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성금요일
이사 52:12-53:12 / 히브10:16-25 / 요한 18:1-19:42
사랑과 배신
어제 성 목요일 전례에서 저는 세족례에 대해 설교하면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오늘 성 금요일 설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와 그런 자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결국 배신당하셨던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고 초대합니다.
서양문화권에서는 흔히 배신의 아이콘으로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한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브루투스(Brutus)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유대교 지도층들에게 넘긴 유다(Judas)입니다. 세익스피어(Shakespeare)가 쓴 <쥴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라는 작품에서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유명한 대사에 묘사한대로, 로마의 카이사르가 평소에 아들처럼 총애했던 그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그의 암살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간 유다는 스승 예수께 그 유명한 ‘유다의 키스’를 했습니다. 이것은 루가 복음이 예수께서 “유다야, 입을 맞추어 사람의 아들을 잡아넣으려느냐? (루가 22:48)”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서양에선 배신의 표시 내지 위선적인 행위를 표현할 때, ‘유다의 키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유다라는 인물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선 ‘유다 이스가리옷(Judas Iscaritot)’이란 이름부터가 여러가지 해석을 낳았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 개역성경에서는 ‘가롯 유다’라고 번역한 것은 유다의 출생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열심당원 유다’처럼 ‘유다 이스가리옷’도 열심당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심당원들이 로마의 앞잡이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늘 ‘시카리(sicarii)’라고 부르는 단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 단어가 이스가리옷이란 단어와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두 명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을까요?
가장 흔한 해석은 가롯 유다가 예수 공동체에 재정을 책임진 자였다는 요한복음에 근거해서 그가 물욕에 사로잡혀 은전 30냥에 스승을 팔아 넘겼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에 대하여 돈낭비라고 비난한 가롯유다에 대하여 요한 복음 저자는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요한 12:6)”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유다가 예수께서 유죄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며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마태 27:4)”라고 말하고서 결국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단지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당시 성인 노예 값에 불과한 은전 서른 닢에 3년동안 동고동락했던 스승을 팔아 넘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와 정반대되는 해석은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이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다야말로 예수님의 구원계획을 잘 이해하고 배신을 통해 예수님을 도운 인물이라는 주장입니다. 특별히, 기원 후 2~3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다복음서>라는 위경(僞經)이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정통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세번째 해석은 유다 이스가리옷이란 이름처럼 그가 열심당원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전제 하에,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이민족 치하에서 구해줄 정치적이고 군사적 영웅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오천 명도 먹이시고, 병자도 낫게 해주시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갖고 계셨기에 이런 분이 이스라엘을 이끈다면 로마인들을 능히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바라는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시지 않았기에, 예수를 유대교 지도자에 넘겨서 그분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면, 그가 기적을 행하여서 위기에서 빠져나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을 자리에서 몰아내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을 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유다의 계산과 달리, 예수께서 붙잡히신 후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당하시는 것을 보고 유다는 당황하였고 급기야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절망하고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위의 세가지 해석 중에서 세번째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다의 관점도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왜 그런 그를 12제자 중 하나로 받아 주셨고, 잡히시는 그 순간까지도 함께 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배신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요한 13:10)”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 중 누군가가 배신을 할 거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유다가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자,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가 이미 배반을 계획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신 예수께서 그를 먼저 잡아서 처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발을 씻어 주시고, 빵을 떼어 주신 이유는 뭘까요?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하며 기도하다가 저는 성찬례 때 성체를 나눠주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는 말씀에 따라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하러 나오는 신자들에게 나눠줍니다. 신자들 중에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근심과 걱정을 안고서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미움과 그 밖에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떨치지 못한 채로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영하는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묵상하며 배신자 유다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도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신 그런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배신은 금전적 손해 내지 명예훼손 내지 심지어 신체 일부의 상해에서 머무는 그런 배신이 아니라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런 지독한 배신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배신을 한 뒤 유다는 비탄과 회한에 잠긴 채 스스로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신한 남자,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배신한 이와 배신당한 이 모두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성 금요일! 우리는 이 비극에 애통해 합니다. 만일 유다가 베드로처럼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더라면 어땠을까요? 부활한 예수님은 그를 내치셨을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가 다시 돌아오길 누구보다도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주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결국 절망의 길로 가버렸습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사랑이신 예수님께 크나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비통(悲痛)입니다.
그러면 유다의 죽음 이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제 범위 밖의 영역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에 맡길 뿐입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며 인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봅시다. 그리고 그런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의탁합시다.
당신의 생명을 다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