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도시 도카메론. 족장 시대였던 1400년대는 핏줄을 중요시 여겨 근친간의 결혼이 당연시되던 때였다. 그런 족장사회에서 가장 혹독한 벌은 추방. 바로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무리에서 떨구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추방된 자들이 누구의 시기에 의한 모함에 의해서건 아니면 반드시 지켜져야 했던 피의 존귀성을 무너뜨린 즉 쉽게 말해 친족들을 살해한 자라든지 아니면 병에 걸려 더 이상 친족들과 함께 살수 없든지 간에 모여드는 곳이 바로 이 죽음의 도시 도카메론이었다. 그런 자들이 모여들었다 해서 그곳이 악의 소굴이니 무법천지 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그곳은 철저한 법치체제의 도시 국가였으며 다시 한번 인간으로써의 삶을 부여해 준 도카메론트에 대해 절대적 충성을 강요받는 곳이기도 했다.
도카메론의 지형은 높고 험한 산들이 많았다. 때문에 대체적으로 기압이 낮았는데 그 때문인지 이 지역 사람들은 심장이 여느 지역의 사람들보다 크고 강하였다. 또한 16세 이상이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보트 제도가 있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그 중에는 여자도 상당수였다. 사보트 제도 외에도 도카메론을 대표하는 제도는 많았다. 재산과 지위의 평등을 보장하는 키친우엔 제도, 남녀의 차별적 힘, 예를 들면 남자의 힘과 기술, 여자의 지혜와 사랑을 존중하는 파우치아 제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마우첸 제도, 범죄에 대한 예방과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재정해 놓은 파피스 제도 등이 그러했다. 이러한 제도가 모두 왕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도카메론트 제도]의 전제 하에 세워진 체제들이었다.
도카메론트 제도는 참으로 독특했다. 왕의 신분이 핏줄을 중요시 여기는 주변 국가들과는 달리 전승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여자도 남자도 심지어 능력만 갖추어 졌다면 어린애라도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능력이란 것이 몇 백가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힘!!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마뉴], 혼자서도 자신의 몸과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는 [타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아무리 절박하고 참담한 상황에서도 자제력과 침착성을 잃지 않는 힘, [지뉴]만 갖추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까운 젊음을 희생해야만 했다. 한 왕이 죽고 그 자리가 다른 왕으로 교체되는 시기.. 이곳에서 죽어나가는 시체만도 백 여명에 이르렀다. 가끔은 너무 많은 수인지라 시체가 미쳐 매장 되지도 못한 체 까마귀밥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토록 처참한 죽음의 결말을 알고서도 왕이 되겠다며 왕의 시험에 자진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져만 갔다. 그 만큼 왕의 권력은 매력적이었고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1489년 10월 초가을, 또다시 도카메론에는 새로운 왕의 탄생을 예고하는 피의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웃 국가인 라버스에서 페스트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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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오신다. 왕께서 오신다."
궁 안의 신하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서편 문의 양 기둥을 기준으로 양편으로 갈라섰다. 모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러지자 그들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왕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붉은 망토가 황금을 입힌 대리석 바닥에 펼쳐졌다. 드디어 왕께서 라버스와의 동맹체결을 끝맺고 돌아온 것이다.
왕이 문의 입구에 당도하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두 시종이 자신의 시종들에게서 붉은 망토를 받아 들어 왕의 어깨에 걸쳤다. 왕의 붉은 망토가 엎드러진 신하들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 갈 때마다 조금이라도 왕의 성은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그의 망토에 입을 맞추며 "왕이시여, 그 지혜가 영원하소서"하고 말하였다.
왕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내심 흡족해 했으나 그것을 겉으로 내비치지는 않았다. 왕이란 자고로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은 계획과는 다르게 너무 지체되었다. 곧바로 밀렸던 일들을 처리할 터이니 모두 내 방으로 가져오도록 하여라."
왕의 명령에 왕의 심복 중 하나인 마르고가 그 뜻을 이행하겠노라 대답한 후 조용히 왕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잘 돌아오셨다는 환영과 왕께 대한 복종의 뜻이었다. 그가 집정실로 물러가자 왕 또한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감람석으로 장식된 몇 개의 기둥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마르고는 몇 안 되는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복이었던 것이다. 왕이 모습을 감추자 그와 동시에 엎드러졌던 왕의 신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 수가 무려 975명이었다.
"하나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미그스엘님과 가르도를 왕의 방으로 모셔라. 이 일이 누설되면 너와 너의 가족의 머리를 치겠다"
집정실 앞에서 마르고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시종 하나세는 흠칫 놀라며 잔뜩 서류를 짊어지고 나온 마르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주인의 의도를 알아챈 듯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고는 동 궁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르고 역시 멀어져 가는 하나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자신의 입술에 남아있는 열에 가깝던 왕의 온기를 떨쳐내며 왕의 방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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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궁전은 왕이 있는 궁전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127개의 방마다 그 앞에 금세공 사슬이 가로질러 있었고, 금으로 입혀져 있었으며 모든 벽은 돌아가며 순종을 상징하는 야자나무 무늬의 조각과 번영을 상징하는 활짝 핀 꽃의 조각물이 안쪽과 바깥쪽에 새겨져 있었다. 바닥도 안쪽과 바닥 쪽이 금으로 입혀져 있었으며 기름나무로 커다랗게 짜여진 방의 문들에는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 조각마다 두들겨진 금이 얹혀 있었다.
누가 봐도 그 화려함이 요염할 정도인 이 궁전은 선대 도카메론트(왕)였던 아사식스가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이르아고를 위해 왕의 궁전 바로 옆에 지었던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왕의 심복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이런 동 궁전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미그스엘의 방에 하나세가 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비밀통로를 통해서 미그스엘의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미그스엘 역시 종종 이런 일이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고 하나세를 맞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왕께서 병이라도 나신 건가?”
"미천한 저는 알 턱이 없는 일입니다. 다만 마르고님으로부터 미그스엘님과 가르도님을 비밀리에 왕의 방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가르도도? 알았네.."
이미 백발이 성성한 미그스엘은 선대 왕으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아 계속해서 왕의 건강을 담당해 왔던 의사였다. 그가 벽난로 옆의 오른쪽 휘장에 달린 여러 색의 줄 중 금색 줄을 가벼이 잡아당기자 몇 분이 채 되기도 전에 약초상자를 짊어진 젊은 청년이 벽난로를 재끼며 나타났다. 벽난로는 가르고의 방으로 통하는 은밀한 또 하나의 비밀 통로였던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미그스엘은 그에게 가벼이 인사하고 나서 하나세에게 이 청년을 소개했다. 하나세가 이 청년을 처음 보았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인사하지. 이쪽은 약초 관리장 가르도일세. 그는 나의 충실한 시종이기도 하지."
미그스엘의 소개가 끝나자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미그스엘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마치 처음 만난 사이처럼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미그스엘의 뒤를 따라 하나세가 들어온 비밀 문을 통해 왕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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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10월 2일, 라버스 변방.
“애야. 얼굴이 왜 그러니?”
“돌아오는 길에 넘어졌어요. 별거 아니니 걱정마세요.”
라울은 뜨게 감을 접어두고 놀라 달려 나온 어머니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그는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에는 피가 흐르고, 강한 이마가 땅의 흙과 심하게 맞물려 피부가 한 꺼풀 벗겨져 있었던 것이다. 라울의 어미는 그가 평소 넘어지는 실수따위는 하지 않을 만큼 운동신경이 잘 발달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라울의 피를 자신의 치맛단으로 닦아낼 때 그의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도..
“아무래도 안되겠다. 아버지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오늘은 그만 가서 쉬거라.”
피 묻은 어미니의 치맛단을 보며 미안함에 겸연쩍해진 라울은 다시 괜찮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라울의 가족 가운데 그의 몸을 만졌던 다른 사람들도 곧 그와 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유감스럽게도 이 병은 상태가 완화되기는커녕 악화되는 병이었다. 라울은 발병 24시간 후 피를 토하였으며 불과 이틀 만에 코와 귀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피를 뿜어대다 사망하였다. 10월 6일 경에는 라울의 어머니와 여섯 명의 형제 중 두 명을 포함하여, 가까운 친족 12명이 사망하였으며 10월 10일 경에는 그 지역의 다른 두개의 읍의 사람들이 라울 및 그의 가족과 비슷한 방법으로 병에 걸려 죽기 시작하였다. 그 병은 신속히 확산되었다. 10월 23일, 라버스는 이 병을 페스트라 밝혔다.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인해 무려 1,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페스트의 초기 증상은 단지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거나 열이 나는 것 뿐이었다.
【 1부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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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불과 한 뼘 위로 박혀있는 붉은 벽돌들. 발을 옮길 때마다 약간의 진동임에도 불구하고 벽돌 틈새 사이로 흙먼지가 일었다. 자신의 방을 나선 후 어깨에 10여분 동안 쌓인 흙더미를 미그스엘은 귀찮다는 듯이 떨구어 내며 이 거지같은 비밀통로를 자신이 죽기 전에 기필코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의 명이란 것이 아무리 길어야 90세가 아니었던가. 내일이면 87세가 되는 그로써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위안거리였다. 의사와 왕의 방에 연결된 비밀통로를 없애는 것. 그것은 절대적이다시피 존재하고 있는 타뉴라는 왕의 법을 그 뿌리 자체부터 흔드는 대 변혁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르도, 난 죽기 전에 반드시 저 비밀통로를 없앨 걸세. 이보게, 들었나? 저 거지같은 비밀통로를 없애고야 말꺼라고. 하하하.. 아! 왕께는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지? 음.. 그래, 먼저 말씀을 드려야지. 그런데 말일세... 만약 왕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신다 해도 난 저걸 무너뜨릴 작정일세. 비밀통로가 무너지면 아마 키요미네가 방방 뜨겠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허허허."
몇 달전 술에 만취해 입밖에 내버린 자신의 소망. 개인의 소망치고는 이 나라에게 너무 많은 변혁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자신의 말을 분명 그때의 가르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입밖에 내서는 아니 될 것을 말한 꼴이 된 미그스엘은 "어제 저녁 내가 무슨 실수나 실언은 하지 않던가?"하고 은근히 가르도를 떠보았으나 가르도는 태연히 웃으며 "안심하십시오. 술을 드시다가 잠이 드신 것뿐이었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미그스엘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금새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고, 오히려 미그스엘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결코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무너질 듯 하면서도 300여년은 족히 버텨왔을 이 미로 식의 비밀통로를 15분간 순회했을 때 비밀 통로는 서서히 붉은 벽돌이 아닌 황금을 입힌 대리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왕의 방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리는 이 황금 빛의 통로는 외경감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 사람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단정케 해야겠다는 결심을 서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자신의 옷의 먼지를 털고 준비를 마친 미그스엘은 걸어오는 동안 흐트러졌을지도 모르는 약초들을 정리하는 가르도를 부드럽게 바라보다 가르도에게 다가가 그의 양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르도, 나는 눈을 감고도 이 복잡하고도 복잡한 미로에서 바른 길을 찾아낼 수 있다네. 이게 다 이 비밀통로를 내 집 드나들 듯 10여 년 이상 다녔기 때문이야. 이런 쓸모도 없는 재주를 나는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다네. 물론 자네에게도 말야."
미그스엘의 말에 가르도는 여전히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하나세의 반응은 무척이나 분명한 듯했다. 그는 몹시 흥분해서 미그스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물론 세간에는 비밀시 되어 왔으나 미그스엘님께서는 전대의 왕이셨던 비테크
지누스님(1395~1490; 45세에 왕의 시험에 통과하여 96세까지 통치함)의 악성 천식을 단 두 달만에 고치셨고 또한 좀처럼 기가 약하셔서 자주 병이 나시는 이오리스 왕(1465~ ; 1490년 25세의 어린 나이에 왕의 시험을 통과하여 지혜의 왕이라 불리고 있음)의 건강을 별탈 없이 지켜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다 이 비밀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없었으면 어찌 미그스엘님께서 왕의 방으로 드실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제는 아예 울상이 되어버린 하나세를 보며 미그스엘은 어이쿠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하고 뜨끔해 하며 하나세의 옆으로 와 그의 등을 토닥이고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보게, 늙은이의 망령된 말을 그리 가슴에 담아두지 말게.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그간 한 일이 참 많구먼.. 그래. 이게 다 이 비밀 통로 덕분이니 내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 허허허"
그의 너털웃음에 하나세와 가르도는 함께 미소지었지만 그 미소는 서로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고지식한 하나세로서는 안심의 의미였지만, 가르도로서는 하나세와 미그스엘의 속마음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자리가 된 것이었다. 하나세를 중간에 두고 가르도와 미그스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내는 우리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미그스엘 님!! 어디 계십니까? 미그스엘 님!!"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가 비밀통로를 타고 울려 퍼졌다.
"마르고 아닌가? 대체 왜 그러나? 이제 거의 다 갔네"
"빨리 오십시오. 왕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뜻밖의 그의 말에 미그스엘과 가르도 그리고 하나세는 눈이 휘둥그레져 왕의 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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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나무를 더욱 고풍스럽게 하기 위해 다갈색으로 염색한 오십 인치 너비의 책상은 왕이 자신들의 측근들에게 책봉식 후 하사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것이 궁전 관리들 사이에선 권력을 상징하는 척도가 되었는데 이것을 자랑하기 위해 은근히 자신들의 집으로 궁전 관리들을 초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왕으로써도 골칫거리가 된 물건들 중 하나였다.
은은한 나무 향과 향색조의 조화가 머리를 맑게 해주는 이 다갈색 책상에서 키요미네는 왕의 인장이 찍혀 붉은 촛농으로 봉해져 있었을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당혹하기 그지없는 이 편지는 그에게 커다란 수치심을 안겨주었으며 아들같이 여기던 왕에게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편지의 끝자락에 매끄럽게 쓰여진 사인이 왕의 친필이 맞는 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 키요미네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말을 준비해라. 지금 당장 궁으로 가겠다."
일그러진 키요미네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전달한 왕의 편지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감지한 집사는 곤란함에 급히 대답하며 마부를 부르기 위해 서재를 뛰쳐나갔다.
'왕이시여, 당신은 어찌 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마가리타에게 맹세했던 사랑이 거짓이었습니까? 정녕 그러셨다면..'
키요미네는 세로로 늘어선 네 개의 책상 서랍 중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는 가장 위쪽의 서랍을 열어 젖혔다. 키요미네는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파란 공단으로 싸여있는 기다란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끝내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5년 전 데카메론이 엄청난 전투력과 예상치 못할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주변 소국가들의 잦은 분쟁을 모두 정리했을 당시 적들조차도 감탄해 마지않았던 전략은 바로 이 키요미네의 작품이었다. 단 이틀만에 주변 국가들의 주권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왕에게서 직접 하사 받은 상이 이 그라디우스(Gladius)검과 보관함이었다.
우아한 파란 빛이 도는 보관함을 열자 안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정성 들여 세공한듯한 사파이어들이 빛을 발하였다. 하지만 그 빛이 아무리 아름답고 차다 하여도 이 그라디우스의 검날에 비하면 실로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사파이어에는 생명이 없다해도 이 검날은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생명력과 살기로 충만해 보였다. 이 검 앞에서는 사람의 고귀한 생명도 밟으면 금새 짓부숴지는 개미처럼 느껴질 만큼.. 오만한 빛의 생명체. 키요미네는 그 검을 집어들고는 머리에 감고 있던 흰 터번을 끌어내려 조심스레 감아 자신의 가슴팍에 숨기고는 문밖에 준비되어 있는 말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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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언제 쓰러지셨나?"
"바로 몇 분전이었습니다."
왕이 누워있는 침대 우편에 서 있는 마르고는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왕에게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미그스엘은 그런 마르고를 바라보며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미그스엘 역시 신음에 가까운 탄식을 하며 뜨거운 왕의 손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마르고, 난 사실 내가 늙어서 망령이 난 거였으면 좋겠네.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이 병명이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고 있지 않던가.."
미그스엘의 말에 흠칫 놀란 마르고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왕의 손을 더욱 꼭 붙잡으며 물었다.
"시.. 심각한 겁니까?"
"이보시게.. 그 전에 뭐 하나만 묻세. 혹여 왕과 접촉한 후 누구를 만진 적이 있는가?"
"예?"
"중요한 것이니 꼭 대답해 주길 바라네.."
미그스엘의 말에 카르야의 얼굴이 마르고의 뇌리에서 스쳐지나갔다. 자신에게 맞아 불겋게 부어 오른 왼뺨을 매만지며 되려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간 골칫덩이 아들, 카르야.. 그리고 그가 생각남과 동시에 왜 미그스엘이 이런 질문을 하는지 어느 정도 그 심중을 알아챈 마르고의 얼굴표정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경례령을 발포해야 합니까?"
"지금 당장 이곳 역시 폐쇄해야 할걸세."
마르고의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 그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이 병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안 미그스엘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가 곧바로 비밀통로가 이어져 있는 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르도, 들리나? 지금부터 이 곳을 죽음의 방으로 지정하네. 하나세에게 알려 이 방에 아무도 들지 못하게 해야해. 그리고 경계령을 내려서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네. 알았나?"
비밀통로 밖에서 미그스엘이 부르기만을 기다리던 가르도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죽음의 방이라니요? 미그스엘님.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안 돼. 알만한 사람이 대체 왜 그러나? 지금 당장 왕의 방문 앞에 서있는 하나세를 찾아가. 어서. 시간이 없어."
"싫습니다. 설령 전염병이라도 전 가지 않겠습니다. 제가 어찌 미그스엘님을 버려두고 간단 말입니까. 어서 통로를 여세요.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도 제가 가지고 있는 약초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시잖아요. 어서 문을 열어주세요."
가르도가 밀어부치는 바람에 들썩이는 비밀통로를 부여잡으며 미그스엘은 가르도의 깊은 충성에 감사했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 때문에 감동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르도 잘 듣게. 자네는 자네 자신을 시종이라고 낮추었지만 난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어. 자네는 내 아들이야. 그것도 아주 훌륭한 아들일세. 내가 만약 자네의 청을 들어 이 문을 연다면 그건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짓인 게야. 자네에게 다음 왕을 맡기겠네. 그리고 그 비밀통로도 어떻게 좀 해봐. 자네는 내가 그것을 없애겠다는 뜻을 잘 알고 있겠지? 허허.. 힘든 일이 될 게야. 그것이 없어져도 사람들은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지도 몰라. 하지만 자네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걸세 알았지? 이 병은 자네의 약초로도 고칠 수 없는 걸세. 자 어서 하나세를 찾아 경계령을 발포해. 안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야."
"병명이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말씀이십니까? 미그스엘님!!"
"아아.. 이것이 제발 페스트가 아니길 난 바라고 있네. 자 어서 서두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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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안나오는 거야? 나원 휴가를 나와서 까지 도르카야에게 얽매여야 하다니.."
"이봐 말조심해. 비록 나이는 같다 해도 그는 우리의 상사야.."
칼센은 궁의 화단 앞에 길게 늘어선 십여 개의 분수대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손수건을 적시며 말했다.
"미안. 칼센, 나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 하지만 솔직히 그의 인간성은 직급을 떠나서 절대 존경할 만하지 못해. 아니 오히려 인간이하라고 할 수 있지. 봐. 휴가를 받자마자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윤락가에 갈 돈을 요구하러 오다니.. 분명 그의 아버지는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황금더미를 안겨줄 꺼야. 안 그래?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니까. 난 대체 너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대체 왜 그의 뒤를 봐주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쉿. 도르카야님이 오신다. 그리고 그는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칼센은 마타니에게 조그맣게 속삭이고는 마타니를 뒤로 물렸다. 도르카야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원했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도르카야님."
안타까운 듯 도르카야에게 손수건을 내민 칼센 앞에 도르카야는 우뚝 멈추어 섰다.
"흥. 마치 내가 맞을 걸 예상이나 한 듯 준비해 두었군."
도르카야는 칼센이 건넨 손수건을 땅에 집어던진 후 구둣발로 천천히 그것을 짓 이겼다. 칼센을 도발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칼센은 하나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눈으로 도르카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 재수 없어. 마치 모든 걸 알고있다는 듯한 그 눈 말이야.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도르카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군에 입대하고 얼마 안돼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고, 가장 우수하다는 기마병의 백부장이 되었다. 일부 시기하는 자들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계급이 올랐네 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지만 그는 떳떳하게도 자신의 실력만을 가지고 백부장이 된 것이니 그 소문들에 별로 자극될 것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소문을 퍼트렸던 자들은 자신에게 찾아와 갖은 아양을 떨었다. 그것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들이 결국 자신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이번에야말로 그 철저하다 못해 냉정한 아버지가 자신을 돌아봐 주리라 생각했던 도르카야는 휴가를 받으면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깨엔 기병대의 백부장이라는 표식인 동색계급장을 달았고, 왕의 군대의 일원인 것을 표시하는 정식 토파즈(금속을 얇게 펴서 만든 특수 갑옷)도 차려입었다. 그는 당당하게 아버지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보호자격인 칼센과 그의 동료 마타니가 따라붙은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아버지께 유흥비나 얻으러 간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에 여러 복잡한 절차를 밟고 궁에 들어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왕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도르카야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 것이다. 여전히 아버지의 눈에 자신은 쓸모 없는 존재였다. 울컥 화가 난 도르카야는 아버지의 뒤통수를 향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러는데 화끈하게 놀게 돈이나 주시죠, 고랏(고급창녀촌)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거든요."라고 외쳤다. 도르카야를 향해 돌아선 키요미네의 눈에는 살기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날아든 그의 주먹!! 경멸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피붙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은 전혀 담겨있지 않은 듯했다. 비릿한 것이 입안에 고이자 도르카야는 그것을 뱉어내며 키요미네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칼센.. 만약 내가 칼센이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까지 차갑게 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그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르카야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내 차가워지며 대답했다.
"칼센이었다면 나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고랏 얘기는 하지 않았을 거다. 방금 그 얘긴 듣지 않은 것으로 하지."
마르고가 자신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것을 보며 도르카야는 분한 듯, 슬픈 듯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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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미네의 말이 궁정입구에 다다르자 칼과 창으로 무장한 문지기 셋이 그의 말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비켜라"
"죄송합니다만 지금 궁은 폐쇄되었습니다."
문지기들을 내려다보며 키요미네가 말에서 내리자 궁 뒤쪽의 파수대로부터 뿔나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번.. 일곱 번?
저건 경계령이 아니던가..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키요미네님이라 할 지라도 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붉은 말고삐를 잡고 뿔나팔 소리에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키요미네 앞으로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나가며 문지기들에게 소리쳤다.
"이보시게들.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네? 우리들도 말입니까?"
문지기들이 놀라 달려나가는 그에게 묻자, 그는 "그래. 당신들도 말야. 이 궁에는 아무도 남아서는 안돼"
하며 파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의아해 하며 창과 칼을 자리에 남겨두고 떠날 준비를 하는 문지기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뛰어가는 젊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키요미네는 다시 말에 올라타 젊은 남자를 쫒았다.
"이보게, 대체 어떻게 된건가?"
"죄송합니다만 키요미네님,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왕께서 베푸신 배려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뭐라고? 대체 자넨 누군가?"
분명 내가 온 목적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본 적이 없던 남자다. 왕께서 근처에 두시던 심복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키요미네가 의아해 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리던 것을 멈추고 키요미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가르도, 미그스엘님의 시종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아아. 이런 말을 할 틈이 없습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곧 군인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놀라워 하는 키요미네를 뒤로 남겨둔 채 가르도는 다시금 파수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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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군에 입대한 후 처음 맡는 휴가인지라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뿔나팔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 한번 뿔나팔이 울릴때마다 설마 여섯 번 이상은 울리지 않겠지 하며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뿔나팔은 일곱 번째 신호까지 발하고 있었다. 모든 군인들은 궁으로 집결되어야 했고, 백성들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면 않되었다. 여섯달에 한번씩 시행되는 국가적 훈련은 고작해야 뿔나팔이 네 번 울리는데 일곱 번이나 울리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시장에서 왁자지껄 장사하던 장사치도 물건을 사던 사람들도 모두 곧장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구었고, 거리에서 뛰노는 어린 아이들을 찾아 나온 부모들이 서로 자기 자식의 이름을 부르느라 거리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과연 이 곳이 사람 사는 곳인가 할 만큼 정적이 흐르기까지 고작 시간은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로써 도카메론트의 백성들이 얼마만큼 철저히 훈련되었는지 하는 가를 잘 지적한 오늘의 사건은 훗날 역사가 마르카제에 의해 세 번째로 빨리 움직인 백성들이라는 기록까지 남겨지는 일이었다.
아무튼 거리에서는 이제 군인들의 붉은 망토만이 보일 뿐이었다. 전쟁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적으로 존속위기에 처해질 만큼 다급할 때만 울리는 일곱 번의 뿔나팔 소리가 군인들을 다소 긴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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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너른 앞마당에 모인 군사는 좌우로 두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좌는 기마병과 궁수들이 서있고, 우는 창과 칼을 지닌 자들이 열을 맞추었다. 좌를 다시 전 후로 나누어 보면 전자가 궁수들이요 후자가 기마병이었다. 우의 전자가 칼을 지닌 자들이고 후자가 창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또 한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금빛 전차를 탄 전차병들이었다. 그 수가 무려 이만 팔천이었다.
이 많은 무리를 수용하는 마당의 크기도 대단했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말이며 무기를 통제하는 병사들의 기술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도카메론의 정예부대 마란토였다.
"모두 들으라.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신속하고도 조용히 적을 타진하기 위해서다. 이 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왔던 그 어떤 적보다 무섭고 빠르며 경멸스럽기 그지없다. 이들은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고, 서서히 목을 조여온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만들며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적은 아직 멀리까지 그 손을 펼치지 못하였다. 오늘 기필코 적을 섬멸하리라. 그 적의 이름은 바로 페스트이다."
싸한 긴장감마저 돌던 이 곳의 공기가 순식간에 불안감으로 변하고 있었다. 페스트.. 아직 도카메론에서는 발병한 적이 없는 질병이었다. 그 병은 그저 국외에서 조심해야 할 병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 외국인 거주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고 들어왔다.
으깨는 자! 부수는 자!! 피를 삼키는 자!!
"지금부터 병의 증세와 주의사항을 알려주겠다.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병은 직접적인 피부접촉에 의해서만 감염이 된다. 감염자와 옷이 스치거나 한 것 따위로는 걸리지 않는다. 알겠나? 우선 이병에 걸리면 머리가 아프거나 기침이 나거나 열이 날 뿐이다. 자!! 현재 그런 증상이 있는 자가 있는가?"
"여깁니다."
기마병부대 중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자 갑자기 그 사람의 주위에 작은 공간이 생겼다. 모두 그를 두려워해서 뒤로 물러선 것이다. 그는 바로 칼센이었다.
"지위와 이름을 대고 앞으로 나오라.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자도 나오길 바란다."
"저의 이름은 칼센. 기마병부대 오십부장입니다. 저와 함께 있던 자는 저의 부하중 한명인 마타니, 저의 직속 상관이신 도르카야님이십니다."
도르카야의 이름이 언급되자 앞에서 지위하던 총사령관도 기마병들도 모두 놀라는 듯 했다. 그는 이나라 궁정관리인 마르고의 외아들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이런 일이.. "
자진해 나선 칼센을 선두로 도르카야와 마타니가 쭈뼛쭈뼛하며 앞으로 나오자 총사령관은 안타까운 듯 도르카야에게 시선을 옮기다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칼센에게 호통을 쳤다.
"네 덕분에 유능한 장군감을 잃게 생겼구나. 가자기에서 왔다 할 때부터 내 그렇게 너를 맡지 말라고 마르고님께 당부드렸건만.. 기어이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어."
가자기. 바알신을 섬긴다고 알려진 곳. 그 국가의 이름이 언급되자 또 한번 무리들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곳은 부도덕과 폭력으로도 유명한 곳이 아니었던가. 칼센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지만 수근거림과 질타의 눈빛들은 이미 그에게 모두 쏠리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마타니로써는 무척 가슴이 아픈 일이었는데 그의 과거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
누군가의 외침에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외침을 발한 것은 뜻밖에도 도르카야였다. 그는 칼센을 무섭게 노려보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흥! 이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어차피 네가 이 병에 걸렸다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더냐."
도르카야의 말에 모두 놀랐으나 더욱 놀란 것은 칼센이었다. 도르카야는 자신이 이와 같이 행동한 것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아!!
"죄송합니다."
칼센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순순한 동기에 의해 도르카야를 지켜주려했던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 남자는 결코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버지의 사랑을 모두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의 보호라면 더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됐어. 어차피 너는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에게도 이 나라에게도.. 훗. 잘 들어. 난 너의 그 마음씀씀이를 증오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이 딱 두명이지. 그건 바로 아버지와 너야."
어느새 칼샌의 멱살의 쥐고 있는 그의 눈엔 미움과 증오만이 가득했다. 도르카야는 여전히 칼센의 멱살을 쥔 상태로 총 사령관에게 말했다.
"죽음의 방으로 보내주십시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더욱 두려운 것은 제가 뱉은 공기를 내 적들이 마시고 그들이 뱉은 공기를 다시 제가 들이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포와 굴욕감을 전 지금까지 십여년 이상 지니고 살아왔으니 저는 죽음따윈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의 방에 가는 것은 저와 이 가자기의 더러운 종자뿐입니다.
이 자는 지금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으나 누군가를 보호해야한다는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죽음을 맡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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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버스(국가)
-이실론테 공주의 출발 하루 전
"페스트로 죽은 자들이 대체 몇명인줄 아십니까? 1800명입니다. 1800명!! 그것도 등록되어 있는 자들만 그렇단 말입니다. 오년 전 인구조사를 위한 출생 신고로 우리 나라의 인구는 총 일만 이천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망 명단이 올라 온것을 보니 이 1800명은 오년전에 등록된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구조사후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이 사망명단에서 빠지게 되었고, 그 불쌍한 아이들까지 치자면 아마 족히 이천은 넘을 것입니다. 라버스 인구 8분의 1가량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스트란 놈이 너무 위력적이어서 그나마 더이상 퍼지기 전에 모두 죽어버렸지만 아무튼 우리는 국가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
"아아.. 대체 하고 싶은 말의 요지가 뭐요? 국가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건 여기 대신들도 모두 알고 있어. 게다가 오늘 아침 자네 조수란 자가 100여장이나 되는 상황보고서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 덕에 2000명 이상이 죽어나간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단 말이오. "
"저.. 100여장이 아니고 총 128장..."
라버스의 고위대신들과 왕이 있는 자리에서 리탁쿠는 눈치없게도 오늘 아침 자신이 그들에게 나누어준 보고서의 장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총 128장이나 되는 것을 육일밤낮을 지세며 열 세권이나 만든 자신의 수고가 너무 가치없이 여겨지는 것이 그로써는 불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못했다. 열세권중 이미 네권은 대신이 죽어버린 까닭에 필요없게 된 시기였고, 그 네명중 왕이 가장 사랑한 왕의 사촌도 있던 탓에 왕의 심기 역시 좋지 못한 때였다. 그는 자신이 선생이라 부르는 요르가의 싸늘한 눈빛
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요르가는 다시 왕에게 눈을 돌려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런때 우리의 비옥한 토지를 노리고 있는 주변국의 군사적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나라가 온통 울음바다가 된 마당에 일어날지 안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의 대비로 백성들을 더욱 괴롭히자는 말이요? 이거원..이런자가 민생안정장이라니.."
사촌을 잃어 슬퍼하는 왕의 눈치만 슬슬보던 대신들 중 하나가 이와같이 요르가의 의견에 반박을 하자 다른 대신들 역시 옳소 옳소 하며 요르가를 핍박하고 나섰다.
요르가로써는 이들이 정말 전쟁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가 하며 한탄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버스는 주변국에 비해 농사짓기에 적당한 땅과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라버스 바로 위쪽의 토아국은 너무 추웠고 아래쪽의 유리타국은 물이 없었으며 양 옆의 메엔국과 므로실바국은 습지가 많았다. 덕분에 라버스 국은 항상 주변국으로 부터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 겨울이 다가오면서 부쩍 토아국의 침입이 늘어 북쪽 방위태세를 강경하게 하고 있는 터였다. 만약 토아국이 라버스를 삼키려면 병으로 쇠약해진 이 시기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요르가는 자신의 의견을 무턱대고 반대하고 나서는 대신들때문에 화가 나기보다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렇게
왕의 눈치만 보는 자들이 대신들이라니..
"됐어. 요르가만 남고 모두 물러가"
한쪽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피곤한 듯 탁자에 기대어 있던 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핏대를 세우며 요르가를 핍박하던 대신들은 깜짝 놀라 왕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자와 대화를 나누실 생각이십니까? 이자가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이 자의 마음속에는 지 아비와 같이 전쟁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쇠약해진 우리 나라가.."
"됐어. 됐어. 됐다는 말 안들리나? 내가 사람 마음 하나 읽지 못하는 바보천치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나의 명령에 복종치 못하겠다는 건가?"
"네? 아..아닙니다. 저희가 그럴리가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허험..."
왕의 호통에 대신들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며 재빠르게 회의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요르가의 조수인 리탁쿠도 조용히 회의실을 물러갔다.
회의실은 방금 왕이 소리를 지르며 탁자를 뒤엎은 덕에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요르가는 조용히 탁자를 제자리로 정리하고 이리저리 흩어져 버린 리탁구의 보고서 열 네권도 한 권씩 집어들어 한곳에 모아두었다.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던 왕은 그제야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기 시작했다.
"아아.. 대체 왜 내 주위에는 인물들이 없는 것인가? 모두 서로를 비방하거나 내 눈치를 살피는 자들뿐이니."
"왕이시여. 이만 저도 물러가겠습니다."
"..어째서지?"
"저 역시 왕께서 말씀하신 비방하는 자이옵니다. 저는 저들의 생각을 싫어하고 오만함을 증오하며 안이한 생각들을 비웃습니다. 매일 저녁 식탁에 앉아 친구들에게 저들을 욕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곁에 두시는 왕의 자비하심을 칭송합니다."
"허! 나를 칭송한다? 역시 자네도 여우임에 틀림없어. 어쩌면 저들이 말한 것처럼 피의 역사만을 추구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지금 내곁에 필요한건 늙어 앉아있는 여우가 아니라 활동적이고 사나운 여우야. 그러니 여기 앉아서 내 말을 들어."
탁자를 뒤로 물리고 왕의 앞에 의자를 끌어들여 앉은 요르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젊어서 미끈하고 건강한 피부에 늙은이의 영악한 지혜의 눈빛보다는 활활 타는 불처럼 젊음과 욕망에 이글거리는 그의 갈색 눈은 마치 갈기있는 숫사자를 연상시켰다. 이제 겨우 27세의 젊은 나이. 요르가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 젊은 왕이 어떤 통치관을 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요르가, 자네의 사견을 듣고 싶네."
"말씀하십시요."
"자네는 이실론테가 불쌍한가?"
뜻밖의 왕의 질문에 요르가는 조금 당황하였으나 이내 왕의 속내를 간파하고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왕이시여, 이실론테 공주님이 방금 전의 왕의 말씀을 들으셨더면 분명 화를 내시며 달려드셨을 겁니다"
"하하하. 내 동생 이실론테라면 그러고도 남지. 하하하하..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인게야. 그렇게 자유분방한 아이가 규율이 엄격한 한 나라의 왕비가 된다는것은 분명 고통이 따르겠지. 요르가! 그 소문이 사실인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요르가 앞을 서성이던 왕을 보며 요르가는 여전히 미소지은 채 물었다.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도카메론.. 도카메론 말이다. 그 나라에서는 왕이 죽으면 그 부인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더군. 어떤가?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도카메론은 여자에게도 모든 권한을 줍니다. 하지만 걱정마십시요. 왕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현 도카메론의 왕은 젊고 혈기가 넘치며 건강해 보였습니다. 설마 이실론테공주님께 왕권이 돌아오시겠습니까?"
"흠. 역시 그렇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겠지? 이실론테는 너무 욕심이 많아. 그 아이가 만약.. 왕권을 지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어리석게도 영토확장을 꿈꾸게 될꺼야. 그리고는 전쟁터에 나서 타 국가의 용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겠지. 난 그렇게 될까 두렵네."
"왕이시여 괜한 걱정이십니다. 이실론테 공주님께는 안된 말이지만 공주님께서는 저희 나라와 도카메론의 동맹체결을 위해 그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 도카메론의 이오리스왕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공주님께서 가시더라도 정실은 되지 못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왕권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라는 겁니다."
도카메론의 왕이 동맹체결을 위해 라버스로 왔을 때 라버스의 공주인 이실론테의 나이는 17세였다. 결혼하기 적당한 나이였으나 그녀의 성품상 라버스의 모든 남자들은 그녀를 맞아들이기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녀는 격투를 좋아하고, 매일 장난질을 일삼았으며 자존심도 매우 세어서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성안에서 그녀의 노기 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던 것이다. 그녀가 이렇듯 행동을 하니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한 잘잘못을 언급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 하에서도 자연스레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이 라버스의 능력 있는 청년들의 귀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주 역시 자신의 성품이 괴팍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성격을 어찌하란 말이냐. 아무래도 자신은 호전적이고 사나운 기질을 타고난 듯했다. 남에게 잘 보이려 자신을 가식적으로 꾸미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차라리 그 시간에 칼자루를 쥐고 성안의 뜰을 뛰어 다니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여자의 꿈인 멋진 결혼식과 낭만적인 결혼생활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여자보다 그런 상황이 오길 더욱 열망하고 있었다. 분명 결혼을 하게 되면 이런 자신의 성격도 바뀌게 될 것이었고, 자신이 더욱 조신한 여자가 될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골로 시집을 가게 될 줄은 몰랐어...'
이실론테는 산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애써 산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려했지만 역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 일 전, 몇몇 신하들을 시켜 도카메론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해 알아도 보았으나 그에 대해 정확한 보고를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도카메론의 왕의 나이도 제각각으로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신하는 그 나라에는 용들이 산다고 까지 말하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보고들을 제외하고 몇몇 신뢰할 만한 보고들은 겨우 서너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 도카메론이란 나라가 산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 그곳의 군대는 매우 강인하여 라버스를 포함한 모든 나라에서 두려워한다는 것, 이 나라에 온 이유도 라버스의 간곡한 부탁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라버스는 그들이 동맹을 맺어주는 조건으로 라버스의 특산물인 쌀을 대량으로 공급해 주기로 되어있었다.
결국 자신의 남편이 될 도카메론의 왕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알 수 없는 실정에서 그녀의 불안감과 호기심은 포화상태였다. 이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이 심어놓은 스파이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국가적인 일에 관여하면 안 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도카메론의 왕이 동맹체결을 위해 이 곳에 왔더라도 여자인 자신으로써는 그 왕이 자신을 먼저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하여 자신의 몸종 중 가장 재빠른 자를 왕의 주변에 보낸 것이다.
-딸깍
슬며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실론테는 귀를 쫑긋 세우며 후다닥 문 쪽으로 뛰어갔다.
"란이냐?"
-삐그극
나무와 나무가 닿아 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조금 열리면서 열린 문틈의 사이로 몸종인 란의 얼굴이 보였다. 드디어 남편이 될 사람을 조사하고 몸종이 돌아 온 것이다. 헌데 란의 표정이 평소와 같지 않게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실론테는 란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신고 있던 부츠 속에서 작은 칼을 꺼내들었다.
"란, 뒤에 누가 있는거냐?"
조용히 속삭이는 이실론테에게 란은 대답대신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그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실론테의 발걸음이 재빠르고도 조용해졌다. 이실론테는 문고리가 있던 방향의 벽으로 잽싸게 자신의 몸을 숨기고는 조용히 침입자의 동태를 살폈다. 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란의 뒤에 서 있는 듯한 침입자는 그것을 제지하고 있었다.
이실론테는 손가락을 입에 갔다대며 란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왼손을 슬며시 란에게 내밀어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오른 손에 들고있던 칼은 언제든지 침입자를 위협할 수 있도록 -혹은 찌를 수 있도록 칼날이 엄지손가락 쪽이 아닌 새끼손가락 방향으로 향하도록 고쳐 잡았다. 이상하리 만치 침입자도 그리고 방의 주인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흡사 시간이라도 멈춘 듯 모든 것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긴장스런 몇 초가 지나고 이실론테는 결심을 한 듯 란의 손을 더욱 꼭 쥐고는 등을 벽에 딱 붙인 채 발을 벌렸다. 그리고 크게 숨을 쉬고는 급작스럽게 란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힘이 어찌나 세었던지 란은 헉하는 소리와 함께 이실론테를 벗어나 반대편 벽 쪽까지 굴러가 쳐 박혀 버렸다. 란은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실론테는 침입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여 문 밖의 침입자를 향해 칼을 뻗쳤던 것이다. 이윽고 쉭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침입자에게 꽂히는 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는 분명히 상처를 입었을 것이었고 아니, 적어도 치명상을 입었음에 분명했다. 이실론테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문밖에서 쿡하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속에서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무리 힘을 주어 거두어들이려 해도 꽂힌 곳에서 되돌아오지 않는 칼날은 이실론테가 아직 보지 못한 적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누.. 누구냐?"
"허허허. 공주님, 아직도 멀었습니다."
친숙한 목소리가 벽에 붙어 나지막하게 떨고있던 이실론테의 귀에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잘생긴 눈썹을 위 아래로 이그러뜨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며 그 침입자라 여기었던 자가 정수리 쪽에서, 칼이 꽂힌 두터운 책을 아래로 내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쳇!!"
"하하하.. 죄송합니다. 공주님."
자신을 향해 겸연쩍게 웃는 요르가을 보며 이실론테 공주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행동이 부질없던 짓이었음을 깨닫고는 획하니 벽에 부딪혀 널부러져 있는 란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실론테 공주가 란의 뺨을 강하게 두어대 내리치자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흠칫 놀라며 토끼 눈을 뜬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란, 괜찮은거냐?"
느릿느릿 말을 하며 이리저리 란의 상태를 살피는 이실론테에게 란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어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공주님. 괜찮아요. 그보다 죄송해요. 들켜버렸어요."
금새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실론테는 그런 그녀의 상태의 안심을 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란은 오히려 자신이 기절한 것에 대해 창피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박혀있던 벽을 슬쩍 쳐다보고는 무언가를 다짐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부릅뜨더니 그 벽을 째려보았다. 결심을 다 다졌는지 어느새 인가 방실방실 웃고 있는 란을 보며 이실론테는 혀를 쯧쯧 차더니 란과 요르가를 정식으로 방으로 들였다.
"요르가, 여전히 눈치가 빠르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이래봬도 란은 나의 시종들 중 가장 스파이 짓을 잘 한다고."
"에고, 공주님. 스파인 짓이라니요. 누군가가 그 말을 듣는다면 제 목은 단숨에 날아갑니다."
란이 당황해하자 이실론테 공주는 낄낄거리며 웃더니 요르가에게 눈을 돌리고는 대뜸 물었다.
"대체 왜 온 거야?"
"왜라니요. 정말 섭섭합니다. 공주님을 뵙고 싶었기로 늙은 몸을 이끌고 왔는데. "
요르가가 조금은 능글거리며 대답하자 순간 이실론테의 눈꼬리가 확하고 치켜 올라갔다. 화가 나고 있다는 징조였다. 요르가는 이크 싶어 냉큼 자신이 온 목적을 밝혔다.
"공주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흥. 그런 것이라면 란이 잘 알아왔을 거다. 어서 가봐."
이실론테 공주의 눈꼬리가 금새 슉하고 내려가며 손을 휘휘 내두르자 요르가는 은근슬쩍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 란은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걸요"
요르가의 말에 이실론테는 동그란 눈을 더욱 치켜뜨며 란을 바라보았다. 란이 눈 마주치길 피하며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보니 요르가의 말이 정말인 듯 했다.
"유능한 네가 아무 것도 못 알아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도카메론의 왕이 더 유능하기 때문이겠지요."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요르가가 응답하자 이실론테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쪽 손으로는 란에게 어서 나가보라는 듯 무언의 지시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란이 물러가자 방에는 이실론테 공주와 요르가만 남게 되었다.
"요르가. 너는 도카메론의 왕을 보았겠지?"
"그분을 본 사람은 오직 왕과 마고님 뿐이었습니다."
"엥?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며? 난 내 신랑감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 당장 알고 싶단 말야. 내 신랑감은 아직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지?"
"도카메론 왕의 이름은 이오리스입니다. 부군 되실 분의 이름쯤은 알고 계셔야지요. 그리고 그 분은 방금 전 자신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뭐? 아무리 동맹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부인이 될 사람도 만나보지 않고 가?"
"왕께서 그리 하시도록 권하셨습니다. 공주님을 만나보고 그분이 기겁을 하셔서 동맹체결을 아예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할까봐 우려하신 모양입니다."
요르가의 장난기 어린 말에 이실론테는 발끈해서 순간적으로 자신의 오른발로 요르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요르가가 자신을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오라비가 정말 그 따위 생각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오라비를 찾아가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야?"
신하된 도리로써 자신의 주군과 그 가족 앞에서는 비명을 지르면 안 된다는 궁 법에 따라 요르가는 눈에서 눈물만 찔끔찔끔 흘리며 "왕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시진 않았습니다." 라고 실토했다.
"이 너구리 같으니라고, 아무리 내 후견인이라도 다시 한번 그따위 말을 하면 오라버니께 일러 바칠거야. 알겠어?"
"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 요르가는, 역시 이오리스 왕과 이실론테 공주의 대면이 없었던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자신의 불쌍한 왼쪽 정강이를 문질렀다.
"아무튼 동맹체결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주변국들도 우리를 쉬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주님은 앞으로 일주일 후 떠나시게 되었구요."
"좋아. 일주일이면 실컷 놀 수 있겠군. 오라버니께 가서 직접 듣겠다. 안내해!"
이실론테의 명령에 요르가는 '에휴' 한숨을 내쉬며 앞서 왕의 방으로 향했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요르가와 이실론테가 복도로 나서자 그들과 마주친 모든 신하들이 뒤로 물러서며 정중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왕의 방에 들어갈 때 궁 법에 따라 철에 금을 두둘겨 입힌 둥그런 원반 모양의 종을 친다. 이실론테를 동반한 요르가는 자신의 지팡이로 종의 가운데를 힘껏 때렸다.
-징
[들어오라] 는 왕의 음성이 들린 후에야 요르가와 이실론테는 왕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실론테의 마음은 왕의 음성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빨리 알고 싶은 마음에 궁 법같은 귀찮은 것은 머리 속에서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이실론테는 다짜고짜 요르가를 밀쳐내고 아치형으로 된 거대한 크기의 문중 오른 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라버니, 이실론테이옵니다."
문에서 약 십미터 떨어져 있는 황금색 왕좌에 앉아 있던 왕의 눈에 느닷없이 열리는 문이 비쳐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심히 반가운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과 함께 그녀의 뒤쪽으로 안절부절못하며 문 밖에 서있는 요르가의 모습도 들어왔다. 궁 법을 항상 잊는 이실론테였다. 만약 자신의 사랑스런 동생이 홀로 찾아든 것이라면 약간의 꾸중을 동해서 반갑게 맞아들였겠지만 열린 문 뒤로 요르가가 서 있었기 때문에 적잖이 벌을 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궁 법이란 것은 언제나 지켜져야 했고,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에게 처벌을 내려야만 위계질서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왕은 제발 이실론테가 자신의 꾸중에 노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 아직 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문을 벌컥벌컥 여는 게야. 난 네 오라비 이전에 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왕의 뜻밖의 태도에 이실론테는 순간적으로 웃고 있던 표정을 싹하고 거두었다. 이내 다시 엷은 미소를 띄었으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실론테는 왕이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명령에 곧바로 복종하지 않고 우뚝 서서 꼿꼿이 고개를 들었다. 왕의 갈색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자니 왕은 짐짓 더 엄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이실론테를 외면하고 요르가에게 눈을 돌렸다.
"요르가, 그대는 무슨 일인가? 바쁘지 않다면 이실론테 공주님을 문 바깥쪽으로 모셔드리게.."
왕의 명령에 요르가는 불똥이 자신에게 튄 것을 알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이실론테에게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또 얻어맞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실론테의 심기는 뒤에서 보기에도 심히 뒤틀어져 있었다.
'차라리 내가 이 자리에 없었으면 이리 되진 않았을 텐데.. 왕께서 오히려 곤란하시게 되었다. 더군다나 공주님의 자존심에 가만있을 리 만무하다. 두 분의 실체를 내가 다 알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필시 왕께서 역정이 나신 것처럼 보였을께야. 왕의 입장에서 핏줄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고...'
요르가가 슬며시 공주의 옆으로 다가가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인도자의 의미로 손을 내밀자 이실론테는 자신의 지팡이로 요르가의 손을 거세게 거두어 내며 휙하고 뒤돌아 서더니 쌩하니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요르가가 그런 이실론테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자 왕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어서 그녀를 뒤따라가라고 그에게 무언의 손짓을 보냈다.
이실론테는 평소와 같이 환영받을 줄 알았던 왕에게 꾸중까지 들은 데다가 그 자리에 요르가까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좋지 못했다. 자신의 작은 잘못에 비해 왕이 너무 야속한 처사를 내린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성질에 못 이겨 방으로 돌아가 버렸을 테지만 오늘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적어도 자신의 남편 될 사람이 노인인지 눈, 코, 입은 제대로 달렸는지 이빨은 제대로 닦는 사람인지에 관해 알아야했던 것이다. 이실론테의 눈에 고개를 푹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요르가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분풀이 조로 그의 오른쪽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비명을 참고 또 참아야만 하는 요르가의 눈에서 아픔의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징-
이실론테가 요르가를 뒤로 물리고 지팡이로 종을 울릴 때까지 왕은 그런 이실론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과 10살이나 차이가 지는 나이의 동생은 이제 숙녀 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검정 색에 더 가까운 갈색 눈동자는 커서 시원스러 보였으며 코는 곧게 뻗었고 사과처럼 발그스레한 뺨은 그녀의 사나워 보이는 듯한 인상에 조금이나마 귀염성을 더해주었다. 게다가 그녀의 허리까지 구불거리며 탄력있게 내려온 갈색 머리 역시 그녀의 자랑거리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치마는 불편하다고 토파즈(허벅지 부분이 넓고 종아리부분과 발목 부분은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긴 했지만 그러하다고 그것이 그리 흉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성질은 과연 고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릴 때도 곧잘 신하들을 골탕먹이고 예절을 가르치는 요르가의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크면 괜찮아 지리라 여겼던 그녀의 성격은 점점 더 되바라져갔다. 요르가가 그녀에게 붙인 '망아지'라는 별칭이 딱 맞아떨어지게 자란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왕의 눈에 이실론테는 귀여운 어린 동생이었고, 불쌍한 젖먹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에서 오래 자라지 못했고, 사랑도 많이 받지 못했다. 타고난 성품에 자신까지 옹야옹야 했으니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들어와라."
이실론테는 오라비의 인자한 음성에 조금은 기분이 풀어졌지만 그래도 역시 너무 하셨어 라고 생각하며 왕의 앞에 나아갔다.
"그래 무엇 때문에 점심을 넘기기 전에 나를 찾아왔느냐?"
자신의 신랑감 때문에 왔다고 말하려던 이실론테는 여자의 작은 일로 나라의 중대사를 논하는 곳까지 왔다고 핀잔을 들을까 하여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말이 빙빙 돌고 있었다.
"왕이시여. 도카메론은 어떤 나라이옵니까? 듣기론 산이 많다 들었습니다만"
이미 이실론테의 속마음을 알고 있던 왕은 그녀의 뜻밖의 질문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필시 이실론테는 자신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아무리 못 말리는 왈가닥이라 해도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은 이실론테의 궁금증을 모두 풀어주리라 마음먹었다. 방금 전 자신의 처사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있을 테지만 모두 듣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리라.
"그렇지 산이 많은 나라이긴 하지. 자. 너에게 할 말이 많구나. 이리 와서 앉아라."
왕은 자신의 옆에 비어있는 또 하나의 왕좌에 이실론테가 앉기를 청했고, 이실론테는 기꺼이 그곳으로 올랐다.
"요르가. 그대는 무슨 일로 온 것이요. 공주와 같이 온 것을 보니 그대 역시 동맹국의 왕이 어떠한가 궁금했던 모양이군."
요르가는 왕좌에 앉아있는 왕과 이실론테에게 몸을 굽히며 "저는 도카메론보다는 라버스의 국민들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실상 도카메론의 왕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동맹체결의 과정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눈치 좋은 요르가는 그들의 시간을 자신의 궁금증보다 앞자리에 둠으로써 그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런가? 좋소. 그렇다면 내 그대에게 말할 것도 있고 하니 잠시 옆방에서 기다려 주겠소?"
"그러하겠습니다."
요르가는 다시 한번 몸을 굽히고 나서 왕의 방으로 이어진 대기실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겼다.
요르가가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이실론테는 코를 샐쭉거리며
'자기도 궁금하면서 피하기는....' 하고 생각했다. 때리고 욕하고 하긴 했어도 역시 요르가가 옆에 있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편안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가 이제 47세인데 그 머리는 거의 하얗게 새어있었다. 요르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필시 그 아비를 닮아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요르가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왠지 미안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그의 속을 가장 많이 썩인 것은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실론테. 너는 산에 가 본적이 있느냐?"
왕의 음성에 이실론테는 놀라며 요르가가 사라진 정면에서 눈을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네?"
"후훗. 산에 가 본적이 있냐고 물었다."
"아시는 바대로 입니다. 저는 산에 가 본적이 없으며 그것은 라버스의 전역이 평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이제 산에 가보게 되었구나. 네 말대로 도카메론은 깊은 산봉우리에 감추어진 나라이다. 그 험한 산세때문에 그곳에 들어간 자는 쉬 그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들었다."
"우와. 굉장히 높은 거로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곳에 나라를 세웠담? 사람들은 대체 뭘 먹고살지요? 산에 나는 약초? 나무열매? 아아.. 끔찍하군."
"하하하. 그렇지 않다. 그곳 사람들은 산을 개간해서 농사도 곧잘 짓는다 하더구나. 그리고 무역도 굉장히 성행하는 곳이라더군. 산 안에 커다란 동굴을 팠다고 하더군. 아무튼 먹고사는 것은 염려 없을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왕의 웃음에 머쓱해진 이실론테는 머리 속에 땅을 파는 남정네들을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이곳의 노예들처럼 모두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다 너무 끔찍한 생각이라 몸서리를 치며 머리 속에서 냉큼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실론테는 자신의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면서도 그것을 곧바로 왕에게 묻지 않았는데 자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왕의 입에서 튀어 나올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왕은 아예 작정을 했는지 도카메론의 왕이 온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아무튼 나는 깜짝 놀랐다. 도카메론처럼 군사력이 강한 나라는 그것을 과시하려고 왕의 직속부대가 왕의 뒤를 늘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도이튼 항구에서 내린 것은 단 두 명이었던 것이야. 한 명은 당연히 이오리스 왕이었고, 아! 도카메론의 왕의 이름은 이오리스이다."
"요르가에게 들었어요."
"그랬더냐? 아무튼 또 다른 한 명은 몸종인 듯 했다. 정말이지 단 두 명만이 온 것이야. 도카메론의 왕은 타 국가 병사의 100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난 그들의 몸집이 굉장히 거대할 줄 알았는데 실상 그렇지도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금빛 갑옷에 투구까지 쓰고는 좀처럼 자신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을 마중 나갔던 마고는 처음에 금빛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자에게 은빛 갑옷을 입은 자가 존대를 하는 것을 보아 금빛 갑옷을 입은 사람이 왕이려니하고 생각했다는 구나. 나중에 은빛 갑옷을 입을 자가 자신이 왕을 모시고 왔다고 말하기까지 마고는 어리둥절해있었다고 했다. 아무튼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타고 이 곳까지 왔는데, 그 말은 우리 나라의 말보다 두 배 가량 크고, 강해 보였다.
..............
........
왕의 말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실론테는 도카메론인들은 굉장한 위압감을 풍긴다는 것과 단지 두 명만으로도 한 나라의 왕과 대신들을 휘어잡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오리스 왕은 노인도, 얼굴의 어느 한쪽이 일그러진 사람도, 지저분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검은 피부와는 대조적인 깨끗하고도 매끈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실론테는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카메론의 왕의 얼굴은 결국 그들의 요청에 의해 왕과 또 다른 한사람에만 보도록 허락된 듯했다. 그것은 도카메론의 왕에 대한 타 국가의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극악한 소문 ㅡ 많은 나라에서 도카메론의 왕과 그들의 직속부대 마란토는 괴물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들의 귀는 크고 기다라며 눈은 빨갛고, 키는 구척이었다. 커다랗고 강인한 힘을 가진 그들의 손과 발은 칼과 창을 쉽사리 우그러뜨리고 부스러뜨렸다. 또 일부 나라에서 그들의 발엔 날개가 달려있어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적들의 신체를 잘라 음식으로 먹는다고까지 알고 있었다. ㅡ 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그렇게 이실론테가 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갑자기 징-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오늘의 회견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 내일 다시 오라."
"왕이시여, 긴급한 일이옵니다. 재앙이 내렸습니다. 부디 청컨대 들어가게 해 주옵소서."
문 밖에서 들려온 음성은 실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실론테와 왕은 의아해 하며 "들어오라"는 허락을 내렸다.
방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두 명의 대신들이 급히 뛰어 들어와 왕 앞에 엎드러졌다.
"오~ 자비로운 왕이시여. 부디 저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옵소서. 여신 아르테미스께서 북쪽으로부터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벌써 150명 이상이 죽었나이다."
"무슨 소리냐? 그 많은 인원이 하루아침에 죽었단 말이더냐? 요르가! 요르가, 어서 방으로 들라!!"
왕의 외침과 동시에 요르가가 왕 앞으로 달려나왔다.
"방금 이들이 한 말을 들었느냐?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요르가는 혹여 북측 토야국이 쳐들어 왔나하여 근심에 가득 찼다. 하지만 토야국이 단 기간 안에 그 많은 인원을 쓸었을리는 만무했으므로 ㅡ 토야국은 요란한 것을 좋아해서 항상 나팔을 불며 쳐들어 왔다. 때문에 그들의 행군 속도는 그만큼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ㅡ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단 머리 속에서 접어버렸다.
"이봐라. 자세히 보고하라. 그대들은 누구에게 이러한 말을 들은 것이냐?"
"삼일 전 해가 뜨기 전에 토야국의 급작스런 침약이 잦아졌기로 북쪽 경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출중한 병사 50을 보냈는데 그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갑자기 열이 나거나 기침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피를 뿜어내었다 합니다. 그들 중 벌써 30명이 죽었고, 연락병의 보고에 의하면 그런 증세를 가진 자들이 닷새 전부터 있어서 그곳에서만 죽은 자들이 100명이요, 점차 퍼져 50명이 더 죽었다 하더이다. 지금쯤 도이튼 지역까지 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전염병이란 말인가?"
요르가가 당황하며 묻고 있을 때 갑자기 왕이 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요르가와 대신들 그리고 이실론테는 왕의 태도가 이상하여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왕이 자신의 지팡이로 종을 마구 두들이며 파벌병을 불러들였다.
"지금 당장 도이튼으로 가는 길목을 쫓아 마고를 불러들여!! 아직 도이튼까지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도카메론 왕을 배웅하러 가고 있는 게야.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가장 발 빠른 말을 준비해!!"
왕은 거의 미친것처럼 외치고 있었다. 아니 부르짖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사촌이 도이튼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왕의 외침을 들은 요르가와 대신들은 벌써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왕을 쫓아가 그를 붙들며 "왕이시여, 아니됩니다. 그곳은 아니됩니다."하며 매달려야했다.
"비켜라!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죽음에 직면했는데 어찌 내가 가만있을 수 있단 말이냐? 어서 말을 준비해~"
왕의 이러한 결정을 요르가들은 말로써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저 매달리고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때에 왕의 앞으로 도카메론의 왕이 선물로 주고 간 커다랗고 검은 말을 여러 명의 신하들이 끌고 왔다. 왕이 그 말을 보고 자신을 붙들고 늘어져 있는 요르가들을 힘껏 내치려 할 때 순간적으로 기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그 말에 올라타더니 이내 고삐를 움켜잡았다.
"왕이시여. 왕의 신분으로 어디 하찮은 신하를 위해 목숨을 거신단 말입니까? 왕의 신분으로 이 병마와 대적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빨리 결정이나 하십시오. 이럇 !!"
커다란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흙먼지를 빠져나가는 것은 바로 이실론테였다. 왕과 요르가들이 불과 몇 초 동안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 있는 사이에 검은 말은 벌써 성문에 도달하고 있었다.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이실론테는 도이튼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왕은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이실론테. 이실론테!!!"
아무리 외쳐 부른다 한들 왕의 음성은 그녀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왕이라 할지라도 인간에 불과하다.
【 2부 】운명의 갈림길
'아아. 그렇게도 그 남자를 보고 싶었던 건가? 난 바보야, 바보.'
주먹으로 머리를 콱콱 쥐어박으면 좋겠는데 두 손이 모두 고삐를 잡고 있어서 난 그저 성질만 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카메론의 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말에 올라탔으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니 마고들을 쫓아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아도 적어도 몇 명이라도 쫓아올 줄 알았던 신하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왕실에서 오라버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보같이 아직 마고 오빠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충격을 받고 그래. 아무튼 오라버니도 너무 마고 오빠를 의지하는 경향이 있단 말야. 그리고 대체 왜 지금 전염병이 도는 거지? 적어도 내가 떠날 때까지는 조용히 있어주면 좋잖아?' 아르테미스님, 너무해요~'
속상한 마음에 재앙을 일으킨 여신에게 투정을 부려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여신의 노여움을 풀기 전까지는 역병도 물러가지 않으리라.
오라버니에게는 적어도 병에 관해 박식한 요르가가 붙어있어서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마고 일행이 큰일이었다. 만약 도이튼 근처에 가기 전에 그들을 붙잡지 못하면 결국 그들은 병이 도는 지역에 노출된다는 말인데, 잘못했다간 결혼도 하기 전에 과부가 되게 생긴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들을 붙잡아야해. 이실론테. 자, 생각을 하자. 생각을 ...'
평소 신하들을 괴롭힐 때는 잘도 머리가 굴러가더니 막상 긴급한 순간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도대체 나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 출발한 이들을 어떻게 붙잡는단 말인가. 마고들을 만나려면 적어도 그들이 타고 간 말보다 훨씬 더 빠른 수단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지? 왕실로 다시 돌아가서 마고 오빠의 전차를 몰고 나올까? 라버스에서 가장 빠른 말들이 모는 전차이니 분명 이 말보다는 빠르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삐를 잡아당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말이 속도를 줄이더니 결국 달리는 것을 멈추어 버렸다.
"어, 어.. 왜 그러니?"
고삐를 고쳐 잡으며 말을 살피려고 눈을 들자 그 제서야, 머리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때문에 볼 수 없었던 주변 환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양옆에 위치한 허름한 집들, 우거진 잎의 종려나무들, 그리고 앞에 있는 네 갈래길, 우물 들..
'자. 잠깐 네 갈래길?'
나는 깜짝 놀라 눈앞에 펼쳐져 있는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히 지금까지 달려온 외길에서 네 갈래로 나누어지는 길목에 말이 멈추어 서 있었다.
'이. 이럴수가. 정말 네 갈래길이네?'
시간상 별로 달려온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써 라버스의 제 1 항구도시 도이튼으로 향하는 네 갈래길 앞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왕실에서 말로 달려 한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우와, 너 굉장하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타보았던 말들보다 훨씬 크네. 아!! 니가 도카메론에서 왔다는 그 말이니? 오라버니가 자랑을 하던??"
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소리치자 흑마는 마치 내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푸르륵거렸다.
"하하.. 이거 굉장한걸. 이 정도 빠르기면 충분히 마고 일행을 잡을 수 있겠어. 얘, 혹시 너 이런 것도 알 수 있니? 너의 옛 주인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가.. 뭐 이런 것 말야."
말 중에 똑똑한 것은 개보다도 낫다고 했던가. 혹시나 하여 물었더니 역시 이 말은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코를 벌름 벌름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차례차례 네 갈래 길을 오가며 냄새를 맡는 것 같더니 기어코 첫 번째 길로 돌아가 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워워. 잠깐만 기다려. 정말 이쪽으로 간 거니?"
내 질문에 흑마는 우뚝 멈추어 서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다는 듯 앞발로 땅을 굴렀다.
"하하. 정말 신기하네."
나는 말의 목덜미를 정성껏 쓸어주며 마고 일행이 들어섰을 것이 분명한 첫 번째 길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네 개의 길은 분명 서로 다른 특색과 지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고들이 간 이 첫 번째 길이 가장 빠른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평탄하고 주변 환경도 탁월해서 외국인들을 안내를 할 때면 대부분 이 길을 선택하던 마고였다. 이번 여행길에도 그는 첫 번째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나는 말을 몰아 첫 번째 길을 빠져나와 두 번째 길로 말머리를 돌렸다.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이 길이 도이튼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야. 휘라를 거쳐가는 길이었지 아마..'
나는 십여 년 전 마고와 함께 그 곳의 봄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성을 몰래 빠져 나왔던 일을 기억해 내며 서서히 말을 몰아갔다. 꽃의 도시 휘라! 도이튼의 아래쪽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도이튼과는 달리 주민들이 족 단위로 정원을 가꾸고 살아가는 곳이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있다면, 이 작은 도시가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엔 온통 꽃가루로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곳 주민들은 계속 살아온 환경이라지만 역시 타 지역 사람들에겐 그 꽃가루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항상 날아다니는 꽃가루 때문에 숨쉬기도 곤란했고, 여기저기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꽃가루 때문에 적잖이 고생한 것을 떠올리며, 허리에 감고 있던 붉은 공단의 띠를 풀어내렸다. 띠의 한쪽 끝을 잡고 탁탁하고 털자 말이 달리면서 이는 바람에 돌돌 말려있던 천이 본래의 크고 널찍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한 것을 이빨로 반으로 죽하고 찢어서 하나는 코와 입에 꽃가루가 들어가지 않도록 말의 얼굴에 매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얼굴에 감았다. 천이 길기에 눈만 남기고 얼굴 전체에 모두 감아버려서 마치 복면을 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천이 얇아서 그런지 숨쉬기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멋진 꽃가루 대비용 보호도구를 만든 셈이었다.
'좋아. 이것으로 됐다. 고민했던 것에 비해 일이 잘 풀려가고 있는 것 같아.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으니까 가면서 휘라 사람들에게도 병에 대해 알려주자.'
마음을 이렇게 먹고보니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한때는 나도 병에 걸리지는 않을 까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병은 페스트와 증상이 같았다.
'힘들긴 했지만 역시 요르가에게 질병에 대해 배워둔 건 잘 한 일이었어. 이 병의 증상은 무시무시하지만 병에 걸린 자와 직접적인 신체 접촉만 하지 않으면 절대 걸리지 않을 병이야.'
나는 요르가의 그 지긋지긋했던 수업을 생각하며 잠시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필요에 의해 자진적으로 배우고자 했던 검상이나 그 밖의 상처에 대한 기본 지식 외에도 역병에 대한 치료법과 예방책을 가르쳐 준 요르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요르가가 비록 지금은 민생 안정장으로 있지만 왕년엔 꽤나 잘 나가던 의사였다니 그저 웃음만 나올 일이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지금은 웬만한 의사들보다 질병에 대해선 더 많이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이 병마와도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빠른 말발굽 소리와 함께 얼마를 더 달리자 서서히 길가에 꽃가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벌써 휘라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