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발로 고백해야 할 분
- 황지원 신부-
수도자이면서 사제로 살아가다 보니 말할 기회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말하는 것이 너무 조심스러워 과연 제가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타협하게 되고 '비록 내가 다 살아가지 못한다 해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라며 합리화합니다. 그런 제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면,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어떻게 사람들에게 더 재미있게 말할까 고민은 하지만, 더 이상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마음은 더 탁해지고 말만 늘어난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문학적 특색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는 군중에게 숨겨진 채 공생활이 이루어지고, 제자들에게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정체가 군중 앞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니고 그분께 믿음을 고백하는 장면도 아닌 '더러운 영'의 입에서 발설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하느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영'이 입으로는 말을 더 잘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입으로 고백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고백해야 하는 분입니다.
얼마 전, 중학생 한 명이 제게 이러한 부탁을 했습니다.
“신부님, 개신교 신자들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 좀 가르쳐주세요.”
개신교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과 서로 자기 종교가 옳다는 식의 대화를 하게 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친구들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억울했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를 부탁했던 것이지요. 저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간단히 “열심히 교리공부 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학생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논쟁하지 말라.”
논쟁에 있어 승자란 없습니다. 그래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논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승리를 쟁취한다면 무한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벗을 잃게 되므로 그 승리는 곧 공허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의 주장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놓고 승리의 기쁨에 들뜬 기분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얻은 것은 일순간의 포만감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 뒤를 따르는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청년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그 식당은 음식 맛도 괜찮고 가격도 저렴해서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주문했던 음식 중 하나가 너무 타서 먹을 수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저희는 전화를 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으니 새로운 것으로 바꿔주거나 아니면 환불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 식당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히려 저희를 설득하려 했고, 결국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설득되는 과정 안에서 저희는 마음이 상하게 되었고, 다시는 이 식당을 이용하지 말 것을 서로 다짐하게 되었지요. 설득하였으니 이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과정 안에서 느낀 불쾌감 때문에 저희는 그 누구도 이 식당을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지요. 그런데 그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진실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설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논쟁을 곧바로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권위만을 통해서 더러운 영을 쫓아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 논쟁을 통해서만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권위를 통해서 문제의 해결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권위는 어떻게 생길까요?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 안에서 가능합니다.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한 모범만이 상대방을 진실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보수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일에 해당하는 보수밖에 얻을 수 없다(앨버트 하버트).
기도하지 않으면
- 김광태-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으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도 다급했기에 잠자리조차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엇박자를
일으키는 일이 여기에서도 엿보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놀라운 치유를 체험했으니 감사하는
마음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을 것이고,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는
말씀을 들려주는 그분 곁에 머물면서 오래오래 그 좋은 말씀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전해주러 예수님을 찾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여행이 너무 힘드니 좀 쉬었다 갑시다.’ ‘사람들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뭐 이런 게 아닐까요? 복음의 문맥을 보면
원인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일찍부터 외딴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몰려드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에 단잠을 깨자마자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일어나자마자 일단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그래야 허둥대며 세속적인 관심사에 휩쓸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먼저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권위
-김찬선신부-
권위주의는 몰아내야 하지만 권위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권위가 있는 사람과 권위주의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쉽게 얘기해서 권위주의는
권위를 고집하고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권위를 고집하고 집착합니까?
그것은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권위가 있는 사람은 굳이 권위를 집착하지 않음은 물론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자는 권위가 없기에 권위에 집착하고
권위를 가지고 권세를 부리려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힘입니다.
힘이 없으면 그 권위는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또한 힘 숭배자들입니다.
권력으로 재력을 얻고,
재력으로 인력(man power)을 사고,
인력으로 능력을 극대화하고,
이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권세를 유지하고 권위를 행사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자는 권세를 부리지 않고
권위를 행사하지도 않습니다.
권위의 근본은 힘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진리를 실천할 뿐이고
진리를 말함으로써 그의 권위가 드러날 뿐입니다.
그는 힘을 숭배하지 않고 사랑을 받들며
사랑을 받들기에 겸손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진리와 겸손과 사랑의 권위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거룩함의 권위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악마마저도 예수님의 이런 권위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악마마저도 하느님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뿐이고
거룩함은 하느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권위는 진리와 겸손과 사랑에 있어서 뛰어난,
한 인간으로서의 권위 정도가 아닙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입니다.
그런 진리,
그런 겸손,
그런 사랑의 권위입니다.
우리도 그런 권위를 지닐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첼레노의 프란치스코 전기를 보면
첼라노는 프란치스코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그런 권위를 지녔다면
똑같지는 않아도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그만큼
우리도 그런 권위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권위
-전삼용신부-
고대 그리이스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입니다. 그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보며 그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곳에 내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건설하여라.”
그렇게 해서 건설되었던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후에도 로마,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함께 가장 위대하고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말의 위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권위가 있는 말’은 그 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한 이들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는 달리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저 말이 내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서만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압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랬더니 기리기리 날뛰던 마귀는 그 사람에게서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이것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랍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면 마귀도 저항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말씀에 그런 권위를 지니시게 된 것일까요? 말씀에 권위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말씀에도 하느님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는 그 행실로 드러납니다.
제가 어떤 신학생이 너무 게으른 것 같아서 좀 부지런해지라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하루에 6시간도 안자는 사람이 많다. 너는 사제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무질서하게 산다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니?”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산다는 것을 알까요? 강론 대에서 좋은 말만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네 삶과 반대되게 가르치겠다는 거야?”
“올바른 가르침만 주면 되죠.”
물론 저의 간섭이 싫어서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강론 대에서 위선적으로라도 감동적인 강론을 해 주면 신자들의 삶이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이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 말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이 일어나게 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 분은 먼저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당신 자신이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은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이 매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고, 당신들은 텔레비전만 보며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왜 안 하냐고 호통을 친다면 그런 말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권위는 ‘성령’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어느 정도 충만해 있느냐에 따라 그 말과 행동에 권위가 드러납니다. 세상이 주는 학위나 세상적인 명예로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위선적 권위만을 내세울 수밖에 없고 어떤 때는 자신들이 존경받기 위해서 매우 ‘권위적’으로 변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과, 마더 데레사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과, 우리 보통 사람이 말하는 것과 또 미움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모범을 보이신 분의 말만이 권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권위가 있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화법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한 마디만 해도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선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불쌍한 빙어들>
-양승국신부-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일하는 형제들과 소풍을 나왔습니다. 집에 남아있는 후배 회원들이나 직원들에게는 미안한 나머지 그럴듯한 핑계로 "평의원 연수"라고 이야기하고 공동체 게시판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처음 출발할때는 "시커먼 사람들끼리 소풍가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하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나오니 이렇게 한번 같이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형제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오면서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지요. 불쌍한 빙어들을 안주 삼아 걸쭉한 좁쌀동동주를 들이키면서 나누는 형제애는 참으로 돈독한 것이었습니다. 함께 사우나에 들어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아무리 경관이 좋은 곳이라 한들 혼자 온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술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마신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에수님께서는 한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령을 몰아내십니다. 악령을 몰아내심을 통해 한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오늘 악령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시대 악령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이 시대 악령은 더 이상 거품을 문 소름끼치는 악령,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으시시한 악령이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악령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 시대 가장 더러운 악령은 나만 혹은 내 가족만, 우리 공동체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생각, 나만이 이 일의 적임자라는 생각,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된다는 꽉 막힌 생각이말로 이 시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할 때, 물론 일의 진척이 더디고 답답하겠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시대는 대화와 타협의 시대입니다. 좀 느리고 속상할지라도 이웃과 보조를 맞추어 함께 걸어가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함께 일할 때, 함께 나아갈 때 의견이 분분하고, 일의 진척이 신속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모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이기심이나 욕심, 지나친 성취욕구를 가라앉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이웃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인내하고 희생하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예전의 저는 골초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많이 담배를 피웠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세 갑 정도를 피워댔으니 얼마나 피웠는지 아시겠지요? 한 갑에 20개비가 들어있으니, 세 갑이면 60개비가 되겠지요. 그런데 잠자는 시간 8시간을 빼면, 16시간 동안 60개비를 피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1시간에 3~4개비의 담배를 피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랬던 제가 담배를 끊은 지 벌써 햇수로 8년째가 되었으니 신기하지요?
그 당시에는 습관적으로 담배에 저절로 손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담배가 없으면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중독이 아닌가 싶네요. 이러했던 제가 문득 담배에 의해 내가 구속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싫어서 8년 전에 독한 마음을 갖고 담배를 끊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한 번의 습관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 가지 동작만 계속 하게 되면 한 가지 근육만 발달하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들은 이렇게 잘못된 습관에 얽매여서 계속 반복해서 행하게 되고, 이로써 나의 잘못된 습관을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는 담배만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습관, 선을 행하기보다는 죄를 범하는 습관 등등. 이러한 습관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점점 부정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화를 자주 내고 불안한 감정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은 습관은 어떨까요? 이 역시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발달되어 나를 이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평화와 행복 속에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들은 습관적으로 가르칠 뿐이었습니다. 조상님들의 전통을 따른다는 이유로 선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반복만 하는 나쁜 습관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규정만을 지키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법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권위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단순한 명령어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큰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인 것이지요.
우리들 역시 율법학자들처럼 과거의 잘못된 습관만을 반복해서 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대신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좋은 습관으로 하느님의 큰 힘이 내 안에 작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주위에 더러운 영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결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남의 결점에 대해 잔소리를 하거나 추궁하는 일이 결코 없다.(사아디)
참된 권위
-오기백 신부-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과 확신이 가득찬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와 사회적 위치와 신분에 의해서 하는 이야기는 너무 다름을 우리들은 잘 압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이야기니까 들어야 한다”든지 “선생님의 말이니까 잘 들어야지” 하는 말들을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쉽게 듣곤 합니다. 그런 말들은 말에 담긴 진리로 설득을 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지와 신분으로 설득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말을 듣게 되는 상대방을 똑같은 동등한 처지로 보지 않고, 그의 말을 복종해야 하는 대상으로 봅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의 권위의 핵심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며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직자, 수도자 등 권위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고유한 속도에 맞추어
- 조정희 수녀-
얼마 전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교육분과 연수가 있었다. 거기서 ‘핀란드 학교교육’에 대한 취재 내용을 보았다. 맨 먼저 내 마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핀란드의 교육 목표였다. ‘학교교육에서 뒤떨어지는 학생이 없게 하는 것’이 국가 수준의 교육 목표였다. 그에 따라 국민들의 경제·문화적 차이에도 고른 교육 기회를 통해 대학교까지 무상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실 안에서도 전체적인 수업을 하는 선생님과 함께 속도가 느린 학생에게 맞추어 지도하는 다른 선생님이 계셨다. 그래서 학생 개인의 수준에 맞게 배우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지 못한 우리 학교 현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 결과 국제 교육 성취도 평가에서 핀란드 학생들은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취를 보이며 전체적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편차가 심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행복하게 배우며 가르치는 핀란드의 학교가 내게는 참으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의 현장으로 느껴졌다. 비교에 의해 속도가 빠르고 느리다고 하기보다 각자의 고유한 속도가 존중되고 받아들여지는 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획일적인 잣대로 줄 세우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며 모두를 살리시는 데서 우리의 온 존재에 감동을 주는 권위를 지니신 참 스승님, 이제 그 뒤를 따르는 우리가 한 걸음씩 작지만 귀한 걸음을 내디딜 때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느 날 독수리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여우가 나무 위의 둥지로 기어올라 알들을 죄다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꾀바른 여우는 둥지에서 내려오기 전에 근처 덤불에 주워 온 양털을 흩뿌려놓았습니다. 독수리가 돌아와서 빈 둥지를 보고는 노발대발했지요. 애지중지 품고 있던 알을 어떤 불한당 같은 놈이 모조리 먹어치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위에 나뒹구는 양털로 보건데 범인은 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탄 독수리는 괘씸한 양들의 새끼를 낚아채 골짜기에서 내동댕이칠 심산으로 즉각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계곡으로 급강하하려는 순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독수리는 별 수 없이 계획을 이튿날로 미루었습니다.
둥지로 돌아온 독수리는 화를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양이 무슨 재주로 높다란 둥지까지 기어올랐으며, 더욱이 그렇게 대담한 짓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풀 뜯어 먹는 양은 봤어도 새알을 집어삼키는 양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또한 주변을 봐도 양의 발자국은 찾아낼 수 없었고, 대신 여우의 발자국만 또렷이 볼 수 있었지요.
그제야 독수리는 교활한 여우의 속임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잠시 눈이 멀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지요. 독수리는 때마침 짙은 안개가 끼었던 것을 감사히 여기며 앞으로는 행동하기 전에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만약 안개가 끼지 않았더라면 독수리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양을 공격했겠지요. 그리고 애꿎은 양만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안개를 통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고, 그래서 보다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생각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많은 이들이 성급하게 판단하게끔 만들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이렇게 성급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마귀의 유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회당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요? 틀리는 말일까요? 100% 맞는 말이지요.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마귀는 거짓만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마귀의 말이 아니라, 천사의 말인가요? 아닙니다. 마귀는 진리를 가지고도 성급한 판단으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부각시켜서 오히려 하느님의 큰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의도를 아시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뻔 하게 보이는 거짓만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합니다.
새벽을 열며
쉽게 말하기
-박영대-
내 삶에서 가장 큰 스승은 부모님과 호인수 신부님이다. 세 분 모두 말이 아니라 당신 삶으로 나를 가르치셨다. 호 신부님은 글이나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특히 어려운 글이나 말은 더욱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또 어렵게 말하는 건 자기도 몰라서 그런 거라고 하신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되도록 쉽게 쓰고 말하려고 애쓴다. 그러려고 공부한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사명선언문은 이렇다. ‘우리는 이 시대 한국인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간다.’ 우리신학을 한다는 건 이 시대 한국인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기 위해서다. 알아듣기도 어려운 얘기를 살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평생을 우리말글 살리기에 바치신 이오덕 선생은 우리말글을 더럽힌 게 지식인이라고 했다. 지식인의 말글이 삶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말이 어려워지는 건 삶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쉽다. 우리말글을 살리려면 입말을 살려 써야 한다는 게 이오덕 선생의 주장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남더러 살라고 하면 거짓이다. 그 거짓을 숨기기 위해 말이 어려워진다. 날이 갈수록 교회 말(교리)과 신학이 어려워지는 것도 교회 스스로 그리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
-오상선신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랑이 멀어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하신 예수님을 잊어먹게 되었다는 말이고,
이는 반대로 우리 교회가
가난하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한 이웃들도 외면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무관심은
우리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간다.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아파트 문화생활 가운데서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오늘 마귀는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예수가 누구신지 명확히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아무런 관심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나와 예수님과는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면서
베드로의 사양을 질책하시면서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그렇다면 발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청하였다.
예수님과 나와 관계가 있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
그 거래는 섬김과 봉사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분의 섬김을 받은 나이기에
나 또한 이웃을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기는 거래가 맺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인 동시에 맏형님이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과의 형제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기에
우리 또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와는 형제성을,
하느님과는 자녀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그분과의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관계성은
같은 동료 인간들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과
같은 피조물인 자연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오늘 마귀가 고백한 대로
우리는 참으로 주님과 묘한 관계에 놓이고 만다.
아무 상관이 없게 될 수도 있다.
비록 우리가 그분에 대한 지식은
마귀 못지 않게 하루하루 늘어간다손치더라도...
가끔 굿뉴스 게시판에서
우리는 국내외 우리 한국인 본당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형제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형제들을 비난하는 어조의
신보수주의적 사고도 눈에 띈다.
이러한 자세는
마귀의 지식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 뿐
그렇다고해서 주님과 진실한 관계에
우리를 놓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참된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동료 신자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갈라진 형제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짓밟힌 피조물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과 정말로 상관있는 사람이 된다.
이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최대 목표를 이 형제성 회복에 두면 어떨까?
내가 가장 최우선 관심을 가져야 할 회복 대상은 누구인가
오늘 힘있게 되물어보자!!!
나쁜 생각 몰아내기
-오상선신부-
늘 맑고 고운 생각으로만 살아가고픈데
그게 어디 쉬운가?
내가 바라지도 않는데
나쁜 생각, 미운 생각, 분한 생각 등이 때론 나를 엄습한다.
그러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나를 보면 참으로 싫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사고에서 떠날 수 있을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예수님의 방법을 배우자.
예수님의 악령을 몰아내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그래 나도 때론 이렇게 단호해야 한다.
내 안에
나쁜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을 즐기지 말고
<나에게서 떠나거라!> 하며 호통을 쳐야한다.
때로 다른 형제자매들에게서 이러한
나쁜 생각, 나쁜 감정들이 이는 것을 볼 때도
<그 형제에게서 떠나가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요즘
<좋은 생각>이란 잡지가 인기가 많다.
매일 좋은 생각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나쁜 생각이 자꾸만 끼어드니
우리의 영혼이 맑을 수가 없다.
오늘
이 놈의 나쁜 생각, 나쁜 감정이
슬그머니 내 안에서 일어나면
예수님처럼
한번 해보자.
<야, 좋은 말할 때 빨리 나가!>
가능한 빨리 몰아내자
그리고 좋은 생각으로 나를 다시 채우자.
다른 형제 자매에게서
이러한 나쁜 기운을 발견하게 되면
그 형제 자매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 형제 자매가 나빠서가 아니라
나쁜 기운(악령)이 그 형제 자매에게 스며 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형제, 그 자매에게서
그 나쁜 기운을 몰아내 주는 것이지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형제, 그 자매를 위해서도
<야, 그 형제에게서, 그 자매에게서 어서 나가!>라고
대신 고함을 질러주자.
그게 참 사랑이고, 참 기도가 아니겠는가?
악마의 기도
-이중섭 신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첫 제자 네 명을 부르신 다음에 하신 첫 번째 행동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자기과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표징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알았기에 그분을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마르 1,24).
사람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데, 악마는 그것을 벌써 알고신앙고백까지 한 것입니다. 악마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그저 하늘에 계십시오. 그 대신 제 이름이
거룩히 빛나며, 제 나라가 임하며,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이 악마의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실제로는 악마의 기도를 바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란 악마의 기도에서 주님의 기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신앙고백까지 하더라도 참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악마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로 초대하시는 분
-구요비 신부-
신학생 시절, 방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오면 동창생들이 함께 모여 방학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 번은 시골 본당 출신 친구가 겨울방학 동안에 마귀 들린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본당에 마귀 들린 여자가 있어서 많은 교우들이 기도해 주려고 갔는데 이 여인이 메가톤급 신자들의 비리를 폭로해 모두를 혼비백산시키고 본당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동창생이 방학을 지내러 내려가니 신자들은 크게 반기며 “우리 학사님이야 순결한 분이시니 마귀 들린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지!” 하더란다. 다음날 신자들과 함께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다. 신자들이 여인에게 신학생이라고 소개한 후 함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내내 이 마귀 들린 여인이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무슨 비리를 찾는 것 같아 두려운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그 여인이 마귀에 사로잡힌 부마자였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 가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 안에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는 하느님의 빛과 은총이 역사하시는 반면에 이에 저항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신다.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6절).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는(22절),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심을 단지 말로만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악의 세력과 싸우기까지 하심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의 신체적 병만을 치료해 주시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병인 죄까지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사로잡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구마자이시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 방삼민 신부-
어느 풋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개업 첫날이었다. 손님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옳지, 이제야 손님이 오는구나. 첫손님이니 내가 꼭 사건을 맡아야지.’ 이렇게 생각한 변호사는 어떻게든 손님에게 신뢰감을 줄 양으로 개통도 되지 않은 수화기를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애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일감을 맡고 있는지를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님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온갖 제스처를 다 써가며 더 큰 소리로 지껄였다, “사실 맡은 사건이 많아 요즘 제가 무척 바쁩니다. 오늘 아침에도 손해배상소송사건을 의뢰해온 분이 계신데 일이 밀려 제가 거절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일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제가 맡아 드리겠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른 손님이 오셔서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변호사는 손님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손님은 무슨 사건으로 오셨죠?” 그러자 손님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이어 드릴려구요.” 전공은 아직 개통하지 않은 전화기의 선을 찾아 잇기 시작했다. 방금 그 변호사가 들고 지껄였던 전화기였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은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드려내고 자랑하려고합니다. 말하자면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특히 요즘 같은 상업화된 사회일수록 과장된 홍보와 말들이 넘쳐납니다. 홈쇼핑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말들을 잘 하는지 금방이라도 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게끔 만듭니다. 또 각종 홍보물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쏟아지는 전단지, 각종잡지, 인쇄물들이 넘쳐나 제 같은 경우엔 책상이 어지러운 건 물론이고 봉투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다합니다. 무슨 하고 싶은 말들이 그리 많은지요.
저 역시 매일미사 강론을 합니다만 어떤 때는 잘 준비되지도 못한 강론을 하면서 마음에 와 닿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말을 하고 살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함을 생각할 때 그 강론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없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역시 말의 힘은 행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나 “아직도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누지 않아서 입니다.”라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 등, 유명인사나 위인의 금언을 들을 때 가끔은 “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데”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지요? 그렇다면 누구나 깊이 생각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오늘날까지 “누구, 누구의 금언”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멋진 말을 남겨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말을 평생 삶으로 살아 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어서 악령까지 굴복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예지의 능력이 있는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고 발작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초월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더 두드러집니다. 악령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 주시는 모습에서부터 비롯하여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는 등 수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광경은 예수께서 얼마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가를 여실히 보여주시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지도자와 억박 지르고 허세 부리는 지도자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세와 권위주의에 찬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당신의 삶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빈말이나 겉치레가 아닌 진실된 삶의 자세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
- 이찬홍 신부
강론시간이 가요 톱 텐이나, 뮤직뱅크 시간이 아니데, 요즘 들어 가요를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안치환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람의 꽃보다 아름다워”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하아 햐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런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장미, 백합, 극락조, 초라한 잡초라 하더라도, 그 꽃이 저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노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소중함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존재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함, 가치를 따진다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우월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최고요, 중심이기에 자연과 다른 창조물들을 훼손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고’란 의미는 지배 피지배의 개념이 아니라, 소중함의 의미입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숨결, 넋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떠나거라.” 꾸짖으시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치유해 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묵상하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외침이 마음에 남습니다.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 곧 마귀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상을 갖고 있고,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는 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도 예수님에게는 소중한 존재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에도 예수님께는 그러한 존재이기에… 구원의 대상이기에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자신과 이웃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안겨준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또한 시편 저자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인간을)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꽃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다짐을 드리며 새롭게 시작되는 연중 시기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새’란 노래를 잘 알고 계시지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사 몇 구절이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픈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제 안을 들여다보면 어찌 그리도 많은 또 다른 내 모습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수만 가지의 모습의 제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때로 저도 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선량하지만 때로는 악랄합니다. 때로 순수하고 감성적이지만 때로 그렇게 교활할 수 가 없습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로 살았습니다만, 때로는 보기만 해도 흉한 악령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라도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았는가 하면, 지옥 불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죄 중에도 살았습니다. 그 수만 가지 모습 때문에 방황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온 제 인생인 듯합니다. 그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참으로 딱한 한 인간을 만나십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이었습니다. 보통 악령이 아니라 지독한 악령이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스스로를 한번 통제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일이 다 허사였습니다.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악령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맙니다. 악령의 활동이 잠시 중지될 때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요.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자신이 악령에 사로잡혀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죽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본인이 느꼈던 스트레스도 컸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옆에서 느끼는 고통도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무서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들도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도움을 주던 친구들도 떠나갔습니다. 이제 혼자가 되어 정처 없이 전국산천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이 오늘 주님을 만납니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존재로 인해 고통당하는 영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영혼, 하루 온종일 악령에 시달리는 가련한 영혼 앞에 주님의 발걸음이 멈춥니다.
우리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 분명히 악에로 기우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악으로 인도하는 흐흐름이 있습니다. 그 세력이야말로 이 시대 악령입니다. 성령에 반대되는 악령, 불결한 영, 사악한 영입니다.
그 악령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우리를 괴롭힐까요?
악령은 타락한 하느님의 영입니다. 겉은 그럴 듯합니다. 머릿속에는 천사의 지식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식별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을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입니다. 인간의 시선을 흐리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을 잃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금하고 계시는 행위를 하도록 자극합니다.
이런 악령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령의 이 말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방어의 수단으로서 나온 말입니다. 비록 타락한 영이지만, 하느님을 거스른 영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영이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악령이 하느님 앞에 서 있자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의 찬란한 성덕 앞에 격분한 악령은 아직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될 예수님의 신원을 재빨리 폭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좌절케 하려고 기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각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령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악의 세력은 순식간에 우리 인생을 점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이 하느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흘러넘친다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성령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악령의 지배를 받고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은 악령을 내쫒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때로 설명하기 난감한 것이 악령이란 존재입니다.
이 시대 악령이란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 악령이란 무엇보다도 하느님 반대편에 선 존재, 정면으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존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서 있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도록 하는 존재, 그래서 결국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존재가 악령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 악령의 구체적인 모습은 영화 "엑소시스트"나 "드라큐라"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괴물 형상을 띠는 존재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내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억에로 기우는 성향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를 악에로 끌고 가는 그릇된 습관들이나 우리가 과감하게 결별하지 못하고 늘 끼고 살아가는 왜곡된 삶의 성향들은 악령의 한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악령은 우리의 노력으로 개선되고 변모되어져야 할, 우리의 덕과 선으로 채워져야 하는 우리 자신 안의 결핍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악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왜 저런 인간을 만드셨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정도로 극한 악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인간들, 그래서 전혀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악함은 우리 자신들 내면에도 잔뜩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과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악령을 몰아내시고 한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그분은 어떤 열악한 상황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악한 인간도 단죄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의 회개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지독한 악령에 들린 사람도 당신 자비로 치유하시어 그를 새출발하게 하시는 창조의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뭐라고 하실까?
-상지종신부-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우리를 경시하는 사람들은 예수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쟁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이 누구냐? 그리스도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누구라고 설명하시겠는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이, 악령에게서 예수님이 누군지 듣게됩니다. 물론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답을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님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누구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이나 글 안에 가두어놓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악령은 정답을 말했고, 그만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악령에게 내려진 예수님의 명령은 단호합니다. "잠자코 그에게서 떠나거라." 예수님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던 악령은 왜 이처럼 치욕적인 명령을 들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악령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분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령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망치려는 훼방꾼이요 자신을 제거하러 온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대들고 싸웠을 텐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힘없이 물러나고 맙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한 마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만으로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삶의 힘이 될 수도 있고,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다가오시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힘이 되느냐 아니면 병이 되느냐는 우리의 삶에 달려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저는 예수님 당신을 압니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벗으로 받아들이실 지 아니면 ’입을 다물고 물러가’라는 참으로 당혹스런 명령을 내리실 지를 자신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에 맞추어 가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과연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묵상하면서 보내시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생활을 추슬러 좀더 거룩하게 우리의 근원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복음선포의 항해
-박상대신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체없이 그분을 따라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로서 시몬과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그들이 고기를 잡는 배와 그물은 버렸지만 사람을 낚는 배에 올랐다. 배의 이름은 ’복음선포 호(號)’이며, 선장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선원들이며, 목적지는 하느님나라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복음선포의 항해(航海)를 시작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항해 첫 하루의 일과를 들려준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복음선포 호가 가파르나움에 도착하였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예수께서 첫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보낸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일컬어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 라고 한다. 안식일에 먼저 회당을 찾아가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회당에 있던 악령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회당을 나와 시몬의 집에 들러 열병으로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해 주셨고, 문 앞에 모여든 온갖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이튿날 새벽에 홀로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다음 선교 장소를 향하여 닻을 올리시고 돛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루는 이렇게 흘렀다. 물론 안식일 하루에 이 많은 일들을 수행했다는 점이 다소 과장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안에 마르코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활약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 생애가 하루로 요약된 것인 셈이다.
예수께서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가파르나움의 회당(會堂, Synagogue)에서 시작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고 유배생활을 시작하던 때부터(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여 곳곳에 지어진 회당은 유다인들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회당에 들러 기도하였으며, 안식일에는 모두가 회당에 모여 야훼신앙을 고백하고, 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그 내용을 설교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오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의 가르침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가르침의 권위에 놀라버렸다. 그 가르침의 효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경과 예언서를 바탕으로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가르치는 율사들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의 권위는 오히려 악령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예수는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으나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악령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이는 믿음의 순종이 아니라 두려움의 복종이다. 따라서 사람들도 악령도 모두가 아직은 암흑 속에 있다. 진정한 믿음의 순종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복음선포의 항해는 계속된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마르 1,21-28)
-유 광수신부-
그들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 보았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라는 반응과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이다. 이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인가?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가?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인가?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보라.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네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 멋 대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놀랬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생활도 늘 새로워지고 풍요로워 진다. 그런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슨 뜻인가?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디다케’(Didache)라 하고, 라틴어로는 ‘독트리나’(Doctrina)라 한다. 이 말은 ‘가르침, 교훈, 원리, 원칙’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원칙이 있다. 식물이면 식물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고 동물은 동물의 원칙이 있다. 기차는 기차의 원칙이 있고 자동차는 자동차의 원칙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사고가 난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 원칙은 하나의 질서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개성이고 특성이다.
이런 원칙이 무시될 때 혼란이 오고 불행해진다. 인간 최초의 불행은 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그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불행이 온 것이다. 이제 원칙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은 바로 이런 원칙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권위를 갖고 가르쳐 주시는 새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더러운 영을 내 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에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도와 줄 수 없다. 오로지 하느님이 말씀만이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권위 있는 새로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빛이 들어가면 어둠은 물러나는 법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은 물도 따뜻한 햇빛이 들어가면 녹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다. 그 더러운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생각들이나 사고들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그 가르침을 듣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깨닫고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내 안에서 널리 퍼져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앞으로 이 새로운 가르침이 점차로 퍼져 나가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전해 줄 것이다. 마치 마른 사막에 물이 흘러 들어가서 생기를 되찾아 주듯이 새로운 가르침이 내 마음 안에 놀라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또 귄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많이 건설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