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공고 출신이 31명 왔는데 한명,두명씩 도망(퇴사) 가기 시작 하였으나 나는 회사를 그만 둘수 없었다. 농업에 종사(논 1,400평 밭은 없다해도 될만큼) 하는 집안에 6남매 중에 장남이라서 동생들을 고등학교에 진학 시킬려 했으나 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다 회사의 근무 여건도 3조3교대로 바뀌고 말만 전국 최고의 수출액을 자랑했지만 복지나 급여는 형편 없었고 . 女工들의 입사는 형편 없이 감소 하여 갔고.
그러던중 숙부(중위 삼촌)님이 고려개발공사(국가기업체) 직원으로 말레이지아 교량 건설 현장으로 가면서 조카 대학시키겠다고 말씀 하시어 75년 5월 중순쯤(?) 부터 영남학원을 다니고 겨우 대학을 갔다. 농업대학을 갈려고 하였으나 아버님의 만류로 못 가고. 경남공고의 응용화학과와 연계인 경남대학 화학공학과로 갔다.
부산으로 가 학원을 다녀 첫사랑 김해 진례면이 고향인 0 0 희와의 약속도 반쯤은 지켰다. 어쩌면 삼수생에게 여자는 방해가 되었고. 간혹은 도움도 되었다.
세월은 흘러 내 나이 육십의 중반을 지났으나 어쩌다 합격한 수질기사 1급과 환경2급기사로 밥줄을 이어 가고 있다. 이것은 경남공고 2년간 담임을 하셨던 이석희 선생님의 자격증 중요시 정책과 한일합섬 다닐때 격려의 편지와 대학 다닐때 고교 한해 후배 김종열군을 통해 숙제를 강요 하신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일합섬에 남아서 격려해 준 친구들의 은혜도 잊지 않는다. 좀 더 낳은 학교를 가지 못했슴을 선생님,친구들 한테 미안하고 선택과목 농업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중학교 농업선생님, 신현흡 선생님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