽉 채웁니다.
갑자기 그 12명의 사연이 궁금해 졌습니다.
수시 합격을 미리 받아 놓았기에 그냥 한번 경험 삼아 수능 시험을 보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꾼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일 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 때문일 확률이 높을 터인데 웬지 안타까웠습니다.
12년 공부의 총결정판을 하루에 한 방으로 끝내 버린다는 사실에 참으로 가혹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능 시험도 성장해 가는데 필요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가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현실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쓰입니다.
우리 딸도 재수하면서 작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 딸과 시험 문제 복기를 하고 있는데 막내 딸이 기어코 한마디 합니다
“ 아빠, 어차피 끝난 시험인데 아쉬워 해 봤자 뭐해. 그냥 맘 편히 먹고 격려해 줘!”
12살 딸이 내 인생에 훈수를 하는데 그 말이 맞기는 맞는 터라 허허 웃으면서 큰 딸에게 청하 한잔을 가득 따라 줍니다.
우리 자식들이 살기에 점점 각박해져가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면서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개혁이 되어야 할 텐데 하는 소망을 품어 봅니다.
경쟁과 효율의 가치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이웃과 더불어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적 가치가 우리들 마음에 찐하게 새겨졌으면 합니다.
EBS 출제 70%를 통해 사교육을 억제하고 공교육을 바로 세우겠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말고, 근본적 개혁을 통한 입시 시스템의 혁명적 변화만이 진짜 공교육을 바로 세울 수 있을 담론이 진정으로 논의 되고 추구되었음 합니다.
그런데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버린 우리들이 던질 카드는 무엇일까요?
첫댓글 시험치는 것보다 시험 감독하는 것이 더 힘든 일 같아요. 첫아이 친구 엄마가 중학교때 학부모님들이 한두시간 시험감독으로 봉사하는 것을 했나봐요.(전 직장다닌다는 핑계로 학교일 안했어요.)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데네요. 그냥 일하면 시간도 잘가는데 시험감독 할때는 시간이 너무 천천히 간다고 하더라구요. 고생 많이 하셨네요. 글구 감사드립니다.
울집 둘째딸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수능을 봤는데, 다 수고하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잘 치고 하루가 넘어갔네요.
수시를 봐서 합격이 된 관계로 안봐도 되는데 자기 실력이 얼마나 되나? 궁금도 하고 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지 그냥 보더라구요. 과학고라 기숙사에 있어서 점심 도시락(학교에서 단체주문했음)도 못챙겨 준 순 날날이 엄마가 되었답니다. 아무 소용 없는 것이라고 점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마음이 쓰이고 5시반에 수고했다고 문자 보내고, 7시에 전화하고 했더니 8시쯤에 전화가 오데요. 자다가 일어난 목소리로, 그래서 잘자라고, 수고 했다고, 전화 끊고 기숙사에서 나오는 토요일만 기다리고 있답니다.
형님~ 따님데리고, 내일저녁이나, 아님 일요일 아침일찍 놀러오세요.. 우리 잔치합니다... ㅎㅎ
귀한 말씀 잘 보았습니다. 수능. 갑자기 참 익숙한 단어가 되었네요 먼 달나라 이야기 인 줄 알고 살았는데.
해랑이 수능 치느라 수고 많았어! 아비는 감독하느라 수고 많았고, 얼굴 본 지가 너무 오래되네~! 일욜 놀러 왔음 좋겠다.
아침 일찍 빛의 속도로 날라 갈께~
그곳에 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텐데...
하늘에 호수가 흐르고 새비나무가 제 빛을 호수에 드리울 그 아름다운 풍광을
예솔이네 마당에서 보면 참으로 멋질꺼야
저도 큰애가 수시에 합격하고 보는 수능이라 큰 긴장감없이 지나갔는데 감독하시는 분들도 힘들다는 생각은 못해 봤어요. 대단히 죄송스럽군요. 작은딸이 내년에 또 수능을 봐야 하는데 일년이 어떻게 지나 갈런지 걱정스럽습니다. 그저 무해무탈한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어제 퇴근무렵 책상에 "탁" 발을 걸치고 신문에 난 수능시험지를 디다 보았습니다. 으흐흐흐흐...........정말 한문제도 못풀겠더군요. 문제자체를 이핼 못하겠어요. 베베 새끼 꼬듯이 비틀어 놔서리........이런게 사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까..싶은게..애들이 얼마나 힘드까...화가 났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