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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의태어
우리말에는 약 1천2백개의 의태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는 의태어라는 이름도 없다고 한다. 언어가 규명되고 있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인문학의 출발은 언어학이다. 그러나 언어가 오해됨으로써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우리말에 의태어가 많은 이유는 둥글둥글 덩실덩실 처럼 두 단어가 반복되고 있어서 구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촐랑촐랑/출렁출렁, 산들산들/선들선들, 팔팔/펄펄처럼 모음의 차이로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의태어를
찾아내기가 쉽다.
같은 어원의 단어가 영어에는 접미어 -ble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flash, flare, flicker의 fl-은 모두 빛을 나타내는
점에서 이들은 의태어이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 의태어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영어는 의태어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즉 영어나 그 밖에 다른 나라의 말은 우리말과 일본어를 제외하고 두번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또 모음의 차이로 인한
대립상이 관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의태어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실상 의태어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언어의 조상이 되는 원시어가 반드시
의태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을 엄밀히 규정하려면 새로운 개념이 정의되어야 한다.
봐
봐 1.. 보아라(보다+해라) 여기서 ‘해라’는 명령이다.
봐 2 .. 일방적 명령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를 주문하는 형태의 조건부 명령.
봐는 ‘보아라’의 줄임말이며 ‘보아라’는 ‘보다 + 명령’이다. 그런데 일방적 명령일 때는 반드시 명령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시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해라’하고 ‘무엇’을 특정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일방적 명령일 때 .. 이것을 봐라.(이것 봐)
조건부 명령일 때 .. 보는 것을 네 스스로 해라(봐봐)
저리 가 (가다 + 해라) ‘가다’의 내용인 ‘저리’가 특정되어 있다.
가 봐 (가다 + 조건부 명령) 도무지 어디로 가라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가 봐' 하는 식으로 '봐'를 붙이는 이유는 '가'라고 말할 경우 '어디'로 가라고 어디의 장소를 특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 장소를 내가 특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해라.. 특정한 일을 하라.(예컨대 설겆이를 하라. 화장실 청소를 하라.)
일봐라.. 자기가 할 일을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하라.(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
봐.. 이것을 봐라(혹은 저것을 봐라)
봐봐.. 보되 네가 스스로 판단하여 봐라.
보다에는 인식의 의미가 있다. 즉 '보라'는 것은 '알아보라'는 뜻이다. 예컨대 '맛보라'고 하면 '맛을 알아보라'가
된다. '봐'라고 할 경우 그 인식내용을 특정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 물감을 봐'.. 이 경우 물감의 색이 붉다면 붉은 색을 특정한 결과가 된다.
'이 물감을 봐봐'.. 이 경우 물감의 색이 무슨 색인지는 특정되지 않았다. 색의 내용은 상대방의 판단여하에 맡긴다.
'가봐' 혹은 '와봐'로 '봐'를 붙이는 것은 그 인식 혹은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특정하지 않고 그 내용에 대한 판단
을 상대방에게 위임하기 위해서이다.
봐봐봐.. ‘가봐봐’, ‘와봐봐’ 식으로 ‘봐봐’를 하나의 단어로 씀에 따라 의미가 중복된 표현이다.
가.. 가다 + 해라(저리로 가라)
가봐..가다 + 알아봐(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스스로 알아서 가라)
가봐봐.. 가다+네 스스로 알아봐 +그러나 일방적 명령은 아니다.
봐봐봐.. 보다+네 스스로 알아봐 + 그러나 일방적 명령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봐봐 1
봐봐 2가 있다.
봐봐 2는 '가봐봐', '해봐봐' '맛봐봐' 식으로 붙어서 세트로 움직인다.
'보다'에 '봐봐'가 붙으면 '봐봐봐'가 된다.
힌두어의 어순
힌두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다.
이는 인도유럽어가 우리말과 어원이 같은 사실과 연결이 된다.
언어가 반드시 혈통과 일치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을 수 있다.
언어는 핏줄이 아니라 문화다.
언어는 혈통과 달리 여러 이유로 변하는 것이며
인도유럽어와 가까울 수 있다.
몽고어, 여진어와 우리말은 아무런 친연성이 없다.
세계의 다양한 민족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각각 대화해 보되 발음이 비슷한 사람끼리 그룹을 지어 서 보라고
했더니 몽골인과 여진족 한국인은 각각 다른 그룹에 속하였다고 한다.
만다린어
"고대 요동지역의 한족 정착민 후예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즉 요동한족 팔기군의 언어가 만주족 지배자들에 의해
북경으로 도입되어 후에 소위 만다린이라는 명칭으로 오늘날 중국의 공식상용어가 된 것이다."
지금 공식 중국어는 정통 한족의 중국어가 아니다.
만주 사투리일 뿐이다. 우리말 및 그 한자발음은 광둥어와 가깝다.
타밀어
신화에 나타나는 우리말과 타밀어의 유사성, 힌두교문화의 흔적
지난 10월 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BC69~AD 4)를
키웠던 진한 6촌장의 사로육촌 중 고허촌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 규명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키워지다가 자력으로 만주지역에
고구려를 세우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난 지 반나절 만에 성인이 돼 보름 지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사로육촌의 6촌장 손에 13년간 키워지고 나서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된다.
진한 6촌장 인도 타밀 출신 추정
필자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 및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윷놀이와 제기 등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도 타밀어 명칭과 놀이 형태가 완전히 똑같다.
박혁거세의 대부 격인 6촌장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도 남부 및 스리랑카 북부 출신으로 토론토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의 타밀인들 가운데 타밀인협회 및
여성단체 관계자, 힌두교성직자, 교수, 교사 등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타밀어 사전 및 역사서 등을 참조
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 학계에선 “이곳(서라벌)에 오래 전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는 여러 역사서의 내용과 유물 등을 분석하여 박혁거세 및 6촌장 모두를 북방유목민출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박혁거세와 6촌 주민들이 북방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서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고만
전해오는 6촌장 만큼은 허왕후나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당시 막강한 해상력으로 아시아 전체를 누비고 다니던
인도의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둘째, 박혁거세의 탄생지 근처에 있는 우물 ‘나정’은 타밀어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을 뜻하는 ‘나중(nazung)’
과 거의 일치한다.
타밀어의 나주쿠(nazukku)는 “땅을 파헤쳐 이랑이나 도랑을 만들다”(=make a shallow furrow)라는 뜻의 능동형
동사인데 그 수동형동사 ‘나중구(nazungku)’는 ‘이랑이나 도랑이 만들어지다’ (=be ploughed with shallow furrows)
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이라는 뜻의 명사 ‘나중(nazung)’이 바로 박혁거세의 우물 ‘나정’으로 변이된 것
으로 보인다.
2005년 8월 문화재청은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경주 시내 우물 나정
을 발굴한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발굴팀은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의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
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즉 구거 같은 대형 구상 유적을 확인했다.
이로써 박혁거세가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알영 부인 이름도 타밀이름과 유사
셋째,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는 현재 타밀 나두주(州) 땅에 있던 당시 타밀인들의 촐라 왕국 바닷
가 마을 ‘부르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고향이 동서양 무역으로 크게 흥했던 고대 국제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
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도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부르구나이가 있다.
박혁거세의 후견인 6촌장들이 이곳을 출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박혁거세의 별명으로 붙여 막강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부르구나이는 현재 벨란간니(Velankanni)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가톨릭 교회 ‘안네 벨란간니(Annai Velankanni)’
가 들어서서 명소가 됐다.
넷째, 고구려의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나지만 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
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박은 우리말과 당시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똑같다.
박은 현대 타밀어로는 수라이라이(Suraikai)라고 불린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인도에서 건너온 6촌장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필수품
중 하나인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타밀인들은 일년내내 무더운 날씨를 견디려고 박을 파낸 표주박 등으로 만든 물통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목을
축이곤 했다.
이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리며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usani Kudam)이라고 칭한다.
다섯째, 신라 이전의 나라 이름인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밭(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 ‘벌’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인데 고대 타밀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아울러 ‘서라벌’도 ‘아름다운(nice)’을 뜻하는 ‘서라(Sora)’가 ‘벌(Pol)’과 합쳐져 ‘아름다운 들판’을 뜻해 새 나라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민속놀이 명칭도 거의 비슷
여섯째,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
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
왕의 부인 이름인 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이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총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Saraswati)가
백조(swan)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알영부인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았다는
것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 타밀인들이 사라스와티를 숭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는 데 이들 모두 힌두교와 관련 있다.
힌두교의 주요신 시바(Shiva), 부인 파르바티(Parvati),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고대 타밀어로 ‘이비가지(Ibigaji)’ ‘정견(Chongyon)’ ‘뇌질주일(Noejil Juil)’ ‘뇌질청예(Nojil Chongye)’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개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최치원의 ‘석리정전’
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곱째, 박혁거세왕은 재임 17년(기원전 40년)에 알영부인을 대동, 6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고 전하고 있다.
즉, 삼과 누에로부터 얻은 실로 길쌈해서 삼베옷과 비단옷 등을 해입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곡식생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다. 또 제3대 유리왕은 추석 때 길쌈놀이를 실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경악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명칭들을 다음의 비교표로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새해 첫날 우리가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 노리(Chupul Nori)’ ‘ 팡이 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ori), 또는 노루(No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린다. 다음의 비교표를 보면 타밀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웃 사람으로 느껴진다.
고인돌 문화 인도에서도 발견
현대 타밀어에서도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난(나), 니(니)””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
”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난, 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모땅(몽땅)””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박혁거세 부부의 대부격인 6촌장들이 인도 타밀의 것을 한반도에 소개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대륙을 통해 벼나 보리농사가 이미 도입됐다고 하더라도 농사 관련용어 및 민속놀이 등은
타밀출신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우리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 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과 경주와 포항
등 신라지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 등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인 한양대의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 등의 지리
적 분포가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도 문화의 영향을 시사했다.
김교수는 또 “신라주민은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중국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그리고
고구려에게 멸망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필자는 토착 농경인들을 이끌던
6촌장들이 타밀출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주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인도 남부 해안지대의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활발하게 진출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밀인들은 사로 6촌 가운데 동해안과 접한 금산가리촌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들어가 경주의 사로 6촌을 개척,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타가 통치한 영일만 부근 금산가리촌은 현재 동해안과 접한 경주시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 등 3개 지역 모두를
포함했다.
또, 필자가 인도 타밀 출신으로 간주하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의 알이 담긴 궤짝도 동해를 표류하다가 동해안의
아진포에 당도하는데 이 곳이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라고 석씨전국대종회가 밝히고 있어 이래
저래 금산가리촌은 당시 인도 타밀인들의 도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작업에서 출토된 목관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이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김정남〈타밀학회장·캐나다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