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mann / Piano Concerto in A Minor, Op. 54" -
Khatia Buniatishvili(Piano), Zubin Mehta(Cond).
I. Allegro affettuoso (a단조)
II. Intermezzo: Andantino grazioso (F장조)
III. Allegro vivace (A장조)
피아니스트의 꿈을 손가락 부상으로 잃은 슈만이,
무대에 설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아내 클라라를 위해 이 협주곡 단 한 곡을 완성했습니다.
1악장 첫 주제에는 클라라의 이름(C–H–A)이 음표로 새겨졌다는 해석이 따라붙습니다.
피아노를 영웅으로 세우는 대신 오케스트라와 대등하게 대화시킨 구성은 당대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매력으로 읽힙니다.
1845년 드레스덴 초연은 클라라가,
한 달 뒤 게반트하우스 재연은 멘델스존이 지휘봉을 잡아 이 곡의 명성을 굳혔습니다.
1832년 봄, 라이프치히의 어느 연습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 밑에서
하루 여섯 시간씩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넷째 손가락만 유독 따로 놀았습니다.
답답함을 못 견딘 그는 직접 장치를 고안했습니다.
나머지 손가락은 묶어두고 넷째 손가락 하나만 강제로 반복시키는 기계였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힘줄이 영구히 상해 버렸습니다.
연주자의 꿈은 그렇게, 스물두 살 무렵에 끝나 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서진 손에서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의 한 정점이 태어났다면,
믿어지시겠어요? 정작 작곡가 본인은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칠 수 없었던 곡입니다.
그런데 펜을 든 그의 삶에는, 음악보다 더 격렬한 싸움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상대는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 비크(Clara Wieck)였습니다.
하필이면 자신의 손가락을 망가뜨린 그 스승의 딸이었습니다.
클라라는 그냥 딸이 아니었습니다.
아홉 살에 첫 연주회를 열고, 열한 살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무대에 섰습니다.
열여섯에는 이미 유럽 전역을 순회하던 신동이었습니다.
빈의 청중은 그녀에게 황실 연주자 칭호를 안겼고,
파리에서 쇼팽은 그 연주를 듣고 “이보다 더 나은 해석을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비크는 딸의 커리어에 인생을 통째로 건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직접 가르치고, 투어를 짜고, 평단에 이름을 심었습니다.
클라라는 비크에게 작품이자 수입원이자 자존심, 그 전부였습니다.
그 딸이, 손가락을 망가뜨린 전 제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비크의 반응은 맹렬했습니다.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조직적인 훼방이었습니다.
슈만을 알코올중독자로 소문내고, 재정 능력이 없다고 깎아내렸습니다.
클라라에게 가는 편지를 가로채고, 두 사람의 만남을 물리적으로 막았습니다.
클라라를 데리고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겨,
슈만이 라이프치히에 있으면 딸은 다른 도시에 떼어 놓는 식이었습니다.
사랑을 떼어 놓겠다고 한 도시를 통째로 옮긴 아버지, 그 집착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두 사람은 믿을 만한 지인들을 거쳐 비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클라라는 이 시기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마음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슈만은 편지마다 클라라에게 피아노 소품을 써 보냈습니다.
「클라라에게 바치는 로망스」, 「클라라 테마에 의한 즉흥 변주곡」 같은 곡들이었습니다.
건반 앞에는 앉을 수 없었지만, 클라라에게만큼은 음표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연주 대신 건넨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편지로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1839년, 슈만은 결국 법원에 소장을 냅니다.
성인인 클라라가 아버지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청구였습니다.
당시 독일법에서는 여성이 성년이 되어도 결혼에 아버지 동의가 필요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조항이 비크에게 칼자루를 쥐여 준 것입니다.
비크는 법정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슈만의 알코올 남용을 증명하려 했고, 재정 무능력을 입증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법정에서 쏟아낸 비크의 발언 일부가 너무 과격해 판사에게 역효과를 냈습니다.
딸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집착이, 법정에서 스스로 제 발목을 잡은 꼴이 됐습니다.
1840년 8월 1일, 법원은 마침내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손을 들어줍니다.
한 달 반 뒤인 9월 12일, 클라라의 스물한 번째 생일 전날, 두 사람은 조용히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객은 극소수였고, 비크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예식 다음 날 클라라가 일기에 남긴 문장은 딱 한 줄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새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슈만은 음악사에서 손꼽힐 만큼 짧은 시간에 이 협주곡의 심장을 써내려 갑니다.
1841년 5월, 결혼 이듬해 봄. 슈만은 나흘 동안 악보지에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정확히 5월 17일부터 20일까지였습니다.
그 나흘 만에 단악장짜리 환상곡(Phantasie in A minor)이 완성됩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었지만 아직 ‘협주곡’이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습니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을 위해 썼어요. 당신이 아니면 이 음악이 세상에서 들릴 방법이 없으니까요.”
무대에 설 수 없는 사람만이 적을 수 있는 진심이었던 셈입니다.
클라라는 그해 8월 13일, 이 악장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무대에서 시연했습니다.
반응은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슈만은 이 곡이 아직 미완이라고 느낍니다.
단악장짜리 협주적 환상곡은 너무 짧고, 너무 외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곡을 4년이나 서랍에 묵혀 둡니다.
1845년, 슈만은 그 환상곡을 다시 꺼냅니다. 간주곡(Intermezzo)을 2악장으로,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를 3악장으로 덧붙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 54가 비로소 완성된 순간입니다.
1악장과 나머지 두 악장 사이에 4년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는데도,
세 악장은 한 호흡처럼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같은 동기가 곡 전체를 관통하며 꿰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곡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장치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1악장 첫 주제, 목관이 던지고 피아노가 받아 안는 그 하강 음형을 독일 음명으로 짚어 보면 C–H–A가 떠오릅니다.
독일 표기법에서는 제자리B(B♮)를 ‘H’로 적습니다.
그 C–H–A를 이탈리아식으로 늘여 발음하면 ‘CHiArA’, 곧 ‘키아라’가 되는데,
이게 바로 클라라(Clara)의 애칭이었던 셈입니다.
슈만이 아내의 이름을 첫 주제에 음표로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부 음악학자의 해석이라 100%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그가 평생 이런 음악적 암호 놀이를 즐겼다는 사실이 이 읽기에 묵직한 힘을 보탭니다.
「다비드 동맹 무곡집」에서는 자신을 두 가상 인물(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로 쪼갰고,
「카니발」에서는 옛 연인의 고향 이름(ASCH)을 음표로 박아 넣었습니다.
이번 차례가 클라라였다고 보는 게 그리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겁니다.[펌]
첫댓글
선선한 가을입니다
환절기 건강 잘 지켜내시면
멋진 가을 맞이 잘 하십시오
아우게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