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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冶隱)길재(吉再 : 1353~1419)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의 학자로
목은(牧隱)이색(李穡)·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고 불린다.
‘회고가(懷古歌)’라는 그의 시조 한수가 <靑丘永言>에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의 신하로서 망국의 한을 노래한 이 시조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외로운 신세의 저자가
고려조가 흥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느끼는 무상함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회고가’의 현대역이다.
‘오백 년이나 이어온 고려의 옛 서울에 한 필의 말을 타고 들어가니,
산천의 모습은 예나 다름없으나, 인걸은 간 데 없다.
아, 슬프다. 고려의 태평한 시절이 한낱 꿈처럼 허무하도다.
【시조】- 길재(吉再)선생 회고가(懷古歌)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어휘풀이】
<도읍지(都邑地)> : 서울을. 개성(開城)에. ‘를’은 처소격 조가 ‘에’의 뜻.
<필마(匹馬)> : 한 필의 말, 또는 말 탄 혼자 몸.
‘필(匹)’에는 ‘필부(匹夫)’, 곧 벼슬이 없고 신분이 낮은 남자란 뜻이 아울러 들어있다.
유의어는 단기(單騎).
<돌아드니> : 돌아와 들어가 보니.
<의구(依舊)하되> : 예와 다름 없으되.
<인걸(人傑)> : 뛰어난 인재(人才). 빼어난 인재. 여기서는 고려 충신(忠臣)들.
<어즈버> : '아‘와 같은 감탄사. 시조의 종장 첫 구에 흔히 쓰였음.
<태평연월(太平烟月)> : 태평하고 안락한 세월.
여기서는 고려가 융성하던 때. 유의어는 강구연월(康衢煙月).
<꿈이런가> : 꿈이던가. 꿈이었던가. 꿈인가. ‘러’는 회상 보조어간. ‘더〉러’로 ㄷ의 유음화.
【전문풀이】
오백 년 동안의 고려의 서울이던 송도를 찾아
평민의 몸으로 말 한 마리에 몸을 싣고 혼자 들어오니
자연은 변하지 않고 예대로 있으되, 고려의 인재들은 간 곳이 없으니,
외롭고 허전하기 이를 데 없구나.
아! 슬프다. 태평스러웠던 지난날이 하룻밤의 꿈과 같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음절을 중요시한다.
음절은 소리의 마디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소리’라는 단어는 ‘소’와 ‘리’라는 두 개의 소리 마디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시조를 지을 때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시조의 운율을 위해
음절의 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시조를 지었다.
야은 길재의 시조 ‘오백 년 도읍지를’을 보면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의 음절수를 ‘3,4,3,4,3,4,3,4,3,5,4,3’으로 맞추어 시조의 운율을 살렸다.
특히 길재는 종장의 제1구는 3음절로 맞추어야 한다는
시조의 형식을 지키기 위해 감탄사 ‘아’ 대신에
‘아’의 옛말인 ‘어즈버’를 사용했다.
그런데 음절의 수를 흔히 글자의 수로 생각하기 쉽지만
음절은 글자가 아닌 소리의 마디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몇 마디로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음절의 수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즈버’를 자음과 모음의 음소로 나누어 보면
‘ㅓ, ㅈ, ㅡ, ㅂ, ㅓ’의 5개의 음소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음소별로 발음을 할 때 입이 벌어지는 정도인 ‘개구도(開口度)’가 달라서
모음인 ‘ㅓ, ㅡ, ㅓ’를 발음할 때에는 입이 벌어져 개구도가 크지만
자음인 ‘ㅈ, ㅂ’을 발음할 때에는 입이 다물어져 개구도가 작다.
각 음절에서 개구도가 가장 큰 음소가 그 음절의 핵이 되는데,
이는 소리의 마디가 입을 벌리는 횟수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개구도가 가장 큰 음소는 곧 모음이므로 모음의 개수가 몇 개이냐에 따라
음절의 개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어즈버’는 모음의 개수가 3개이므로 3음절의 단어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해설】
길재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節義)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敍用)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이 시조는 고려 말 3은(三隱)의 한 사람이었던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백의(白衣)의 몸으로 영화로웠던 고도(古都) 송도(松都)에 와서 인재들은 흩어져 없어지고,
폐허가 된 것을 보고 인생무상이 느껴져 읊은 것이다.
【개관】
▶지은이 : 길재(吉再: 1353∼1419)
▶갈래 : 단형시조, 평시조, 서정시, 회고가(懷古歌)
▶성격 : 영탄적, 감상적(感傷的)
▶명칭 : 회고가(懷古歌)
▶배경
- 시대적 배경 : 고려의 멸망
- 심적 상황 : 섬기던 고려 왕조는 망하고, 동지, 인물은 모두 죽어,
외롭고 쓸쓸하고 허무하구나.
▶정조(情調) : 세사(世事)의 흥망성쇠와 인생무상의 정
▶소재 : 도읍지(송도), 산천, 인걸
▶제재 : 고려조의 멸망
▶표현 : 직설적이고 순박함.
▶핵심어 : 꿈(이런가)
▶주제 : 고려 왕조의 무상(無常)함을 한탄함.
【구성】
▶초장 : 기(起) - 평민의 몸으로 돌아옴.
▶중장 : 승(承) - 인생의 유한성(有限性).
▶종장 : 결(結) - 인생무상(人生無常)
【감상】
이 시조는 고려의 멸망을 제재로 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회고의 정과 인생무상을 회고적·감상적 어조로 노래한 서정시이다.
초장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는 '오백년이나 이어져온 고려의 옛 서울에 한 필의 말을 타고 들어가니'라는 뜻이고, '필마'는 작가의 외로운 신세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중장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에서는 '산천'과 '인걸'을 대비하여 인간의 삶이 허망하고 무상함을 강조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회한의 정을 더욱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종장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에서는 고려왕조의 흥성했던 시절을 의미하는 '태평연월'과 '꿈이런가'라는 표현이 서로 호응함으로써, 고려 멸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끼는 마음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초장과 중장의 구상적 표현과 종장의 추상적인 표현은 서로 대조를 이루며 시조의 쓸쓸한 정조를 더욱 잘 드러내준다
이 시조에서 ‘필마(匹馬)’는 벼슬이 없고 신분이 낮은 남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곧 평민(平民)을 의미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야인(野人)의 몸으로 혼자 말을 타고 송도(松都)에 들러 본 것이다. 중장에는 세사(世事)의 무상함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산천(山川)과 인간의 짧은 생명과 잘 대조시켜, 사람의 덧없음을 효과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인걸은 고려 충신(遺臣)들을 가리킨다.
또 중장(中章)은 두보(두보(杜甫)의 <춘망(春望)>이라는 시에서,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옛 그대로다.)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영화로웠던 궁궐에 봄이 와서 풀 나무만 무성하도다.)
를 연상시킨다.
종장(終章)에서는 인생의 한 때의 영화는 꿈과 같이 허무한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태평연월(太平烟月)’은 고려의 화려하고 융성했던 때를 말한다. ‘꿈이런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근거가 되는 말이다. 중장(中章)이 구상적(具象的)이라면 종장(終章)은 추상적(抽象的)인 표현이다.
이 시조는 원천석의 <흥망이 유수하니‘와 함께 고려 유신(遺臣)의l 화고가(懷古歌)로서, 시조의 기본 율조가 어긋남이 없는 전형적인 틀을 지니면서 전편에 애상적9哀想的)인 정조(情調)가 흐르고 있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하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의 매서운 정렬(貞烈)과는 대조적으로 유약성(柔弱性)이 엿보인다.
중세인들은 왕조와 나라를 신성시하고, 그것을 대표하는 도읍지를 성지(聖地)로 여겼다. 더구나 임금을 천자로 생각하던 때라, 도읍지를 하늘이 점지한 곳으로 여겨, 그것이 500년이나 이어져 왔음에 느낌도 사뭇 깊었으리라. 그러나 고려인에게 있어서도 ‘역사의 주체’는 ‘하늘의 뜻’과 맥을 잇는 ‘사람’이었다. 지은이는 바로 이 사람을 노래하되, 영원한 자연과 대조시켰다.
이 시조의 초장에서는 홀로 한 필의 말에 몸을 얹고 옛 도읍지로 찾아드는 지은이의 추연(惆然)한 모습이 어린다. 그리고 중장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영상을 예대로인 산천과는 대조로써 한층 더 간절한 것으로 높이더니, 종장에 이르러 ‘이제’의 처지에서 ‘어제’를 그리는 점으로 맺었다. 실로 지은이는 ‘없는 것’과 ‘있는 것’, ‘사라진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 그리고 ‘죽은 이’와 ‘산 이’들의 사이를 오가면서 역사와 자연과 사람의 삼각관계와도 같은 진실을 서정(抒情)하였다.
- 이상보 : <명시조 감상>(1970)
吉再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길원진(吉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자(字)에 부(父)를 (부)가 아닌 (보)로 발음하는 이유는
字를 발음할 때 男子에 대한 美稱(미칭)으로 보(甫)라고 발음하기도 하며
나이 먹은 남자에 대한 敬稱(경칭)으로 보라고도 하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總稱(총칭)으로도 사용한다.
1363년(공민왕 12)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고,
1370년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에게서 『논어』와 『맹자』 등을 배우며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였다.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지내며 비로소 학문의 지극한 이론을 듣게 되었다.
1374년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하여 그 해 가을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李芳遠)과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며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이듬 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되었다. 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 해 봄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따위를 먹지 않고
3년상을 행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왕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으며,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저서로는 『야은집(冶隱集)』과 『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으며,
그 밖에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해지고 있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吉再> 선생 한시
원문출처=東文選卷之二十二 / 七言絶句
閑居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卧看書。
원문출처=冶隱先生言行拾遺卷上 / 先生遺詩
述志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에 띠집짓고 나홀로 한가로이 사는데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닭은 밝고 바람은 맑으니 흥이 절로 나는구나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외객이 오지 않으나 산새들이 울어대서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숲으로 상을 옮겨 누워 책을 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