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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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데르펠 가다른, (Derfel Gadarn)
축일 : 4월 5일
전설에 의하면,
그는 위대한 윌쉬 군인이었는데,
국왕 아서가 살해된 캄란에서 싸운 경력이
있을 정도로 용맹하였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바르드시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거처를 옮겨 란드펠, 메리오네셔 및
웰스 지방에서 독수자로 살았는데,
그의 출중한 덕행이 널리 알려져서 방문객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나무로 만들어
오랜동안 공경받아오던 그의 성상은 1538년,
스미스필드에서 성 요한 포레스트를
화형에 처할 때 화목으로 사용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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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V. Ferrer )
축일 : 4월 5일
오늘날 교회의 양극화는
이 성인의 생애 동안에 교회가 갈라졌던
폭풍에 비하면 부드러운 미풍에 불과하다.
화해의 수호 성인으로 꼽는다면 당연히
빈첸시오 페레르를 첫번째로 들 수 있다.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세에
고향인 스페인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뛰어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 후 그는
베드로 데 루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베드로 데루나 추기경은
그의 일생에서 비극적으로 그려질 것이다.
대단히 열성적인 본성을 지닌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을 열성적으로 실천했다. 그는
서품된 지 얼마 안되어 발렌시아의 도미니코
수도회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서방의 대분열이 처음에는 두 교황으로,
나중에는 세 교황으로 그리스도교를
분리시켜 놓았다. 클레멘스는 프랑스의
아비뇽에 살았고, 우르바노는 로마에 있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로마 교황의
지지자로서 대단히 헌신적이었지만
빈첸시오는 우르바노의 선출이 무효라고 확신했다.
데 루나 추기경을 도와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클레멘스를 따르도록 설득하는 활동을 했다.
클레멘스가 사망하자 데 루나 추기경은
아비뇽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베네딕토 13세가 되었다.
빈첸시오는 교황의 고해 신부로서, 교황청의
시종장으로서 베네딕토 13세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교황은 모든 교황 후보자들이 투표 장소에서
실천하기로 맹세한 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왕과 거의 모든 추기경으로부터
소외되면서도 자기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빈첸시오는 환멸에 빠져 결국 심한 병이 들었다.
그는 교회의 어떤 쇄신도 분열을 극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느꼈지만 결국은 그저 단순하게
"온 세상에 가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일
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뛰어난 웅변가요 열정적인 설교가로서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 스위스, 베네룩스 3국,
룸바르디아 지방 등에 복음을 전하고 회개의
필요성과 다가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강조하면서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보냈다
(그는 '최후 심판의 천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1408년과 1415년에
과거의 친구였던 교황에게 은퇴하도록
설득하려 애썼다. 결국 그는 베네딕토 13세가
참다운 교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몹시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3세가
주재하고 있는 회의의 단상에 올라가 과거에
자기를 사제로 서품시켜 준 그 사람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베네딕토 13세는 과거에 자기를
지지하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가
교황으로 선임되자, 빈첸시오는 북프랑스 지역에
서 교회 일치를 위해 부르짖었고, 그의 공헌으로
기나긴 백년전쟁도 끝을 맺었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설명 ; 빈첸시오 페레르 시대의 교회 분열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교회에는 두 개의 '머리'가 있었다.
만일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래에
세계의 반은 로마에 있는 교황의 계통을 따르며
또 반은 이른바 리우데자네이루의 교황이라는
'공식적'계보를 따랐다면 오늘날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교회가 오만과 무지, 탐욕과 야심의 바위에서
오래 전에 파선되지 않고 있는 것은 계속되는
기적이라 할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교수대에, 오류는 언제나 왕좌에."라는
로웰의 말과는 반대로 우리는
"진리에는 막강한 힘이 있으며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긴 시간을
요구하기도 한다.
인용 ; 정결의 보석이여
애덕의 횃불이여
참회의 거울이여
영원한 구원의 나팔이여
천상 지혜의 꽃이여
악령의 정복자여(성빈첸시오 호칭 기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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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베르토(albert)
축일 : 4월 5일
알베르토는 '고귀하고 빛남'이란 뜻이다.
아뿔리아의 몬떼꼬르비노 사람인
성 알베르또는 그곳의 주교가 공석이었을 때,
주민들에 의하여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후 한때 시력을 상실하여 고생하였으나,
어떤 환시를 본 뒤로 오히려 제 2의 시력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혜까지 입었다. 한번은 그가
수하 사람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한다.
성 알베르또 만큼 전 시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주교는 여태껏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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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축일 : 4월 5일
켄트의 왕이며,
켄터버리의 성 아우구스띠노로부터
그리스도교회로 개종했던 성왕
에텔베르토의 딸인 그녀는 노스움브리아의
외교인 왕 에드윈과 결혼하였다.
그녀와 그녀의 전속사제 바울리노 국왕을
설득하여 크리스챤으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문에 국왕 에드윈은
국내에 크리스챤의 증가를 권장하였으나,
633년에 왕이 죽자, 이방인들의 여러 종교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으므로,
에텔부르가와 바울리노는 켄트로
되돌아가야만 하였다. 그녀는 리밍게에
수도원을 제우고 죽을 때까지 그곳의 원장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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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율리아나(Juliana)
축일 : 4월 5일
플란데르 리에쥬 교외 러틴느에서
태어난 그녀는 5세 때에 고아가 되어
코르닐롱산의 수녀들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환시를 경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이 없다고 지적하셨다. 그후 그녀가
수녀가 되었고, 1225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저런 오해도 많았고 제재를 당하였으나,
마침내 리에쥬의 주교가 교구내에
"주의 성체 축일"을 도입하였다(1246). 그러나
그 주교가 사망하면서부터 그녀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나, 율리아나는 자기 수녀원에서
쫓겨났다. 그후 나무르의 씨토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하였으나, 이곳마저 헨리 2세의
군인들이 파괴하였다. 그녀는 일생동안,
성체 축일 제정과 그 축일의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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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논(Zenon)
축일: 4월 5일
성인은 역청과 불로 고문을 당한 뒤, 순교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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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랄도(Gerald)
축일 : 4월 5일
성 제랄도의 출생지는
피카르디의 코르비이며, 그는 이곳에 있는
대수도원의 첫번째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으로
늘 고생하였는데, 이 신경통이 일생동안
그를 괴롭혔다. 어찌나 심했던지 어떤 밤에는
잠을 도저히 잘 수 없었고, 또 이성을 잃을 때도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원장은 그를 로마에 보내어 치료 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그는 사도들의 무덤을 참배하자
차츰 차츰 그의 병이 나아갔다. 이리하여 그는
성 레오 9세의 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고행에만 전념하므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았다.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내려 오시어 그에게 다가 오는
환시를 보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하였다. 그는
이 순례에서 돌아와서 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수도원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는데
헌신하는 한편, 새 수도원을 여러 곳에 세웠다.
1079년, 소브-마외르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된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각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케 하였다.
그는 회원이 사망하면 그 영혼을 위해 30일 동안
미사를 봉헌토록 하였고, 또 그 영혼을 위하여
일년 동안 바치는 빵과 포도주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도록 규정하였는데,
후일 이 규정은 완화되었지만 오늘의 교회에서도
아름다운 풍습이 되어 전해온다.
그는 1197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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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크레센시아
축일: 4월 5일
바바리아의 카우프베센의 가난한
가정에서 그녀가 태어났다. 양친은 매우
열심하였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단순성의
표양을 보여주었고, 따라서 자녀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자주 성당에 가서 기도하곤 하였다.
크레센시아는 집주위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녀회 성당으로 자주 성체조배하여 다녔는데,
어느날 그녀는 십자가로부터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이 네가 거처할 집이니라."
그리하여 그녀는 아버지께 간창하여 수녀원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집안이 너무 어려우니
21세까지만 기다리라는 말씀을 듣고 열심히
가사를 도왔다. 드디어 이 약속은 지켜졌다.
그녀의 수녀원 생활은 겸손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참금을 전혀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주 조그마한 방이 마련되었으나,
지참금을 지불한 새 입회자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자신은 그녀의 방 마루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수모를 아주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그로써 높은 성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상이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녀의 높은 덕을보고
살아있는 성녀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수련장과 원장직까지 역임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특히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 많았다.
이 체험은 매주 금요일마다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녀의 영향은 수녀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구 그녀의 참 지혜와
겸손으로 큰 감명을 받고 돌아갔으며, 교회의
지도자들도 가난한 이 수녀의 의견을 듣고자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