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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묵상글 ( 연중 제8주간 금요일. - 저주받는 나무와 축복받는 나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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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저주받는 나무와 축복받는 나무
오늘 주님 모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 분이 과연 주님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당신이 시장하신데 열매 맺지 않았다고 죽으라고 저주하시고,
성전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난폭하게 쫓아내십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 맞습니까?
이런 주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이런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분명 시험하고,
주님의 이런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많이 생각게 합니다.
우선 주님은 우리처럼 당신 입맛에 맞지 않아서 이러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어야 하고, 더 나아가 이런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가르침 주시려고 이러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약 아무도 없이 당신 혼자셨다면 이러셨을까 우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라고 분명히 얘기하는데
이를 보면 제자들이 들으라고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우선 성전의 주인도 주님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도 주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천명하시고 알게 하시려고 이리하신 것일 겁니다.
두 번째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나 성전은
이런 운명이 될 거라는 경고의 뜻으로 이렇게 하신 것일 겁니다.
복음 다른 곳에서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주인이 베라고 하시자
나무 재배인이 주인에게 정성을 들여 더 가꿀 테니 한 해만 말미를 달라고
할 것이라는 비유를 주님께서 들려주시는데 여기서 나무 재배인은 주님이시지요.
그러므로 복음서 전체적으로 볼 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없어질 운명이지만
주님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도록 정성을 들이는 분이시고,
정성을 들이셨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열매를 맺기를 원하실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회개의 열매란 어떤 열매입니까?
사랑이고 선행일 것이고,
사랑과 선행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를 맺는 나무였습니까?
지금 우리로 치면 우리의 성당들은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입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꾼과 도둑들이 설치는 곳이었고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 성당이나 공동체도 주님 사랑을 나누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들의 물건을 사고팔고 이익이나 나누는 곳이라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고 주님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열매 맺는 나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이란 회개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그러면 오늘 복음의 나무처럼 저주받지 않고 축복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자신들의 육신을 그 악습과 죄와 더불어 미워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오, 그런 일을
실천하고 그런 일에 항구하는 남녀들은 얼마나 복되고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주님께서는 불행해지라고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치 않으면 불행해질 거라고 경고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지만
혹여 저주나 경고나 받고 축복은 받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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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마르 11,17)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라고 말씀하신 곳이니, 당신 이름과 함께 현존하신 그분을 만나고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할 때 교회다워진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성전인 우리는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마르 11,17)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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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슨 숨은 뜻이 있지 않겠나?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평상시의 삶을 볼 때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한마디 던지는 소리가 영 비위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무슨 의미를 담고 그런 소리를 하였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숨은 뜻을 찾아내면 오해와 속상함을 넘어 기쁨을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11,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존중되었습니다. 평화와 안정, 번영의 표징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꽃 피고 수많은 열매를 맺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해 주는 것으로(요엘2,22 ; 하깨 2,19), 반면에 메마르고 열매 맺지 못함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습니다(예레5,17. 8,13).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열매에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걸맞은 결실을 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구체적으로는 성전과 율법학자나 수석 사제,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잎은 무성하여 열매가 있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사라지듯이, 자리만 차지하고 세상과 타협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우대는 멀쩡하나 껍데기만 남아있는 하느님 경신례와 각종 행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의 겉은 화려하게 꾸몄으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현존을 보여주지 못하는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마르11,15). 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고 힘이 있는 듯이 행동하였지만, 하느님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였으니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이 성전이라 해도, 비록 그가 하는 일이 합법적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강도일 뿐입니다. 여기서 ‘강도’는 칼을 든 개인 강도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 특히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 권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강도의 소굴을 다시 ‘기도의 집’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돈벌이와 탐욕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우리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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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뭄 끝에 단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갈라지는 땅에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땅에 사는 생명에게는 ‘생명수’와 같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뜨거운 모래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에게 신기루가 아닌 오아시스는 생명의 물입니다. 그 오아시스에서 몸을 추스르는 상인은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가뭄 끝의 단비처럼,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처럼 제게도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잡지입니다. ‘사목정보와 꿈’입니다. 사목정보는 미래사목 연구소에서 발행합니다. 꿈은 월간 꿈(CUM)에서 발행합니다. 사목정보는 사목자들에게 유익한 글들이 많습니다. 꿈은 신앙의 여정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글들이 많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신앙의 여정을 함께하는 분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되면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지친 이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위로와 힘을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웃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목정보에 실렸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부님은 봉성체를 가는 길에 냉담교우를 만났습니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냉담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판공성사 중에 전임 신부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고 그것이 상처가 되어 냉담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습니다. ‘제가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님은 ‘신부님께서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이제 성당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성당에 나왔습니다. 신부님은 본당사목지침도 정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평일미사 참례, 15분 성체조배, 성경통독, 쉬는 교우 찾기, 매일 복음 말씀 한 구절 기억하기, 탄소 중립을 통한 생태 질서 회복’을 정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유트브를 운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입소문이 나서 30,000명이 넘는 분들이 신부님의 강론을 본다고 합니다. 유트브의 수익금으로 기쁜 날 신자들에게 고기를 사드리기도 했습니다. 남는 수익금은 모두 장애인 시설에 기부하였습니다. 냉담자들은 성당으로 돌아오고, 팬데믹으로 성당을 떠났던 신자들도 다시 성당을 찾았습니다.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강론’이라는 신부님의 이야기가 제게는 ‘죽비’가 되었습니다.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사목하는 본당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말씀의 씨앗을 충실하게 뿌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결실을 맺어 주시시라 믿습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전국공용 교구사제 특별권한’을 받았습니다. 이는 1986년 한국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한국 같은 일일 생활권에서는 타 교구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때 따로 신청을 하지 않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타 교구에서 미사를 봉헌하려면 관할 교구에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에서 서류를 부르클린 교구로 보냈고, 부르클린 교구에서는 제가 2024년까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 사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으로 사람들은 치유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전해주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은 한 없이 약하고, 순결하신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겸손함과 정결함,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였으며, 그분의 권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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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상에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풍요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020년 조사를 보니 기아 인구가 전 세계에 자그마치 8억 1천만 명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인구 5명당 1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돌보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과 제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 옷을 나누어줄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달라고만 청합니다. 여기에 자기의 어려움마저 해결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전에, 하느님의 도구답게 살고 있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데, “제가 바빠서요.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저한테 뭐 해 준 것이 있나요?” 등의 말을 하면서 손이 되기를,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과연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께서 마침 길가에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십니다. 그 열매는 시장기를 끄기에는 충분치 않았겠지만, 허기를 잠재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열매를 기대했는데,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열리는 과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가갔을 때 그 잎이 무성했다면 이미 열매가 맺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열매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나무이지요.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우리도 열매 맺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원하셔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인데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계속 의심합니다.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으며 자신이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가 되어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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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고 빼어난 것들 때문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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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열매, 성전, 기도, 용서-
어제 모처럼 크게 화를 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하고 황당한 전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자매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상인줄 알았는데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신분열 환자였습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과대망상, 정신분열 현상임이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를 낼일이 아니라 강력히 치유를 권할 내용입니다.
요즘 정신질환 환자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주변에서 자주 발견되는 우울증 환자들입니다. 자연과 날로 멀어지고 관계 불통으로 인한 원인이 크겠습니다. 정말 공부의 유무, 학식의 유무를 떠나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어느 자리에 살던지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진정 건강한 삶이겠습니다.
어제까지 퇴계평전, 율곡평전, 다산평전을 다 읽었습니다. 두고두고 읽을 평전입니다. 참으로 일류의 선비는 일류의 시인이자 성인이요 소통의 사람,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세 대학자 선비는 정말 온전한 참 사람의 전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럽고 감동적인 점은 이분들에게 한시로 나누는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깊이 공감하는 진실하고 담백하게 자연스런 한시로 나눈 대화였습니다.
어떻게 온전한 참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또한 평생여정이자 평생과제입니다. 결국 믿는 이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하느님의 자녀가,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평생 수행과 훈련의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바로 저는 오늘 복음에서 참사람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제1독서 집회서도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권하며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간단히 서술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존재감없이 살다가 사라져갔겠는지요. 요즘도 꿈과 희망을 잃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로 불행히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반면 훌륭한 삶을 살았던 이들 또한 많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개가 집회서 다음에 나오지만 미사독서에는 소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행적이 잊히지 않았다. 그들의 자손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그들 때문에 그 자녀들도 그러하리라.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교회의 자녀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한 참나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새삼 2천년 거룩한 전통에 무수한 성인들을 지닌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늘 보고 배울 삶의 좌표로 삼을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후 하루 삶의 일정을 통해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열매를 맺어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말라 버린 무화과 나무의 예화가 나옵니다. 바로 적대자들은 물론 제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함입니다. 나뭇잎들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언행불일치의 사람들,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무책임한 사람들에 대해 주님은 열매를 맺으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열매 “실(實)”자가 들어가는 말처럼, 바로 하루하루 사랑의 섬김과 책임을 다하면서 진실(眞實)하게 성실(誠實)하게 충실(忠實)하게 절실(切實)하게 주님께 불림받은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결실(結實)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비상한 열매들이 아니라 나다운 삶의 열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하고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한결같은 삶에서 자연스런 삶의 열매, 사랑의 열매이겠습니다.
둘째, “성전을 정화하라!”입니다.
보이는 성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속해 있는 우리 하나하나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나를 성령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며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두 비유 사이에 위치한 성전정화 사건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가시적 성전이 속화와 부패와 타락이라면 거기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거룩한 성전이 속화되어 있다면 각자의 성전도 속화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거룩한 공동전례가 이뤄짐과 동시에 각자의 성전도 정화되고 성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거룩한 공동전례는 물론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며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의 인도따라 경청의 분위기에서 거룩한 미사전례 참석은 물론 기본 수행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기도하라!”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될 위험이 다분합니다. 기도와 삶이 함께 가듯, 기도와 믿음도 함께 갑니다. 기도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믿음의 훈련과 습관도 절실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와 믿음입니다. 기도의 힘,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인 주님을 만나야 주님과 소통해야 비로소 온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성전정화 사건이 이어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받은 줄로 여겨라.”
아무것이나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정말 꼭 필요로하여 청할 것은 성령이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알 수 있는 지혜이겠습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튼튼한 믿음에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기도라면 그대로 응답될 것입니다.
넷째, “용서하라!”입니다.
서로 살기위해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우리도 주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연민과 배려, 존중과 배려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사랑의 용서입니다. 새삼 용기있는 행위가 용서요, 용서도 부단한 의식적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서로 용서를 통해 화해하고 소통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아, 이런 용서의 훈련과 습관에 앞서 부단 회개의 훈련과 습관이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정말 나부터 살기위해 의식적 회개와 용서가 필수입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한다고 고백하며 일단 던져놓고 보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용서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까?
평생은총과 더불어 평생과제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십시오. 성령의 은총으로 자신의 성전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면서 잘 보살피고 관리하십시오.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며 믿음을 굳세게 하고, 이어 끊임없이 용서하십시오. 용서도 의식적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의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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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그것을 받은 것으로 믿어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의 복음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였고, 오늘 복음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제는 ‘믿음’이 다시 볼 수 있게 했으며 오늘은 기도한 것은 이미 받은 것을 믿으라 하십니다.
제가 매일 보는 모습과 참 많이 다른 말씀을 주님께서는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해온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혹은 어떤 것도 노력하지 않고 기도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있는 이곳만 해도 매일 많은 분이 오셔서 기도하십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니다. 한 번에 안 돼서 열 번하고 스무 번 하고 백번을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주님은 ‘이미 받은 것으로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순금 좋아하십니까? 순금의 뜻은 순수한 금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금 100%가 아닌 것을 압니다만, 그 뜻은 그러합니다.
믿음은 뭘까요? 의심이 없는 순순한 상태를 ‘믿음’이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하면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의심이 없는 상태에서 기도 한 것이기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믿음의 순도입니다. 믿는다고 말하고 기도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돌아서는 순간 걱정하고 근심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허수아비
어릴 적 제가 살던 동네에는 허수아비가 많았습니다.
이 논, 저 논, 이 밭, 저 밭에
허수아비는 서 있었습니다.
어떤 허수아비는 옛 전통을 그래도 이어받은 볏짚 허수아비였고
어떤 허수아비는 신식 허수아비여서 소리도 나고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허수아비는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수아비를 놀리듯, 각종 새는 허수아비의 영역을 침범했고, 그들의 배를 불렸습니다.
누가 머리 나쁜 사람에게 ‘새대땡리’라고 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약탈당해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눈이 와도 허수아비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허수아비 같기를 바랍니다.
약탈 당할 수도 있습니다. 비바람과 눈이 와서 시리고 또 시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의 신앙이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우리의 신앙이 점점 익어가기를 바랍니다. 추수 때까지 말입니다.
오늘은 마음에 허수아비 하나 세워보세요. 기도하고 침묵하고 굳건한 우리 마음 밭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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