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노르스름하게 잘 구운 빵 한조각과 모락모락 김나는 커피 한잔, 컴퓨터 앞에 앉을 때 눈앞에 이 정물이 있는 공간은 내가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흐뭇한 시간이다.
지하철 안에서 어느 여학생 가방에 눈길이 갔다. 아침에 남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먹는 그 빵이 가방 한 귀퉁이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흔히 제과점에서 볼 수 있는 동그란 모닝빵 크기다. 실물 같이 보여 배고픈 사람이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갈 듯싶다.
문구점에 가니 얼굴모양이 그려진 먹음직스런 빵모양의 휴대폰 고리가 있다. 웃는 얼굴을 한 빵이 방금 구워 진 듯 구수한 냄새까지 흘린다. 주저하지 않고 사서는 휴대폰 고리에 달았다. 휴대폰보다는 빵이 더 크게 보여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휴대폰은 숨어 있고 빵만이 대롱거릴 내 뒷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모든 가치를 빵과 연결 짓는 소비가치관이 내게 있다. 예상보다 비싼 물건을 사면 사라져 버린 빵의 개수와 연관 지워 아쉬워했다. 시세보다 싸게 물건을 샀다면 덤으로 보태진 빵을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심지어 내게 있어 부의 상징적인 인물은 제과점 안에 있다.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제과점 안에서 집게를 들고 주저 없이 여러 종류의 빵을 바구니에 척척 담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눈빛으로 여지없이 따라간다. 따뜻한 실내, 맛있는 음식, 행복한 가족을 유리창을 통해 보며 정을 갈구하는 성냥팔이 소녀, 가격은 보지 않고 맘껏 빵을 담는 사람을 보는 내 눈은 성냥팔이 소녀와 닮은꼴은 아닐까.
미래의 경제적 여유는 반드시 현실의 가혹한 생활을 담보로 해야 가지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보니 같은 물건이라도 가격으로 매긴 등급을 따져 하위의 것을 고집스레 선택했다. 소비에 있어 그것만이 합리적인 가치기준이라고 눈을 막고 귀를 막으며 살았다. 지금은 생필품의 질을 조금 더 높여도 될 정도의 생활수준은 되는데도 오랜 세월 거슬러 만들어진 소비습관은 버리기가 수월치 않다. 이런 딸을 보고 궁상도 팔자라는 말을 엄마는 혀를 찼고, 난 검소함의 미덕이라 애써 항변했다. 풍파 잦은 인생길의 사업가 남편을 둔 부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유비무환의 정신이 잘못이냐고 당당히 맞섰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작은 돈 씀씀이는 관대한 편이지만, 큰돈은 궁해 자주 힘들어했다. 티끌모아 태산은 몇 번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라고 여겼다. 100달러를 벌기보다 1달러를 아껴 쓰는 것이 부자로 가는 지름길이라던 워렌 버핏의 경제관에 고개 주억거렸다. 저축 왕이라고 상까지 받은 탤런트 전원주도 그랬다. 안 써야 모인다고 부자가 되는 왕도는 따로 없다고 그러지 않던가.
하지만 융통성 없는 엄마처럼 아빠도 그런 부류였다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처럼 바르게 컸을까. 매사에 넘치는 것보다는 모자라게 해주는 게 자식들로 하여금 동기부여를 갖게 된다고 일부러 다그쳤다. 이런 내 눈을 피해 남편은 아이들을 몰래 데리고 나가 그들이 원하는 유명상표 옷, 신발을 사주곤 한다. 요즘 학생들은 유명상표를 걸치지 않으면 또래에게서 소외당한다는 현실을 난 속물이라 폄하했고 남편은 이해를 하는 편이다. 부족함을 느끼다보면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게 남편의 지론이다. 사방에 숨구멍 하나 없이, 송곳 하나 꽂을 수 없는 엄마의 마음에서 그나마 아빠는 아이들의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모든 현상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 지을 때 도덕책에 나오는 원칙을 추구한 편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혹독한 족쇄가 되는지 이제야 보인다.
눈물 젖은 빵을 운운하며 적빈을 겪은 자만이 진정한 인생을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인지 모른다. 내일의 행복을 담보로 한 오늘의 불행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카르 페 디엠은 내게 하는 말일지 모른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상류층 사람들의 식탁엔 신선한 샐러드와 갖가지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꽃들과 함께 놓여 있다. 위궤양 때문에 남편 눈치는 봐야 할 망정 오늘 저녁만큼은 우아한 사모님이 되고 싶다. 아파트 상가에 새로 들어선 파리바게트에 가서 모양도 예쁜 먹음직스러운 빵을 바구니에 맘껏 담는 호사를 누리련다. 아울러 시금털털해서 내 식성에 맞지 않는 와인이라도 한 병 추가로 사서 식탁 한 귀퉁이에 놓아둘까. 오호 통제라! 와인 잔이 없는 것을. (2009년)
P.S 5년전 이 글을 읽은 지인은 내 생일날 빵을 한 봉다리 사주었고, 서울서 빵집 하는 친구는 빵을 한 박스 (라면박스보다 큰) 보내왔습니다.
어떤 지인은 파리바게트에 차를 세우더니 "싸모님~~ 오늘만큼은 맘껏 누리소서"하더이다^^
첫댓글 저는 그 어떤 호사스러운 빵보다 파리바켓에서 나오는 작대기빵을 좋아합니다.
우리 동네의 경우 오후 서너시쯤 그 빵이 나오는데,
운이 닿아 그 시간에 수퍼라도 갈 일이 있으면 영락없이 그 빵을 사곤 한답니다.
아무런 꾸밈없는, 플레인한 그 빵이 저는 그렇게 좋더라구요.
혹 시간 되시면 두류공원 광장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 같이 해요.
갓 나온 바켓 사 들고 갈게요.
두류공원 광장 휴게실은 간이 휴게실이 많아서 정확한 주소가 없으면 못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지가 연전에 갔을 때는 바람 속에서도, 눈 속에서도 노인 남녀들이 자판기 커피 많이 즐기고 있었는데
거기서 어묵 한 그릇과 자판기커피 먹으면서 여자 꼬신 적이 있지요.
다음 주 좀 따끈한 날이 되면 저도 가서 아메리카노 한 잔 따근하게 사겠습니다.
작대기 씹으면서 아메리카노 먹는 것도 괜찬겠네요.
그러지않아도 선생님과의 두류공원에서의 조우 상상했는데..
워낙 날이 추워야지요^^
겉은 딱딱하지남 속살은 부드러운 바게트빵을 저도 좋아합니다
담주에 우리 한번 같이 걸으실까요?
목현님도 끼워서^^
시간 되시면 서울에 오세요
제가 맛있는 빵 대접할게요
글 좋았습니다
아이구~~빵복 터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팥이 들어간 빵을 억수로 좋아합니다.
물론 다른 빵도 좋아하지만요.
빵을 앞에 두고 냄새로 먼저 맛보는 황홀한 순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바구니에 척척 빵을 담는 호사를 마음껏 누리세요~~~
(누가 그러대요. 한 가지는 사치를 누리고 살아야 한다구요.
모 작가는고급만년필을 고집하고...이런 식으로요.
한 가지 사치 정도는 누리고 살아야 살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윤흥길이라는 소설가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읽은지 40년이 되네요.
주인공 안동권씨에게는 아홉 켤레 구두가 사치가 아니고 자존심이었지요.
맞아요~~
삶에 있어 한가지라도 통풍구가 있어야 세상 살맛 나겠지요
그래도 비싼 명품아니고 빵이니 다행인것 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현선생님 예전에 읽었던 윤흥길 소설 기억에 남네요~~
@촌아낙 네, 그러고 보니 자존심이 맞네요.
저도 자존심 하나를 세워야 하는데요......
저도 버릇이 그렇게 들어 씀씀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부족한 듯하게 살아야 제대로 올바르게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비여지니 앞에서는 꼼짝 못해요.
사달라는 말 안 해도, 심지어 괜찮다고 그만 두라고 해도
빵이든 옷이든 사주고 싶어 안달이죠.
그게 제가 누리는 사치랍니다.
아~~
제가 절실하게 바라는 노년의 삶입니다
내 자식들에게는 엄했지만 손주들에게는 무진장 퍼주는 할머니로 남는거~~
저도 그렇게 될수 있다고 위로해주세요. 갈잎선생님!!
늘 촌철살인의 동감의 위안~ 선생님 보고 많이 느낍니다
파리바게뜨라. 젤 싫어하는 빵집입니다.
제가 파악한 파리바게뜨는 서울빵 다르고 시골빵 다르며 우리 동네 빵 다르고 남의 동네 빵 다릅니다.
작대기빵은 바케트라 표기해 놓고, 우리동네 앞집은 2200원이고, 뒷집은 1800원 해서 지그재그입니다.
이 제과점은 골목골목 점포가 있어서 동네빵집 다 무너뜨리고 나서는 이제는 동네빵집보다 맛이 더
없어졌습니다. 팥빵 한 번 사 드셔보십시오. 팥 세 개 으깨 넣어놓고, 팔리지 않으면 점포 앞에 세일
하는데 우리 앞집 파리바게뜨는 네 개 묶어서 3600원. 그래도 안 갈 수 없는 현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값자기 팥빵 먹고 싶습니다. 시내 공주당에는 4개 2000원, 너무 단 것이 흠
네~~
기본적으로 단팥빵을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울 아들이 지네들 결혼해서 엄마 뵈러 올때는 단팥빵 가득 사다주면
아들노릇 하는것이니 얼마나 쉽냐는 겁니다
지금도 기념일 챙길때는 제과점 케익이나 던킨도넛을 잘 사들고 옵니다
언제 팥빵 앞에두고 삶의 지리멸렬함을 나누는 시간 가지도록 해요^^
제가 누리고 있는 한 가지 사치는 무엇이었던가 싶습니다.
삶이 밍밍하니 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빵 사랑이 유효하다면 저도 데이트 신청합니다.^^
옛날 학창시절처럼 제과점안에서 미팅 말이죠^^
전 좀 까져서 고등학교2학년때 벌써 앞머리 핑걸파마하고
시내 다방을 누비고 디제이들과 추억의 시간 많이 가졌었죠
덕분에 아버지한테 맞은적도 있고^^
@촌아낙 지송하지만 이 대목에선 안 웃을 수가 없습니더~~ 힛
침 좀 뱉은 아가씨? ㅎㅎㅎㅎ
@수국 껌 좀 씹었다고^^
그때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행동들을 일부러 하고 다녔어요~~
'부의 상징적 인물이 제과점 안에,
가격 보지 않고 마음껏 담는 사람이 그토록 부러울 수가.'
그러면서도 베풀기 할 때는 생각지도 않게 달려 와
화끈한 아이쓰크림이며 피자...
'전 좀 까져서...' 재밌는 표현.
허긴 가죽 점퍼가 어찌 저리 잘 어울리나 했었지.
날씨가 어제 오늘 많이 차네요
어찌 건강은 잘 챙기시고 계시는지요
지금 전 남편 사무실에서 회계장부 하고 있어요^^
너무도 자유스러운 프리랜서 직업 하나 구했습니다.
낼 뵐께요 선생님~~
시장이 너무 손님이 많아서 발 디딜 틈이 없군요. 쩝.
ㅎㅎ 선생님 빵은 가난을 말한 시골빵집이고
전 주부의 소비가치관을 말한 약간은 자본주의의 상징 파리바게트를 말해서 그런것 아닐까요
시대가 바뀌니 지금 세대들은 전통시장 운운해도
파리바게트나 맥도날드를 선호하지요~~
뭐 이런 횡설수설한 답글???
꽃 피고 새 울 때 두류공원 번개팅 한 번 합시다.
팥빵과 그냥 빵과 어울려. (나는 팥빵 싫어)
단내 나는 봄 공기 마시며 캔 맥주 한 잔 해요!
훈풍이 감도는 야외음악당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치킨 안주삼아 캔 맥주 마시는 그 시공간은 그야말로 죽음~~이지요
선생님~~예향식구들 봄에 이런 번팅 한번 가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