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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純宗)
조선 제27대 국왕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효황제 | 純宗 孝皇帝
초대 창덕궁 이왕
출생 : 1874년 3월 25일(음력 고종 11년 2월 8일)
출생지 :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즉위 : 1907년 7월 22일 (33세) (고종 44년 / 광무 11년)
즉위 장소 : 한성부 경운궁 돈덕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 1926년 4월 25일 (향년 52세)
사망장소 : 경기도 경성부 창덕궁 흥복헌 (現 서울특별시 중구 창덕궁 흥복헌)
능묘 : 유릉(裕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 1875년 3월 25일 ~ 1895년 1월 12일 (음력 고종 12년 2월 18일 ~ 1894년, 고종 31년 12월 17일)
대조선국 왕태자 :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음력 1894년, 고종 31년 12월 17일 ~ 양력 고종 34년 / 광무 1년)
대한제국 황태자 :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2일 (고종 34년 / 광무 1년 ~ 고종 44년 / 광무 11년)
대한제국 황태자 | 대한제국 황제 대리청정 : 1907년 7월 19일 ~ 7월 22일 (고종 44년 / 광무 11년)
대한제국 2대 황제 : 1907년 7월 22일 ~ 1910년 8월 29일 (순종 즉위년 / 융희 1년 ~ 순종 3년 / 융희 4년)
일본 제국 초대 창덕궁 이왕 :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1. 개요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순종을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의 제27대 왕으로 표기하기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짐이 부덕으로 간대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순종실록》1910년 8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中. 《순종실록》마지막 기록.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 제27대 마지막 국왕.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 휘는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다. 정식 시호는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약칭 순종효황제. 융희황제, 융희제라는 호칭도 사용한다. 현재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는 '순종 효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생일인 3월 25일은 대한제국 때 '건원절(乾元節)'이라는 이름의 국가 경축일이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 7일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황제 탄신경절을 건원절(乾元節)로 개칭하자고 상소해 이를 윤허하였으며, 다음해인 1908년(융희 2년) 음력 2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3월 25일로 정했다.
2. 생애
중전 민씨 소생의 왕자녀들 중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한 자식이었고, 고종의 수많은 자녀들 중에서도 유일한 정비 소생의 적자였다. 그만큼 순종은 대한제국 황실의 금지옥엽이였지만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고종과 중전 민씨가 후계자인 아들의 건강에 노심초사한 나머지 무속에 기대어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순종은 성인이 된 후 '독살 미수 사건'을 겪으며 그렇잖아도 안 좋던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고종과 순종이 함께 커피를 마시는 때를 맞춰 커피에 아편을 넣어 올렸다. 커피 애호가 였던 고종은 그 날 커피 맛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아편을 넣은 것도 모른 채 무심코 다량을 복용하는 바람에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고 한다. 이 일로 순종은 며칠 동안 혈변을 누는 등 건강을 크게 해쳤고, 젊은 나이에 치아 상당수가 빠져서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다.
게다가 틀니를 낀 탓에 하관이 커졌고 그 탓에 어벙해 보이게 된 데다 이 사건까지 겹쳐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순종의 입지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왕의 제목을 가지게 되었고, 고종 사후에 복벽주의 독립 운동 세력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인기와 신뢰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순종은 유일한 적자로서 고종에게는 순종 외에도 아들들(의친왕, 영친왕)이 있었지만, 다른 아들은 모두 후궁 소생이었고 순종만이 정실 소생이었다. 때문에 아버지 고종은 후계자를 교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고종이 자신의 퇴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 순종 본인도 1898년 안경수 등의 양위 모의 사건 등을 겪으면서, 예법이나 존호 등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낼 뿐 정무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며 소극적으로 처신했다.
또한 위에 나온 아편 커피 사건의 부작용 때문인지 몰라도, 순종에겐 슬하 직계 자손이 없다. 이전의 왕인 헌종도 자손이 없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론 잠시나마 자손을 두긴 했었지만 얼마 못가 요절해 헌종 사후에 살아 남아있는 슬하 자식은 없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순종이 성불구였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순종의 몸에 이상이 있기 때문에 자손을 못 본다'는 말이 그 당시 조선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성기능이 정상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런 증언을 남긴 이들이 순종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궁녀, 내관이다. 아랫 사람들이 자기네 상전의 체면과 입지를 생각해서 거짓 증언을 했을 수도 있다. 순종이 성불구였다는 설도 확실한 근거는 없으니 궁녀와 내관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도 증거는 없다. 아울러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 및 염려로 인한 심인성 발기 부전을 의심하기도 한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황태자 시절 순종 황제 본인도 순정효황후 윤씨와의 재혼 당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망국의 기운을 느꼈는지 자신을 섬기던 상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순종은 차라리 자신의 아버지인 고종이 결혼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내가 결혼해서 무슨 소용인가? 이곳에서 6년 이상 지내지 못할 텐데."
순종은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을 때도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요즘 태황제의 밝은 명을 받들고서 황제의 자리를 이어 정사를 보니 조심스러운 마음이 날로 깊어만 간다. 국가의 영원한 계책은 바로 나라의 대를 이을 사람을 일찌감치 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짐은 나이가 마흔에 가까운 데다가 겸하여 또 병이 많아 뒤를 이을 아들을 볼 가망이 점점 없어져간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7일 양력 1번째기사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최소한 순종은 본인의 건강상 더 이상 후사를 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기껏해야 재혼 이후 6년 정도 지나면 자신이 세상을 떠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보다 더 오래 살긴 했지만. 고종처럼 의문사한 것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 즉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보낸 것이 일본에게 발각되었고 이에 분노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협박과 함께 강요한다. 결국 고종이 황태자에게 국정의 섭정(攝政)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는데,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순종의 즉위식을 밀어붙이고 강행하였다. 하지만 말이 황제였을 뿐 모든 실권은 일본을 등에 업은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있었고, 이완용과 송병준 이 두 사람의 주도하에 일본에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을 넘겨주는 일이 착착 진행되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고종이 1907년에, 강제로 퇴위하면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장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신원 불명의 두 사람(아마도 내관으로 추정)이 이들의 대역을 맡아 양위식을 올리는 촌극이 벌어졌다.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規例)대로 중화전(中和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儀節)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 하였다.
고종 실록_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권정례는 '황제가 참석해야 할 조정의 축하 의식에 황제가 나오지 아니한 채 임시 방편으로 거행하던 식(式)'이다. 권정례가 아주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유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도 전란 중인 데에다 서차자라는 약점 때문에 임시 세자라는 의미로 권정례로 치렀다. 선조가 영창대군을 새 세자로 삼을 마음을 잠시 품은 데에는 광해군의 입세자례를 권정례로 행했다는 명분도 있었다.
1907년 7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도 "상오(上午) 칠시에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하였다더라."고 보도했고, 이토 히로부미도 같은 내용의 외교 전보를 일본 외무 차관에게 보냈다(통감부 전보 번호 제76호 : 今朝七時宮中中和殿ニ於テ權停禮ヲ施行). 그러나 누가 대신했는 지를 알려주는 공식 기록은 없다.
대한매일신보도 1907년 7월 19일(광무 11년 금요일)에 호외를 발행해서 "상오 8시에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대리(代理)를 명하시옵고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종이 사용한 '대리(代理)'라는 단어에는, 황태자에게 권력은 주지만 제위는 자신이 계속 갖고 있다는, 고종 나름의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었다.
고종 전에 가장 가까운 대리 청정은 영조 51년(1775년)에 있었다. 영조 실록 1775년 12월 7일(양력)자에 보면, 만약 대신들이 계속해서 왕세손의 대리 청정을 반대할 경우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조선 왕조에서의 대리 청정은 절대로 양위가 아니었고, 황태자도 이런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읽었다. 그래서 대리 청정 조칙을 취소해 달라는 상소(전교를 거두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정사와 기무(機務)가 어떤 모양인 줄 살피지 못해 막연하기만 한데 천만 뜻밖에 정사를 대리하라는 칙령(勅令)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소자는 나이가 비록 한창 때지만 어리석음이 아이 때와 다름이 없으니, 어떻게 복잡한 정사를 대리(代理)할 수 있겠습니까?
고종 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첫 번째와 두 번째 상소 부분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는 식이 끝난 후 일본 외무차관과 사이온지 긴모치 당시 일본 수상에게 '한제 양위식 거행 건(韓帝讓位式 擧行 件)'(왕전 往電 제76호)이라는 제목으로 외교 전보를 보냈다. 덕수궁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료들 사이에서 대리로 한 이 대리 청정 의식을 양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엄청났다. 심지어 일본 메이지 덴노를 직접 보필하는 내명부에서조차 "대리청정은 양위가 아니고, 대리청정을 선언하는 의식조차 본인들이 참석하지 않은 권정례로 하는데 저게 왜 양위임?"이라는 식이라서 논란이 엄청났다. 일본도 동아시아 질서에 수천 년간 있었기에 대리청정과 권정례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야시 다다스 일본 외무대신은 '한국 황제 양위 확인(韓國皇帝 讓位確認) 및 양위식(讓位式)에 관한 件'(내전 來電 제846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정부의 이사관과 부이사관들에게 내부 문건을 회람(會覽)시킨다. '대리 청정 조칙은 양위의 의미가 명백하다'는 내용이었다.
양위식이라면 고종의 대리 청정 선언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언이 되고, 순종이 권정례로 어좌에 앉아 하례(賀禮)를 받는 의식은 곧 즉위식이 된다. 그런데 순종은 약 40일 후인 8월 27일에야 즉위식을 하게 된다. 순종의 대리 청정 의식을 억지 논리로써 즉위식으로 만들어 버리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들이 발생했고, 이런 모순은 진짜(?) 즉위식이 거행된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만약 일본 측 논리대로라면 순종은 즉위식을 두 번이나 한 셈이 된다.
고종 실록은 7월 18일의 "권정례로 거행하라"는 황명(皇命)이 마지막 기사다. 영조 때도 세손인 정조가 대리 청정을 한 적이 있지만 영조 실록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대리청정임을 밝혔는데도 고종실록을 끝내고 순종실록을 시작했으니 전례에 맞지 않는 모순이었다.
신하들이 순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도 7월 19일부터가 아니라 7월 22일부터다. 고종을 '태황제'(太皇帝)로 봉존(奉尊)하는 절차를 밟아야 순종을 황제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절차를 거꾸로 꿰맞추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먼저 이완용이 대리 청정이 아니라 양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이번에 황위(皇位)를 주고받은 예전(禮典)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에 말미암은 것이니..."
순종 실록 즉위년(1907년) 7월 21일
당시 민심은 들끓을 정도로 엄청 흉흉했다. 성난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친일 대신들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즉각 보도했다. 그래서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은 “도성 안의 민심이 동요하고, 심지어는 대신에게 돌을 던지고 집을 불살라버리는 일이 날마다 발생한다"며 서울의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윤을 해임하라는 건의를 했다(순종 실록 7월 21일).
이런 와중에서도 친일 대신들은 황태자 이척을 확실한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추진한다.
"이제부터 조서, 칙서, 아뢰는 글들에 ‘대리(代理)’라는 칭호는 ‘황제(皇帝)’라는 대호(大號)로 높여 부르는 것이 실로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되므로 신(臣)들은 같은 말로 호소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을 받들어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순종 실록 순종 즉위년(1907년, 광무 11년) 7월 22일
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황태자비 윤씨도 황후로 진봉(進封)했다. 그런데도 순종은 고종 때 사용하던 광무(光武)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 시대의 연호 사용이 훗날 역사적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개정할 연호(年號)의 망단자(望單子)를 융희(隆熙)와 태시(太始)를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받든 주권(硃圈)에 융희 두 글자로 하라고 하였다.
순종 실록 순종 즉위년(1907년, 광무 11년) 8월 2일 (양력)
순종 시대의 연호 '융희'(隆熙)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 1907년 8월 3일부터 순종 실록에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은 '일그러진 절차 꿰맞추기'의 마지막 절차인 즉위식 날짜를 8월 27일로 정했다. 그리고 장소는 대리 청정 의식을 권정례로 거행했던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이 아니라 외국 외교 사절들을 접견하는 장소인 돈덕전(敦德殿)으로 정했다.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중략)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봉천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아! 짐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황태자로 있으면서 부모의 잠자리와 수라상을 살피는 일상적인 일도 언제나 미처 하지 못하였는데, 나라의 큰 정사를 대리하라는 명령이 천만 뜻밖에 갑자기 내렸으므로 더없이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오직 진정으로 간청하여 내린 명령을 취소하실 것을 바라면서 한 번 호소하고 두 번 호소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처분까지 있었으므로 더욱더 놀랍고 두려워서 당장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늘의 의사를 돌려세울 수 없고 사람들의 마음도 불안해졌으므로 하는 수 없이 힘써 명령을 받기는 하였으나, 임무가 너무도 중대한 만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아! 생각건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하늘의 의사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맞게 왕업을 이룩하고 계통을 이어줌으로써 억만년토록 무궁할 우리나라의 터전을 열어 주셨다. 창업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에 고달프시어 왕위를 정종 대왕(定宗大王)에게 물려주었고, 정종 대왕은 이어받아 또 태종 대왕(太宗大王)에게 물려주었으며, 태종 대왕은 또한 세종 대왕(世宗大王)에게 물려주었다. 세종 대왕은 세 임금의 뒤를 이어 성왕(聖王) 중의 성왕이었으니, 거룩한 공적과 훌륭한 교화로 당요(唐堯)·우순(禹舜) 때와 같은 세상을 이룩하고 예악(禮樂) 문물(文物)이 찬연하게 구비되었다. 윗사람은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고 친척을 가깝게 하였으며 아랫사람은 그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그들의 이익을 이롭게 여기면서 오늘의 경사를 보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예법이 원래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하는 일에는 다 은미한 뜻이 있어서 일반 사람들은 원래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짐과 같이 무능한 사람이 하는 일이야 일반 사람들도 어찌 모르겠는가? 그리고 세상일은 잘 되는 때와 못 되는 때가 있고 운수는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는 법이다. 근래 수십 년 동안에 우리나라에는 난관이 많아서 비록 태황제(太皇帝)와 같은 훌륭한 덕과 지극한 인자함으로 밤낮 근심걱정 했어도 오히려 장차 그렇게 되는 때를 돌이켜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변변치 못한 나로서 어떻게 이미 그렇게 된 뒤에 와서 수습할 수 있겠는가?
아! 짐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임금 노릇하는 것만 어려울 뿐 아니라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신하가 바르면 그 임금도 바르게 되고 신하가 아첨하면 그 임금은 스스로 성군인 줄 아니, 임금이 덕 있는 것도 신하에게 달렸고 덕이 없는 것도 신하에게 달렸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 이완용(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 그대 임선준(任善準)은 지방을 관리하니,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택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 그대 고영희(高永喜)는 재정을 맡아보고 있으니, 나라 형편을 넉넉하게 하라. 그대 이병무(李秉武)는 군사에 관한 정사를 정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대 조중응(趙重應)은 신중히 하고 돌봐주는 도리를 다하여 백성들에게 중도(中道)를 적용하라. 그대 이재곤(李載崑)은 인재를 교육하는 것을 가장 급선무로 내세우도록 하라. 그대 송병준(宋秉畯)은 농사를 가르쳐 재물을 늘리며 장공인(匠工人)들이 소통하게 하고 상인(商人)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하라. 그대들 일곱 사람들아, 오늘이 어떤 날이며 이때가 어느 때인가? 그대들의 마음을 통제하여 그대들의 직무에 힘쓰도록 하라. 그대들의 마음이란 무슨 마음인가? 그것은 일개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세상의 무슨 일이든 공정한 데에서 이루어지고 사사로운 데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나라만 생각하고 가정을 잊으며 공정한 것만 알고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린다면,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성과인들 나타나지 않겠는가?
아! 짐은 다른 생각이 없으니, 오직 옳은 길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힘쓰겠다. 그대들에게 좋은 계책과 방법이 있으면 짐에게 들어와서 말하라. 그대들의 말만 따르겠다. 그대들은 나 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지나간 시대보다도 더 많은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
아아! 위로는 종묘 사직의 중대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심정을 살펴서 올해 음력 7월 19일에 경운궁(慶運宮)의 즉조당(卽阼堂)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드디어 연호(年號)를 고쳤으며 대황제(大皇帝)를 태황제(太皇帝)로 높이고 순명비 민씨(純明妃閔氏)를 황후(皇后)로 추후하여 책봉하였으며 왕비 윤씨(尹氏)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아아! 황제가 되는 것이 즐거움은 없고 단지 두려운 생각만 들게 된다. 믿는 것은 신하들뿐이니 무거운 부담을 돕도록 하라. 열 줄의 포고문을 내리어 대사령(大赦令)의 은전을 베푸는 바이다. 모든 시행할 사항은 뒤에 열거한다. 【생략】
아아! 마치 자식을 낳은 것 같아서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은 지금의 첫 정사에 달려 있다. 조상의 덕을 더럽히지 말고 왕업을 튼튼하게 하여 나의 공적과 성과를 도모하라. 세상에 포고하여 모두 다 듣고 알게 하도록 하라."
순종 실록 즉위년(1907년, 대한 융희 1년) 8월 27일
순종은 이완용 외에 각부 대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오직 나라만 생각하라"고 당부한 후,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한제국 대원수복으로 갈아 입고 어좌(御座)에 앉았다.
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대례복을 갖추고 나아가 탑(평어좌)에 앉았다. 총리대신(이완용)이 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
통감(이토 히로부미)이 하례사를 낭독하고 외국 영사관 총대표가 하례사를 낭독하고 총리대신이 탑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서자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총리 대신이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만세 삼창을 하자 문무백관도 일제히 따라서 삼창을 하였다.
일성록 1907년 8월 27일
'대리 청정'과 '대리 양위'를 앞세운 고종과 순종의 '항거'는 이렇게 끝났고,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시대는 이렇게 억지스럽게 시작되었다.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어 입법권, 관리 임명권, 경찰권 등이 일본에게 강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협의없이 강제 해산해 서울에서 대거 해산 군인들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크게 벌어지기도 했다. 정미의병의 신호탄이기도하다.
명목상의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즉위하던 해에 서열로 바로 아래이며 이미 장성한 동생인 의친왕 강(堈)을 놔두고,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둘째 동생 영친왕 은(垠)을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실록을 보면, 영친왕은 순종의 이복 동생이지 아들이 아니므로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로 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진언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순종은 정종이 동생 태종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은 일을 전례로 들면서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 호칭 문제에는 고종의 의중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엄귀비순헌황귀비의 견제설, 일본의 견제설 등이 있다. 의친왕의 어머니 장씨귀인장씨는 사망 한 후에야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지만, 영친왕의 어머니 엄씨는 아예 품계를 넘어선 '황귀비'로 황후 다음 지위로 당시엔 내명부에서 가장 높았다. 그리고 엄연히 살아 있으므로, 서열 문제가 끼어있기도 했다. 일본은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얼만 안 되어 유학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로 하여금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훗날 일본 황족인 마사코 여왕(이방자)과 정략적으로 혼인시켰다. 순종 황제의 즉위 이듬해인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会社)가 설립되어 일본의 경제권 침탈이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한편 즉위 후 경술국치(1910.08.29) 직전까지 조선 왕조에서 '간신', '역신'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을 사면복권하고 시호와 관직을 새로 추증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는 당시 이완용이 주도했는데, 이 자체는 딱히 매국노 짓은 아니고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별 의미없는 신원이나 해주자는 단순한 정리 사업에 가깝다. 정인홍, 이징옥, 윤휴, 윤원형 등이 이 때 복권되었으며, 동시에 정약용, 박지원 등이 이 때 시호를 새로 받았다.
실로 나라가 멸망 직전으로 가고 있는 가운데 각처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나고 "실력 양성 운동"도 일어났지만, 일본의 국권 침탈 야욕을 막지는 못했다.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권신 송병준, 일본의 끝없는 압력으로 무력하게 국권을 하나 둘씩 일본에게 넘겨주다가 결국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천황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방식으로 대한제국은 문을 닫게 된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安寧)과 생민의 복리(福利)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여러 신하) 또한 짐(朕)의 결단을 체득(體得: 뜻을 충분히 이해하여 실천으로써 본뜸)하여 봉행(奉行)토록 하라.”
―《순종실록》 대한 융희 4년 8월 22일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신빙성은 의심받는 상황이며, 따라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 《철종실록》)에도 빠져 있다.
순종이 이 일을 막으려고 나름대로 저항했던 순정효황후 윤씨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원래 한일 합방 조약 각서에는 일본 덴노와 순종이 서명과 어새의 날인이 필요한 '조칙'을 내리기로 했는데 정작 어새만 찍힌 '칙유'(勅諭)가 내려졌다는 점을 들어 순종이 서명을 거부해 어쩔 수 없이 도장만 찍은 칙유를 내리게 한 것이 아니냐는 연구가 있기는 하다. 정확하게는 조약서에 국새를 찍었는데 조칙에는 찍지 않았으므로 효력이 없었다고 한다. 조칙에 찍힌 것은 순종이 옥새를 주지 않아서 효력도 없는 고종의 것을 가져와서 찍은 것이다. 지금 와서 효력이 없었다고 하는 건 의미가 없지만, 일본이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1910년 8월 29일, 강제 합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창덕궁 이왕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뒤 조선 왕공족(王公族)으로서 일본 황족보다 낮고 일본 귀족인, 화족 계층보다는 높은 이왕(李王) 직위를 받게 된다. 거처인 창덕궁을 마치 일본 황족의 미야고처럼 붙여 쇼토쿠큐(昌德宮) 이왕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徳寿宮」や「昌徳宮」は御宮殿の名前であり、皇族の宮号である「梨本宮」や「高松宮」とは異なって、「昌徳宮殿下」とは言わず、「李王垠殿下」のように名前で呼んだ。
창덕궁(昌徳宮)을 일본어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大日本詔勅謹解』 5권(政治経済篇, 319쪽 - 320쪽)에는
"이왕 책립의 조서/전 한국 황제를 책봉하여 왕으로 하고 창덕궁(しやうとくきう) 이왕(りわう)이라 칭하며 … 황태자 및 장래의 후계자를 왕세자라고 하며, 태황제를 태왕으로 하고, 덕수궁(とくじゆきう) 이태왕(りたいわう)이라 칭하며…
(李王冊立ノ詔書/前韓國皇帝ヲ冊シテ王ト爲シ、昌德宮(しやうとくきう)李王(りわう)ト稱シ、…皇太子及ヒ將來ノ世嗣ヲ王世子トシ、太皇帝ヲ太王ト爲シ、德壽宮(とくじゆきう)李太王(りたいわう)ト稱シ、…
라는 내용을 통해 일본식 훈독인 '쇼토쿠노미야'라고 읽지 않고 음독으로 "쇼토쿠큐"(현대식 표기로 しょうとくきゅう)라고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잃은 뒤로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며 당구를 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지만, 어느 날 당구를 치다 쓰러진 후로는 그나마 당구조차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종의 장례식 때는 양복이나 일본 옷을 입은 문상객이 오면 아예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아서 좌중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인 고관들까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을 왔다는 증언이 있다.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당시 요시히토 황태자와 만나서 기념 촬영을 한 바 있고, 10년만인 1917년 6월 방일해 다이쇼 덴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말년의 순종이 아편 중독에 빠졌음을 시사하는 독일 기자의 접견기가 남아 있다. 자신을 죽일 뻔한 약이었음에도, 이미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몸과 망국의 한을 마약으로라도 잊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순종은 결국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52세를 일기로 자식 없이 붕어하였는데, 순종의 국장을 기회로 제2의 3.1 운동을 시도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왕의 위(位)는 영친왕에게로 이어졌다. 죽기 전 일본군 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사망 전에 남긴 유조(유언)(遺詔)가 있는데, 궁내부 관리인 조정구에게 구술하도록 했고, 이 유언은 미국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실렸다. 주 내용은 '한일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 및 친일 관료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순종 본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 교수가 이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 일반에 공개했다. 다만 의문점은 조정구는 순종이 죽기 전인 1926년 3월 말에 이미 사망했다는 점인데, 유언을 꼭 죽기 직전에 남기지는 않으므로 조정구가 죽기 전 순종이 미리 유조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를 증명할 뚜렷한 증거는 없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유릉(裕陵). 고종의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몄다. 이 능에는 순종, 순종의 첫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모두 합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능제 중 유일한 3인 합장릉 형식이다.
3. 평가
과거 망국의 군주였던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과는 달리 마지막 황제로서 뭔가를 하려고 했던 흔적도 없었고, 친일파와 일본 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렸으며, 망국 후에도 일제가 보장해 준 이왕직에 만족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 그 이상의 특별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단, 마지막 왕이라고 해서 나라 망친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말 그대로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그가 사리분별이 가능한 나이가 된 1890년대쯤부터 이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한 상태였다. 나라 망친 책임을 묻는다면 고종이든 대원군이든 민씨 척족이든 누구든간에 이전 세대에 책임을 물으면 또 모를까 순종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순종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저항은 아버지 고종이 다 해보기는 했다. 외교적 청원이라거나 국외 단체와의 연락이라던가, 국내의 반외세 세력과의 연락이라거나 국외로의 탈출 시도라거나, 심지어 결과적이지만 죽음을 통한 저항까지. 순종은 옆에서 그게 다 안되는 것을 보고 성장했다. 더구나 모친은 일본에 저항하다가 미우라 공사를 뒷배로 둔 일본 낭인 자객에 의해 끔찍하게 암살당했다. 물론 궁궐이 생각보다 쉽게 뚫린건 고종의 친위부대중 하나였던 훈련대가 고종에게 불만을 품고 일본에게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 역시 이 사건으로 병사했으니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순종은 본인도 독살 미수 피해자다. 애초에 즉위 당시 이미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세도 정치 시대의 철종마저도 세도가들에게 눈칫밥 먹이고 입 다물게 할 권력은 충분히 있었고 고종도 초반이나 극후반을 제외하면 왕이라고 불릴만한 권력이 있었다. 근데 순종 시대에는 권력이 전부 일본으로 넘어가 버려서 현재 일본의 덴노 수준일 정도로 허수아비였다. 순종이 기거한 창덕궁에도 일본 경비병들이 감시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궁중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은 순종을 싫어했는데, 알렌 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것은 알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주로 언급되는 건 김홍륙 독차 사건 후유증으로 바보가 되었다는 설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기록을 볼 때 지능 자체가 낮았다기보다 사람이 좀 어수룩하게 보였다는 쪽에 가깝다. 혹은 서번트 증후군이었거나 고기능 자폐였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전반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명석하다는 평도 내렸지만, 대외적인 이미지가 바보로 굳어진 것이 문제다. 여러 모로 삼국지 유선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도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순종이 김홍륙 독차 사건 후유증으로 몸이 크게 약해진 것은 사실이며 자신의 권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마저 힘이 너무 없었다. 사람은 자신의 몸 상태와 무력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법인데 몸이 허약할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순종은 거의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그 후유증에 평생 시달릴 정도로 매우 병약했고 이는 자신감 결여로 이어졌다.
순종 어진은 1935년 신선원전에 봉안했던 당시를 기준으로 황룡포본 1축, 홍룡포본 1축, 군복본 1축, 면복본 1축, 군복본 1축, 복건본 1축 등 총 7축이 있었다. 그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진은 순종 사후 1928년 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이다. 황룡포본은 완성 후 창덕궁 신선원전에 봉안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어진 및 왕실 유물과 함께 부산으로 옮겨져 관재청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러던 중 1954년 12월 10일 발생한 용두동 대화재로 인해 어진의 오른쪽이 훼손되었다. 당초에는 7본 모두 불타버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황룡포본은 1918년에 그린 후 촬영한 홍룡포본 흑백 사진, 이당이 그렸던 순종의 다른 어진의 얼굴, 세종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황룡포 등의 자료를 토대로 2014년 표준영정으로서 복원했다. 어진 외의 다른 그림도 없어 복원이 요원한 선대 왕들과는 달리 명확한 사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군복본 1축은 1909년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김은호가 그린 어진 유지 초본이 남아 있으며, 김유진 화백이 이를 토대로 그린 어진도 있다. 왼쪽의 어진에서 순종은 대원수복이 아닌 육군 대장의 제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순종이 군 통수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4. 기타
마지막으로 순종을 모신 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채로운 식사를 즐긴 아버지 고종과 달리 좋아하는 음식이 딱히 없었으며 수라를 올려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물에 만 밥만 겨우 먹어서 수라간의 나인들이 수라 때마다 쩔쩔 맸다고 한다. 또한 치아가 부실해 딱딱한 것을 먹기 어려운지라 깍두기도 삶은 무로 담갔다고 한다.
야사에 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주다 망국(亡國)의 이야기가 실린 대목을 읽자 그 궁녀의 뺨을 치며 자신을 능멸하지 말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순종 행장(行葬)에도 표현을 약간 순화하여 기록하고 있다.
"나이든 궁인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가 어떻다고 말하니, 즉시 엄하게 꾸짖어 물러가라 명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선황제(先皇帝)의 일을 논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녀들이 감히 선조(先朝)에 대해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야사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의 순종이 망국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며, 암군이라는 평가가 강한 고종과 달리 등극 때부터 아무런 실권도 없이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최초로 개방한 황제다. 물론 일본의 강요가 크긴 했지만, 순종 본인의 의지도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창경궁과 창경궁에서 보관하고 있던 황실 유물들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경복궁 내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문제는 이게 국권이 피탈된 이후에는 완전 놀이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창경궁이 1909년 창경원이 된 이후에도 계속 그곳에서 거처했다.
창경원 개원식에는 모닝코트와 중절모에 구두를 신고 지팡이까지 짚는 등 말끔한 양복을 입고 참석했다. 당시 창경원 개원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한국통감을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였는데, 개원식 닷새 전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하여 정작 식(式)에는 참석을 못했다. 순종 생전에는 매주 목요일에 창경원이 폐쇄되었는데, 순종이 직접 창경원에서 산책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중화 문명권에선 궁궐을 개방하는 걸 무례하다 생각했지만 서양의 경우 궁궐을 개방해서 평민들에게까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곤 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 있는 고종 어극(즉위) 40주년 칭경 기념비(속칭 비각)의 현판 글씨는 그가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다. 현판을 잘 보면 끝에 '예필(睿筆)'이라고 쓰여 있는데, '예필'이란 '황태자가 쓴 글씨'를 말한다. 순종이 생전에 남긴 글씨들은 질적 편차가 매우 심한데, 이는 생전에 그에게 잔병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본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린 시절이면 몰라도 고종의 칭제 무렵에는 글씨체가 많이 원숙해진 것으로 보이며 경술국치 이후 남긴 글씨도 매우 세련되어 있다. 《선원화보》에 실린 순종의 필적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는데, 내용을 보면 순종은 무기력했을지언정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君臣同心 民國多福 朕信內閣 卿勿負國
"임금과 신하가 같은 마음이어야 백성과 나라가 많은 복을 누린다. 짐은 내각을 믿으니 경은 나라를 저버리지 말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내셔널리그 중부 지구 소속팀 시카고 컵스가 2016년에 마침내 우승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해인 1908년은 대한제국 순종이 제위에 있을 때였다. 이것을 떡밥 삼아서 얘기할 때 알기 쉽게 "순종 2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지금에서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묘호이므로 당대에는 쓰일 수 없는 표현이고, 대한제국 이후로 독자적인 연호를 쓴 이상 공식적인 경우에는 '융희 2년'이라고 쓰는게 더 적절하단 점은 염두에 두면 좋다.
미디어에서는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례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 임금의 교지를 신하가 대독할 때 "정조 1년"이라는 표현을 써서 비판받은 바 있다. 정조 1년(원년)인 1776년은 청나라 건륭제의 재위 기간이므로 건륭 41년이라고 써야 옳다. 또한 '~조, ~종' 등은 임금이 승하한 후에 붙이는 묘호이므로 '정조 1년'이라는 말 자체가 정조 생존 시에는 나올 수 없는 호칭이다.
세자 시절부터 신문물을 신기해해서 세창양행을 통해 시계 등 이런저런 물건을 사들여 수집했다고 하며, 이는 왕실 재정에 다소 부담을 주기도 했다. 특히 시계의 경우, 순종은 근대 시기의 황제답게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바쉐론 콘스탄틴 오픈 페이스 회중 시계이고 뒷면에는 황가의 문양인 이화문이 새겨져 있다. 출처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 경매 회사를 통해 출품되었으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개인 수집가에게 1억 2500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역대 조선의 세자들과 비슷하게 5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성균관에 입교해 공부했다. 의사 올리버 애비슨의 회고에 따르면 수천 자의 한자를 알고 있었지만 의미를 알고 쓰기보다는 받아쓰기 정도를 할 실력이었다고 하며, 단순히 사물과 이름을 연결짓는 기억력이 비상할 뿐이라고 한다. 순종이 남긴 문집을 보면 (대필이나 누군가가 불러준 게 아닌 이상) 기본 이상의 한문 구사력은 갖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당한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덕에 보학(譜學)에 밝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사람의 본관과 이름만 듣고도 상대의 항렬을 알아내 몇 대손인지 맞히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직계 조상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예법에서는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게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일례로 19세기 풍양 조씨 세도가의 일원이었던 조병구는 고도 근시자여서 평소 안경을 끼고 생활했는데 당시 임금 헌종의 면전에서도 안경을 쓰고 나타나자 헌종은 평소답지 않게 진노하며 그를 크게 나무랐다고 한다. 결국 두려움에 휩싸인 조병구는 그날 자신의 집에서 음독 자살했다는 야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총리로 활약한 윈스턴 처칠과는 동갑인데다가 대한민국의 최초 대통령인 이승만과는 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또한 김구와도 겨우 두 살 차이다.
일본 제국의 다이쇼 덴노와 비슷한 점이 은근 있다. 아버지가 1852년생이며, 둘 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있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가 같은 년도에 죽었다.
고려 순종과 공통점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어린 나이에 후계자가 되었다.
육신이 악화되었다.
37살에 죽었거나 퇴위되었다.
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순종효황제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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