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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9. 큐티
사도행전 6:8 ~ 7:8
스데반 집사의 논증 (1)
관찰 :
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와 자유민들 간의 논쟁
-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집사로 세워진 스데반은 특별히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 예수님께서는 스데반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다음 스텝을 준비하셨다. 그것은 능력 많은 스데반이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모범이 되었다. 교회는 순교를 통해서, 즉 커지고 쎄지고, 힘이 많아지고, 부가 쌓여서 승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데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은 교회의 본질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 9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 “자유민들”은 본래 유대인이었다가 B.C. 53년 폼페이의 유대 토벌 후 로마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자유인이 된 이들의 후손들이다. 그렇게 자유인이 된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등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다. 이들 중 구레네 지역의 유대 후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당시 약 10만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길리기아는 사도 바울의 고향이기도 하고, 유대 문헌들이 모아져 있는 대규모 도서관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들 “자유민들”은 자신들이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해 오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자유민들에게 새로운 사상, 즉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는 이들이 있었고, 특별히 스데반이 지혜와 총명이 가득했기에 스데반과 변론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데반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했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증거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구약을 풀어내는, 이제껏 없었던 성경 해석법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들에게 전수된 성경 해석법이었다.
-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 자유민들은 자신들이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라고 여겼고, 예루살렘에 와서도 자신들의 성경해석과 지식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스데반과의 변론에서 도저히 스데반의 지혜와 성령을 의지한 성경해석을 당해낼 수 없었다.
2) 자유민들의 거짓 증언으로 스데반 집사를 공회에 서게 하다
- 11절.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 이들 자유민들은 자신들이 스데반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비열한 방법을 동원한다.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거짓을 주장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심각한 역린이었다. 이로 인해서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들의 악한 의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스데반은 그러한 거짓된 음모에 굴복하지 않고, 복음의 정수를 변증하게 된다.
- 12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 자유민들의 음모로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움직이게 되고 스데반을 잡아 공회로 모이게 되었다. 이것 역시 억울한 일이고, 엉터리 같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허용하시고,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일을 이루시는 일로 이끌어 가신다.
- 13절.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 거짓 증인들은 뻔뻔하게 거짓을 서슴없이 말한다. 특별히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 성전을 모독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서 성전에 대한 성경의 핵심 메시지가 스데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 14절.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 이들 자유민들의 사주에 의한 거짓 증인들의 주장은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구약의 규례를 무너뜨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침소봉대한 것이다.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만 하는 것이 가르침의 다른 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그야말로 ‘악마의 편집’을 한 주장이다. 이로 인해서 스데반의 목숨은 경각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두려움이 없다.
-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공회 중에 앉은 자들은 스데반을 죽이고자 그를 째려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독을 품은 혈안을 바라보는 스데반의 얼굴은 너무나 선하고, 밝고, 환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도리어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던 스데반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감출 수 없었다.
- 7장 1절.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 공회의 가장 큰 권세를 가진 대제사장은 스데반을 엄중히 심문하고 있다. 거짓 증인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들은 그는 스데반에게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가 물었다.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스데반 하나를 끌고 와서 그를 협박하며 심문하는 상황이다. 그에게 변론의 여지를 주고 있지만, 다른 변호인을 부르지 않았고, 거의 죽일 듯이 이 재판을 이끌고 있는 형편이었다.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던 상황과 거의 판박이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3) 스데반 집사의 설교 - 아브라함 ~ 야곱
- 2절.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스데반은 성경을 통해서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개념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변증하고자 한다. 거짓 증인들이 고소하고 있는 성전 개념을 성경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고, 이후의 성경 연구에 있어서 시금석이 되는 해석이기도 했다. 스데반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메시지를 남기고자 한다. 그가 이 때 한 메시지를 통해서 죽임을 당할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동족을 부르며, 그들에게 참 복음이 증거되기를 성령께 간절히 간구하며 아브라함으로부터 메시지를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메소보다미아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란으로 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3절.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본토 친척의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지 못했고, 가나안 땅이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정처없이 떠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 4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 하란에 머문 데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으로 가지 못한 아브라함은 데라의 죽음 이후에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 5절.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 이 때는 아직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질 것을 알지도 못했고, 가나안 땅에 히브리인들의 땅이 유업으로 주어질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만 존재하는 때였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땅에 자신의 후손들이 거주할 것임을 믿고 의지했다.
- 6절.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다른 땅, 곧 애굽에서 사백년 간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히브리인들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스데반은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 7절.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종살이 하던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고, 그곳에서 탈출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임을 언약해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8절.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 그러한 상황에서 비로서 할례가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시내산 율법 이전에 할례의 언약이 먼저 주어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든 권위가 율법이었고, 그 이전에 있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모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모세보다 더 우선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할례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그리고 이삭 역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그 이삭으로부터 야곱이 출생하고, 또 야곱 역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그 야곱으로부터 이스라엘 열두 조상이 태어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가르침 :
1) 구약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교본과 같은 스데반의 설교가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누가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의 구약 해석은 이전에 있던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와 더불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구약 해석의 교본이 되는 설교이다. 이 스데반의 설교가 교만했던 디아스포라 유대 자유민들이 자존심 상한 것으로 인해 스데반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 속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가 왜 이렇게 거짓과 음모와 술수, 그리고 악한 것이 가득한 곳에서 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패턴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소망이 없고, 선한 것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2) 자유민들이 거짓 증인을 세웠다. 그것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것은 앞에 나온 베드로의 설교로 3000명, 5000명이 예수를 믿게 되고, 심지어 제사장 그룹에서 조차 많은 수의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나오게 된 것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가말리엘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더 이상 손대지 못하고 있던 차에 자신들이 아닌 디아스포라 자유민들 연합이 고소를 했고, 그것이 거짓 증거일지라도 예수 부활을 증인들을 손봐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게 되었기에 속으로는 신나하면서 겉으로는 진지하게 스데반의 변론을 듣고자 한다. 이것, 오늘날도 오버랩되는 사건 아닌가!
3)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굳어져 있던 율법에 대한 아집을 깨주고자 하고 있다. 그들이 성전 문제로 걸고 넘어졌기에 성전에 대한 참된 성경의 메시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율법 이전에 있던 규례, 곧 할례를 거론한다. 그리고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그 할례 규례에 속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참된 예수 부활의 복음이 드러나게 되고 있다. 스데반이 얼마나 성령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적용 :
1) 이세상은 불의하다. 언제나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불의로 인해서 그 거룩함이 망가지실 수 없는 분이시다. 도리어 세상의 불의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도록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일하신다. 스데반은 자신의 목숨이 죽을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한다. 자신이 억울한 덫에 빠졌음을 알았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욱 담대히, 이스라엘의 부형들이 듣고 깨닫도록 참된 성경해석을 통한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중요하고, 내가 따라야 하는 모범이다.
2) 상황이 좋아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이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복음은 언제나 상황이 좋지 않은 채 전달되어져 왔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살아 역사하신 하나님의 복음은 감출 수 없는 것이고, 증명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선택한 나의 삶이 후회될 수 없다.
3) 성령의 충만을 날마다 구하자.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이 세상을 설복하는 말씀을 증거할 수도 없다.
4) 하동 참사랑연합 의원에서 치료를 하고, 전주대학교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금산 하늘성 교회에서 수요예배 말씀을 증거하고, 평촌으로 돌아간다.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