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 두 편에 대한 평설 / 金洙暎
신동엽 「4월은 갈아엎는 달」, 김재원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근대의 자아 발달사의 견지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요점으로 해서 생각할 때는 극히 쉬운 문제이고, 고대 희랍의 촛불을 대낮에 켜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은 것은 철학자의 견지에서 전인에 요점을 두고 생각할 때는 한없이 어려운 영원한 문제가 된다. 한쪽을 대체로 정치적이며 세속적이며 상식적인 것으로 볼 때, 또 한쪽은 정신적이며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이 제목을, ‘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범위를 시단에 국한시켜 우선 생각해보자. 우리 시단에 시인다운 시인이 있는가.
우리 시단의 경우, 시의 현실참여니 사회참여니 하는 문제가 시를 제작하는 사람의 의식에 오른 지는 오래고, 그런 경향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의 작품이 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도의 예술성의 보증이 약했다는 것이 커다란 약점이며 숙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약점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는 젊은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내 故鄕은
江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土房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
아, 罪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山川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祖國에도
어느 머언 심저(心底),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의 피 터진 東學의 함성,
光化門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享樂의 不夜城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漢江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申東曄 「4월은 갈아엎는 달」 전문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것을 이번에는 좀 범위를 넓혀서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4월 19일이 아직도 공휴일이 안된 채로, 달력 위에서 까만 활자대로 아직도 우리를 흘겨보고 있을 리가 없다. 통행금지 시간을 해제하지 못하고 있고, 신문은 감히 월남파병을 반대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은 질식 상태에 있고, 언론자유는 이불 속에서도 활개를 못 치고 있다.
앞에서 시사한 유망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과도 유관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 문화정도는 아직도 영웅주의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나 신동엽의 「밭」이나 「4월은 갈아엎는 달」에는 영웅 대망론의 냄새가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아직도 우리의 진정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는,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가로 귀착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를 무한히 신나게 한다. 나는 나의 최근작을 열애한다. 나의 서가의 페이퍼 홀더 속에는 최근에 쓴 아직 미발표 중의 초고가 세 편이나 있다. 「식모」 「풀의 影像」 「엔카운터誌」라는 제목이 붙은 시들⸻아직은 사실은 부정을 탈 것 같아서 제목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이 중의 「엔카운터誌」 한 편만으로도 나는 이병철이나 서갑호보다 더 큰 부자다. 사실은 앞서 말한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를 읽고 나서 나는 한참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젊은 세대들의 성장에 놀랐다기보다도 이 작품에 놀랐다. 나는 무서워지기까지도 하고 질투조차도 느꼈다.
「엔카운터誌」를 쓰지 못하고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의 월평을 썼더라면 나는 사심(私心)이 가시지 않은 글을, 따라서 사심(邪心) 있는 글을 썼을 것이다. 개운치 않은 칭찬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거나 다치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엔카운터誌」의 고민을 뚫고 나옴으로써 나는 그를 살리고 나를 살리고 그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나를 ‘내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을 하면서 순간 속에 진리와 미의 全身의 이행을 위탁하는 사람이다. 《세대》지 4월호에 게재된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 전문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開花는 강 건너 春分의 겨드랑이에 球根으로 꽂혀 있는데 바퀴와 발자국으로 寧日 없는 종로 바닥에 난데없는 개나리의 행렬.
한겨울 온실에서, 公約하는 햇볕에 마음도 없는 몸을 내맡겼다가, 태양이 주소를 잊어버린 마을의 울타리에 늘어져 있다가,
副業에 궁한 어느 중년 사내, 다시 계절을 豫感할 줄 아는 어느 중년사내의 등에 업힌 채 종로거리를 묶여가는 것이다.
뿌리에 바싹 베개를 베고 新婦처럼 눈을 감은 우리의 冬眠은 아직도 아랫목에서 밤이 긴 날씨. 새벽도 오기 전에 목청을 터뜨린 닭 때문에 마음을 풀었다가…….
닭은 무슨 못견딜 짓눌림에 그 깊은 時間의 테로리즘 밑에서 목청을 질렀을까.
엉킨 未亡人의 수(繡)실처럼 길을 잃은 세상에, 잠을 깬 개구리와 지렁이의 입김이 氣化하는 아지랑이가 되어, 암내에 참지 못해 請婚할 제 나이를 두고도 손으로 찍어낸 花甁의 집권의 앞손이 되기 위해, 알몸으로 都心地에 뛰어나온 스님처럼, 업혀서 亡身길 눈 뜨고 갈까.
금방이라도 눈이 밟힐 것같이 눈이 와야 어울릴, 손금만 가지고 악수하는 남의 동네를, 우선 옷 벗을 철을 기다리는 時代女性들의 目禮를 받으며 우리 아버지가 때 없이 한데 묶어 세상에 업어다놓은 나와 내 형제 같은 얼굴로 行列을 이루어 끌려가는 것이다. 온도에 속은 罪뿐, 입술 노란 개나리떼.
—金在元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 전문
이것은 제 정신을 갖고 쓴 시다. 이 정도의 제 정신을 갖고 지은 집이나, 제 정신을 갖고 경영하는 극장이나, 제 정신을 갖고 방송하는 방송국이나, 제 정신을 갖고 제작하는 신문이나 잡지나, 제 정신을 갖고 가르치는 교육자를 연상할 수 있는데, 아직은 시단의 경우처럼 제나름의 양식을 가진 것이 지극히 드물다. 균형과 색조의 조화가 없는 부정의 건물이 너무 많이 신축되고, 서부영화나 그것을 본딴 국산영화로 관객을 타락시키는 극장이 너무 많이 장을 치고, 약광고의 선전에 미친 방송국이 너무 많고, 신문과 잡지는 보수주의와 상업주의의 탈을 벗지 못하고, 교육자는 ‘6학년 담임 헌장’이라는 기괴한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에 대한 처방적인 나의 답변은, 아직도 과격하고 아직도 수감 중에 있다. <1966. 5>
『김수영 전집 2 산문』 p.139~144 발췌, 원문은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청맥》 196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