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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8
#가나안신자
자칭 가나안신자라 하는 자들은 실상은 가나안족속에 불과하다.
#배교
믿음을 저버린 배교자가 두번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회개를 하려해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회개할 의지자체를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즉,자기가 한때 몸담았던 신앙자체를 자기 삶에서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어 아무런 죄의식도,구원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가장 명확하고 직접적인 배교의 외적 증거는 성령모독 또는 성령훼방이며,간접적인 증거는 유형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교회무용론이다.
#존번연 #천로역정
존번연이라는 인물과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 고전에 대한 동경과 공경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성경의 기준으로나 일반문학작품의 기준으로나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다.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없이 자기자신의 의지만으로 죄의식을 가지고 구원소망을 가져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며,한번 구원을 받았더라도 언제든지 취소될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다.자신의 생업과 가정을 완전히 떠나 분리된 순례길을 간다는 점에서 지극히 수도원주의적이다.주님이 아닌 그분께서 보내신 돕는자들에게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교황주의적이다.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저자의 의도에 따라 잡다하게 왜곡해서 인용한다.주인공인 기독교인은 순례길을 가면서 중간중간 만나는 일시적인 동행자들을 품기보다는 판단하고 정죄하기만 한다.내용전개에는 아무런 개연성도 없어서,이제 막 글을 배운 아이가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저자인 존번연은 자기 책이 무슨 대단한 진리를 함축하는 것처럼 자화자찬 하지만,이는 단지 이사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것뿐이다.도대체 어떻게 이런책이 오랜동안 기독교고전으로 추앙되어왔는지 이해할수가 없다.읽는 내내 성경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언짢았다.
#20220308
#요한계시록 #Revelation 4:5-6
5 寶座로부터 번개와 音聲과 우렛소리가 나고 寶座 앞에 켠 燈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靈이라
From the throne came flashes of lightning, rumblings and peals of thunder. In front of the throne, seven lamps were blazing. These are the seven spirits of God.
Et de throno procedebant fulgura, et voces, et tonitrua : et septem lampades ardentes ante thronum, qui sunt septem spiritus Dei.
καὶ ἐκ τοῦ θρόνου ἐκπορεύονται ἀστραπαὶ καὶ φωναὶ καὶ βρονταί· καὶ ἑπτὰ λαμπάδες πυρὸς καιόμεναι ἐνώπιον τοῦ θρόνου, ἅ εἰσιν τὰ ἑπτὰ Πνεύματα τοῦ Θεοῦ·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흑운과 천둥과 번개로써 시내 산 꼭대기에 강림하신 것을 산 밑 저 멀리서 볼 수는 있었으나 그분의 보좌는 볼 수도 없었고 산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심지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친구라고 하실 정도로 가까이 하셨던 모세조차도 정작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흑운 안으로 혼자 들어갈 때에는 너무나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보좌를 가리는 흑운이 아니라 보좌와 그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레소리가 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의 모든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으므로 주님 당신 자신을 더욱 명료하게 우리에게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보좌에서 번개가 난다는 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날에 빛을 만드신 분이 바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시므로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빛의 근원이시자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번개는 하나님의 명을 받드는 천사를 상징하기도 하므로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을 부리시는 주인이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좌로부터 나는 음성은 주님 자신의 음성일수도 있고 천사들의 창화하는 음성일수도 있다.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라 할 때 이는 들을 귀를 주신 성도들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말씀이기도 하고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불려 올라가서 들은바 그 어느 인간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언어이기도 하다. 보좌에서 나는 우렛소리는 셋째 하늘은 물론이거니와 우주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권세와 위엄을 의미한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주변의 모든 동물들이 겁에 질려 꼼짝 못하고 벌벌 떨듯이, 주님께서 한번 우레와 같은 위엄을 발하시면 천지만물이 진동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는 주님의 보좌 앞에 켜져 있는 일곱 개의 등불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면서도 스스로 일하지 않으시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을 받아 일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께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완전충만하게 들어가 거하심으로써 합일을 이루시고 기꺼이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라 칭함 받으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혼의 의지와 육의 입술의 명령을 따라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앉으신 보좌와 그로부터 발하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와 보좌 앞을 비추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주님께서 부활승천하신 시점부터 생겼다고 볼 수는 없다. 도리어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나 더 거슬러 올라가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창세 전 영원 전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레를 발하는 보좌에 앉으시고 성령의 비추심을 받으셨다고 보아야 한다.
6 寶座 앞에 水晶과 같은 琉璃 바다가 있고 寶座 가운데와 寶座 周圍에 네 生物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Also in front of the throne there was what looked like a sea of glass, clear as crystal. In the center, around the throne, were four living creatures, and they were covered with eyes, in front and in back.
Et in conspectu sedis tamquam mare vitreum simile crystallo : et in medio sedis, et in circuitu sedis quatuor animalia plena oculis ante et retro.
καὶ ἐνώπιον τοῦ θρόνου ὡς θάλασσα ὑαλίνη ὁμοία κρυστάλλῳ· καὶ ἐν μέσῳ τοῦ θρόνου καὶ κύκλῳ τοῦ θρόνου τέσσερα ζῷα γέμοντα ὀφθαλμῶν ἔμπροσθεν καὶ ὄπισθεν.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일을 분담할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 70명을 세우시고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70명의 장로들을 산으로 불러 올리셨을 때 그들의 발 밑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를 깔아놓으시고 하늘의 음식을 베푸시며 그들로 먹고 마시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의 사명과 책임이 매우 막중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늘의 영광을 체험함으로써 그 사역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교만함과 적당주의에 빠져서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그 불에 휩싸여 타죽는 형벌을 받았고 70명의 장로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백성들의 끊이없는 반역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셨을 때 특별히 더 사랑하셨던 제자이자 사도인 요한이 1백세를 바라보는 노년에까지 홀로 남아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속히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계시를 잘 기록하게 하시려고 미리 하늘 보좌와 그 주위의 풍경을 보여주셔서 그의 몸과 영혼을 새롭게 일깨우셨다.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를 끝으로 당신의 계시를 마무리하셨기 때문에 굳이 이후의 사역자들에게 하늘의 환상을 보여주실 이유가 없으셨고 단지 성도와 사역자 각자가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역경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개인에게 국한된 어떤 모종의 신령한 체험 정도만 허락하셨다. 하물며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의 신앙활동이야 사도 시대나 중세 시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아무런 고난과 역경이 없다고 봐도 될 정도이므로 우리는 그저 성경과 성령을 따라 보편적이고 통상적이며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방편들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가면 된다.
요한 사도가 묘사한 주님 보좌 주위의 네 생물은 선지자 에스겔이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 째 그 달 5일에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체험한 환상 중에 목격한 네 생물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존재라 볼 수 있다. 요한 사도가 목격한 네 생물의 앞뒤에 보는 눈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보좌를 수행하는 천사로서 보좌 주변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매우 많은 눈들이 빼곡히 모여있는 모습은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큰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20210308
#신명기 #Deuteronomy 6:10-25
불순종에 대한 경고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탁월한 신앙을 가진 성도는 거지 나사로처럼 비천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중에도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며 기뻐하고 다윗처럼 왕의 지위에 있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중에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는다. 신앙이 미숙한 신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건짐을 받거나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이뤄졌을 때에만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보다 더 미숙한 신자들은 어려운 상황에 있거나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보다 더 미숙해서 과연 신앙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자들은 어려울 때는 물론이거니와 좋은 상황에 있어도 이것밖에 안주신다며 감사하지 않고 불평만 한다. 신앙을 가진줄 알았으나 처음부터 비신자였던 자들은 삶이 굴곡지지 않고 평탄할 때는 교회와 관련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나 갑작스럽게나 지속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힘들다며 신앙을 저버리고 갑작스럽게나 지속적으로 큰 부귀영화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서 신앙을 떠나게 된다. 성도의 신앙을 가장 크게 뒤흔드는 것은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욥을 참소했던 것처럼 먹고 사는 것에 필요한 일용할 것들과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는 것처럼 자기의 생명에 관련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의 증감에 따라 우리의 심령은 교만해지거나 비관에 처하게 된다. 우리의 건강이 나빠질수록 한없이 정신적 우울에 빠지게 되나 회복되거나 더 건강해질수록 금세 육체의 정욕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성도라 하더라도 죄에서 자유한 사람은 없으므로 고난과 형통, 실패와 성공의 반복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신앙이 탁월해지고 거룩해지며, 신앙이 장성해갈수록 큰 고난과 실패를 작게 보고 작은 형통과 성공을 크게 보며 작은 죄와 큰 형통을 주의하며 경계하게 되는데, 이는 정금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초반에는 많은 불순물을 제거하다가 정련과정을 거칠수록 제거되는 불순물의 양은 점점 적어져도 금의 순도가 높아지는 것과도 같다.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여호와께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백성에게 하시는 질투는 단순히 한눈을 팔거나 몰래 외도를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치 배우자가 고의적으로 내 눈 앞에서 다른 간음자를 데리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질투이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는 생명의 은인이자 왕인 남편을 저버리고 외국의 잘생긴 남자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왕후에 비유하셨고,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는 그에게 직접 고멜이라는 간음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서 하나님의 질투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하셨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종교의 신들을 섬기는 일은 없다. 하지만 마치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중에 성전 으슥한 곳에서 우상숭배를 저지르는 제사장들과 고관들을 목격한 것처럼 간접적이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성경의 절대적 진리로 여겨 음란하게 섬기는 것, 복음의 좁고 협착하며 험난한 길이 아니라 넓고 평탄하며 풍족한 길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청지기에 불과한 목사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 참된 신앙을 위한 복음 지식이 아니라 자기의 지적 만족을 위해 여러 잡다한 신학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 등이 오늘날 교회가 다른 신을 섬기는 죄들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한국 교회에 진노하시고 대한민국 땅에서 교회를 멸절시키실지도 모른다.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있을 때 맛사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 뿐만 아니라 가는 길이 험하거나 고기를 먹고 싶거나 등등 자기들에게 부족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모세에게 이를 해결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개고생 하려고 애굽을 나온거냐며 온갖 독한 말로 원망하고 저주하고 비방하였으며 심지어 자기네들끼리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고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두고 백성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나없나 두고보자는 식의 시험을 하였다고 정죄하신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종종 시험하기도 하는데, 질병에서 낫는다거나 가난에서 벗어난다거나 좋은 학교에 입학한다거나 좋은 회사에 들어간다거나 부도를 막는다거나 사업이 흥왕한다거나 자녀가 입신양명을 한다거나 등등의 것들을 이뤄주시지 않으면 하나님 안믿고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떼쓰는 것이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이다. 이는 마치 패역한 자녀가 부모에게 자기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부모도 아니라고 행패를 부리는 것과도 같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19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증거를 지키라는 것은 성경으로 기록된 직접적인 가르침을 지켜 행하라는 뜻이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는 것은 비록 성경에 세세하게 기록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명시된 명령에서 도출된 원리를 따라 매사에 선하게 판단하고 순종하며 행하라는 뜻이다. 성경의 직접적인 명령을 가지고 선을 행하지 않는 원리나 근거로 삼아도 안되고 선을 행한다는 명목으로 성경에 명시된 가르침을 저버려서도 안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서 굳이 방역지침을 어기고 현장예배만을 고집하는 것은 전자이고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하면서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교회에 모이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후자이다. 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처한 교인에게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전자이고 구제를 명목으로 십일조를 대체하려 하는 것은 후자이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주일예배를 거른 교인을 정죄하는 것은 전자이고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을 피치못할 사정이라며 합리화 하는 것은 후자이다. 교회를 지켜야 한다면서 죄를 묵인하는 것은 전자이고 죄를 권징한다면서 교회를 사분오열하는 것은 후자이다. 정직해야 한다면서 남의 약점을 들추는 것은 전자이고 남의 약점을 덮어준다며 거짓말을 일삼는 것은 후자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은 올바른 성경 지식에 근거한 올바른 행위인 것으로서 오직 성경과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교회에서 어린 자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이 성경을 궁금해하고 성경에 호기심을 가지며 목회자에게나 부모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서로의 신앙을 위해 매우 선하고 좋은 현상이다. 따라서 목회자와 교사들과 부모들은 평소에 어린 신자들이나 자녀들이 성경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양육하여야 하고 그들의 질문에 언제든지 성경으로 대답해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성경에 대한 궁금증과 질문 보다는 사역이 어떠한지 행사가 어떠한지 누가 어떠한지 등등 성경과는 상관없는 질문과 대답만이 오고간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어린 신자들에게,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성경의 핵심은 우리가 왜 죄인이며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와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무엇을 지키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복을 누리게 하시는지인 것이다.
#20200308
#창세기 #Genesis 제 45 장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기를 밝히다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17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20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21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23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24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아마도 요셉에게는 형제들을 대하는 더 많은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침내 동생 베냐민을 보고 나서는 도저히 그 계획들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형들과 동생 베냐민에게 자기가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형들에게는 자기들이 노예로 팔았던 요셉이 거기에 왜 있냐 하면서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고 베냐민은 형 요셉이 죽은줄로만 알고 있어서 더욱 믿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과 함께한 17년보다 떨어져 있는 기간이 더욱 길었으므로 단번에 요셉을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때 형들은 요셉에게 지난 날에 저지른 죄 때문에 더욱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들고 바라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그런 형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리시려고 자기를 선택하셔서 먼저 보내신 것이라는 신앙 고백을 한다. 그러나 요셉의 고백은 단지 형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경험하고 믿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은 상당부분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유사하다. 요셉은 족장의 사랑받는 아들이었으나 한순간에 노예와 죄수가 되는 지경까지 낮아진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영광스러운 인성을 입고 계시다가 때가 되어 여자에게서 연약하고 비천한 아기로 태어나셨다. 요셉이 오랫동안 억울하게 노예와 죄수로 고난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죄가 아니라 택하신 자들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극심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 요셉이 바로의 꿈풀이로 단번에 죄수에서 총리로 올라 바로의 우편에 선 것 같이 예수님께서도 죽으신지 3일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창세 전과 같이 본래 계셨던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복귀하셨다. 요셉이 자기가 받은 지혜와 능력으로 애굽은 물론 주변국까지 기근에서 구해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당신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로 이 땅의 구원하실 자들에게 보내셔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주님께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다가 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게 되어도 예수님과 요셉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을 통해 결국에는 우리를 극진히 높여주실 것을 믿고 견고히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자기에게 해를 끼친 자들에게 복수하려 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였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요셉이 당한 고난보다는 요셉이 누린 부귀영화에 더 관심이 많다. 성경을 아는 지혜와 자식보다는 요셉의 꿈풀이 능력에 더 솔깃해진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셉처럼 세상에서 잘되고 머리도 좋으며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나님의 형통함과 복을 받는 것이라고 우리의 탐심을 부추기며 선동하면서도 정작 요셉처럼 억울함을 견디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육체의 정욕과 유혹을 이겨내어야 한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시는 형통함과 복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고 죄의 유혹을 피하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비단 여러 사람에게 드라마틱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는 이 없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심령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애굽의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요셉이 형제들과 상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들로서는 요셉이 아무리 지혜롭고 일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이방인 노예였다가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 총리로 세운 자에 불과한데도 그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한없이 관대하고 호의를 베푼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 역사상 요셉 시대의 바로와 신하들만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선을 베푼 때는 없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이방 나라 군주들 중에서 요셉 시대의 바로와 같이 호의를 베푼 자들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바사의 고레스와 다리오, 느헤미야를 술관원으로 삼은 아닥사스다 정도이다. 물론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절대로 없지만서도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을 신하로 맞아 범상치 않은 선과 호의와 관용을 베푼 저 이방 군주들, 적어도 요셉 시대의 바로와 느부갓네살과 고레스 정도는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요셉의 아버지 이스라엘은 자기 족속의 식량을 위해 하나 남은 참 아들 베냐민까지 위험한 여정에 보내자 다시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옛 이름 야곱이라 불린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온데다가 애굽 왕의 수레와 온갖 좋은 물품들과 아들들의 한결같은 보고를 듣자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고 그제서야 그의 영혼은 다시 하나님께로, 그의 육신은 기력을 회복하여 부활과 같이 소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다시 새 이름인 이스라엘로 불린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17년 동안 품안에서 키우다가 22년 동안 죽은 줄로 알았다가 22년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하고 숨을 거두기까지 다시 17년 동안 요셉을 보며 살게 된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이 지금으로 따지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어린 나이에 헤어져서 22년이 지나 장성한 성인이 되어서야 보았을텐데도 동생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애틋하고 각별하였다. 베냐민 또한 어려서 자기를 보살펴 준 형 요셉과 갑작스럽게 사별한 줄 알았어서인지 다시 만나기 전까지 매우 그리워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