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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2.06.03)]
/ 그 뜻의 비밀 (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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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여호수아 2장
에베소서 1:7~10 그 뜻의 비밀 2012. 6. 3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을 한 주간동안 많이 맛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흘러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간곳없고 짜증과 한숨과 원망으로 그저 그런 날들을 일상으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고 사는데 왜 우리는 그 은혜의 풍성함에 대하여 말할 것이 별로 없지요!
지난 금요일 라디오에서 김미화씨가 고은광순씨 인터뷰 하는 이야기를 잠간 들었습니다. 시골 한의사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여성운동을 하는 사회운동가입니다. 이번에 ‘힐링’이라는 책을 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치료방법은 ‘감사묵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에 다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갖 것에 대하여 다 감사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스트레스가 풀려지고 건강해진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모르면서도 그저 세상에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면 몸도 마음도 치료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람이 알 수도 없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을 값없이 받고 산다고 하면서 이런 사람의 감사조차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과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기는 받은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과연 받았습니까? 지난주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이 무엇이었습니까?
7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지 못하였다면 영원한 지옥형벌인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속량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분노하고 쉬지 않고 원망하고 범사에 불평하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왜 이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은혜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복과 은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은 같은 말을 씁니다. 복, 은혜 다 같은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적인 말의 뜻과 성경의 말의 뜻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과 성경의 지혜와 지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성경을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어들을 세상의 가치관으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아야 합니다.
8절을 봅니다.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심으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합니다.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주시지 않으면 그 뜻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1:17~19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봉독”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알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지 않으시면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오해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18~31절을 봅니다. “봉독”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총명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멸하고 폐하여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전도, 즉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양대 지혜라는 것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세상 사람이 들을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도가 마치 광고기법과 같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광고처럼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 자신도 천국에 가지 못하면서 그런 자들을 배나 지옥자식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세상에서 분리가 일어나는 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복 받으려고 왔다가 도망갈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부어주셔야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아무른 능력 없이 무능하게 저주 받아 죽은 그 십자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은 얼마나 세상적인 지혜와 능력과 문벌 좋은 자들이 많은지 권력의 중심부가 거의 다 그러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전하였다면 이렇게 세상의 힘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교회로 왔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지혜와 총명을 받은 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제가 이 본문을 길게 인용한 인유는 세상의 지혜와 총명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그 뜻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에베소서 1:8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심으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뜻의 비밀은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 뜻의 비밀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뜻의 비밀을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에베소서 3:1~13절을 봅니다. “봉독” 3장을 볼 때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오늘은 하나님께서 그 뜻의 비밀을 어떻게 알려주셨는지 전체적인 맥락만 보겠습니다. 바울이 계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이지만 다른 세대에서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가 차서(갈4:4)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런 비밀에 대하여 얼마나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비밀의 뜻은 간 곳이 없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꿈과 비전들만 가득하게 말하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그 뜻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10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나 보이는 이 땅의 것이나 모든 정사와 권세와 천사들도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창조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골1:16). 그런데 이것이 죄로 인하여 뒤틀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뒤틀려진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역사가 창세기 3장부터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류가 태어났기에 태어날 때부터 뒤틀려진 질서와 지식을 정상으로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는 비밀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으로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을 통일시키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통일이라는 것은 남북통일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 무릎 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통일에는 무릎 꿇지 않는 대적 자들은 심판하여 굴복시키고 영원한 지옥형벌에 넣어버리는 것도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태어났기에 나 외에 다른 이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무릎을 꿇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을 구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지만 그 마음에는 나는 너를 정복하여 나의 소유로 삼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돈 많은 사람과 권력 있는 자들에게 무릎을 꿇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 속마음을 말로 해 줍니다.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너를 나의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 만들겠다는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평생 애를 쓰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돈의 맛’이라는 영화에서 말합니다.
죄로 인하여 뒤틀려져 있는 이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가 선악과 따 먹을 때 사탄의 유혹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다 들어있습니다. 가정의 예를 들어봅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가정이 통일되기를 원합니까? 남편은 남편의 뜻대로, 아내는 아내의 뜻대로, 자녀는 자녀의 뜻대로 통일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가정이 지옥입니다. 교회에서는 누구의 뜻으로 통일되려고 합니까? 모두가 자기 뜻들을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간곳이 없이 자기주장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극대화가 통일교입니다. 모든 세상의 종교를 통일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뜻의 비밀은 이미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봉독”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뜻의 비밀입니다. 이 뜻의 비밀을 우리가 듣고 믿게 되었다면 교회로 모이는 목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기는 꿇는데 무엇을 구하십니까? 나의 기도와 금식과 철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여 나의 소유를 확대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예수님께 무릎 꿇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무릎을 꿇어 비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 내가 하나님을 죽인 자 임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늘의 천사들이 나팔을 붑니다. 그 나팔이 하늘에서는 이미 다 불어졌습니다. 묵시세계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요한계시록 10:7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비밀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이루어집니다. 일곱째 천사는 마지막 나팔입니다. 그 나팔이 불어지면 무슨 복음의 비밀이 나타납니까? 요한계시록 11:15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묵시 속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지금 왕 노릇하고 계십니다. 이 비밀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이 비밀을 역사 속에 확증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십니다.
[주일오후설교(12.06.03)]
/ 여호수아 2장
여호수아 2장은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은 것과 여리고 성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기생 라합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정탐꾼과 라합 사이에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진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수아가 40년 전에 모세의 보냄을 받은 12명의 정탐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믿음이 없는 보고를 함으로 이스라엘로 낙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40년을 광야 생활을 통하여 그 믿지 못한 자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고 그 2세대들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민13장14장). 이제는 여호수아가 두 명을 은밀하게 보냅니다.
1-14절입니다. 두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과 이를 눈치 챈 정보원들이 보고하고 잡으러 오는 긴박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라합이 이미 눈치를 채고는 옥상 삼대 늘어놓은 곳에 숨기고서는 거짓말을 합니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고 해지기 전 성문을 닫기 직전에 성을 나갔으니 빨리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추격꾼들이 급하게 나가자 성문이 닫혔습니다.
8-14절입니다. 두 정탐꾼이 잠들기 전에 라합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으며 홍해를 가르고 건넌 것과 요단 건너편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을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이 진멸전쟁입니다. 히브리어로 ‘헤렘’이라고 하는 진멸전쟁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여리고 성의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생 라합은 내가 선대하였으니 너희도 나를 선대하여 그 표를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언약과 약속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약 250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다고 하실 때는 하나님의 인자가 담기기에 이 ‘헤세드’를 언약적사랑이라고 합니다. 12절의 선대와 14절의 인자라는 단어가 같은 ‘헤세드’입니다. 이 언약으로 체결하면서 라합의 자기 가족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정탐꾼들은 이 일을 누설하지 않으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목숨을 건 언약을 맺습니다.
15-21절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을 달아 밖으로 보내면서 어떻게 피신하여 갈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그 정탐꾼들이 붉은 줄을 주면서 이 줄을 이 창문에 달아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가족을 다 집안에 들여놓고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나가면 그 사람의 피는 그 머리로 돌아갈 것이며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붉은 줄을 맨 집안에 있는데 누구든지 손을 되면 그 피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22-24절입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자세히 고합니다. 이 두 정탐꾼의 보고는 이러합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라고 보고합니다. 이로서 두려웠던 여호수아가 힘을 얻을 뿐 아니라 모든 백성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게 됩니다.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동일한 이스라엘의 소문을 들었는데 어떻게 기생 라합만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을 숨겨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시에 적의 첩자를 숨겨주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출애굽과 홍해를 말리고 건넌 것과 아모리 왕들을 죽인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지언정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는데 기생 라합은 그 하나님께 항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한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탐꾼을 숨겨주면서 언약의 표로 붉은 줄을 매는 것은 마치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집안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안은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처음 태어난 수컷이 다 죽임을 당하는 것과 연결하여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 유일하게 이 집만이 살아남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효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붉은 줄을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연결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교부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줄을 보혈과 연결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수많은 사건들을 전부 예표와 그림자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표와 그림자로 해석하는 것만 예표와 그림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레고리로 풀어 가면 신천지 식의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붉은 줄이라고 해서 바로 보혈로 연결하지 않아도 정탐꾼과 라합 사이의 언약의 표라고만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 줄은 라합에게는 소망의 줄입니다. 히브리어로 ‘줄’이라는 단어와 ‘소망’이라는 단어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붉은 줄이라는 것을 언약을 맺은 표시로 보면 됩니다. 붉은 색만 나오면 마치 보혈을 말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맺는 것은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데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조국을 배신하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라합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5-6절입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기생 라함이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라합의 남편 살몬은 유대 전승에 의하면 두 정탐꾼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살몬과 라합에게서 보아스가 나오고 보아스는 또 이방 여인 룻에게서 오벳을 낳습니다.
마태복음 족보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 4명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하는 식으로 남자에게서 남자로 연결되는데 특별하게 여자의 이름을 넣을 때에 누구 ‘에게서’라고 합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다말, 라합, 룻,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밧세바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라고 되어 있기에 밧세바 보다는 우리야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네 명의 여자 중에 이방인이 세 명이나 들어있습니다. 다말은 이방인으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라합은 창녀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으로 과부였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이런 족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1:31-32절입니다.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11:30-31절입니다.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기생 라합의 믿음을 말합니다.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이스라엘을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서 다른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받은 믿음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은 믿음은 조국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25-26절입니다.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가 오직 은혜라고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행함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데 기생 라합이 받은 행함 있는 믿음이 어떤 모습입니까? 목숨을 걸고 조국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행함 있는 믿음을 말하는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에 속한 무엇을 배신 한 것이 있습니까? 단지 윤리 도덕적인 몇 가지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행하였습니까? 아니면 교회의 일이라는 것을 몇 가지 더 행하였습니까? 그런 것을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을 여리고 성의 진멸전쟁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칼을 들고 여리고 성을 진멸하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빼들고 여호수아 앞장서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두 정탐꾼이 간 것은 정탐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간 두 증인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정탐은 이미 여호수아가 40년 전에 하였습니다. 이제 진멸 앞에서 그 성에 하나님의 택한 자가 있었기에 두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칼을 들고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0:1-12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십니다. 복음을 전하되 영접하면 그 집에 머물고 영접하지 않으면 그 발에 먼지도 떨어버린다고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표가 되며 이렇게 두 증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네에 소돔보다 더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돔 성에 두 천사가 들어갔을 때에 롯이 영접합니다. 이 두 천사도 정탐꾼 이었습니다. 소돔 성이 어떠한지 보러온 것입니다. 여리고성에 두 정탐꾼이 들어갔을 때에 기생 라합이 영접합니다. 소돔성도 진멸 당하였고 여리고성도 진멸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소돔성에서 롯과 두 딸입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기생 라합의 가족입니다. 이들은 다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는 무엇을 전하여야 합니까? 지금 당신이 꿈꾸고 희망하며 살고 있는 곳이 진멸당한 소돔이며 여리고 성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서 탈출하라고 전하여야 합니다. 과연 이런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자들은 세상을 배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전도와 이런 믿음이 아니라면 전도가 아니라 사람 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프란시스 쉐퍼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라합이라는 이 여인은 그녀를 둘러싼 문화 전체에 홀로 맞서며 믿음으로 서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서구 세계에 사는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아직 이렇게 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던 일이다. 그녀는 여리고가 함락될 때까지 상당 기간 동안 보지지 않는 것을 위해 보이는 것과 맞섰다. 여리고 왕이 그녀가 한 짓을 알아냈더라면 그는 그녀의 가장 무시무시한 적이 되어 그녀를 처형했을 것이다.....이것이 정확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이며, 라합은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어둠의 나라에 빠져나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에게 통제되는 문화에 에워싸여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심판이 있을 때까지 그 문화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한때 우리의 왕이었지만 이제 우리의 원수가 된 자에게 에워싸여 있다. 적의 영토에 살면서 영적인 전투를 기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쉐퍼는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으로 말합니다(골1:13).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까? 세상을 배신할 마음이 없다면 아직 옮겨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13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게 하는 선지자나 가족이나 한 성읍이라도 죽이고 진멸하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시 계산 해보시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눅14:25-35). 아니라면 지금 돌아서는 세상 적으로 손해를 덜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