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5.月. 맑음
너희가 민화투를 알아?
삼색 슬리퍼를 신은 채로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자며 반바지 차림에 초록 대문을 나섰다. 대략 30여 호가 옹기종기 붙어있는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십여 분이면 마땅하겠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어 다녔다. 담장에 접시꽃이 심어져있는 집, 대문이나 지붕이 파란 집, 돌담 안의 감나무 이파리가 검은 윤이 나며 울창한 집, 똑딱거리며 불알이 줄기차게 흔들리는 괘종시계를 본채 기둥에 걸어놓은 집, 몇 아름이 됨직한 돌배나무가 돌담을 밀어낼 듯이 기세를 뽐내고 있는 집, 사람이 살지 않아 휑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오는 빈 집, 마당에 모터를 설치해놓고 텅텅거리며 긴 호스를 이용해 논에 물을 대고 있는 집, 여러 가지 농기계들이 마치 전시장처럼 마당에 진열되어 있는 집, 해병237기 조국이 부르면 나는 간다.라고 벽에 싸인펜으로 써놓은 집 등이 이 골목 저 골목에 어깨를 마주하고 있었다.
골목을 나서니 농수로를 따라 물이 시원스레 흐르며 그 물길이 꺾이는 곳에 스머프 집을 연상시키는 정자가 키 큰 느티나무를 등지고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번 가뭄에도 물 걱정이 별로 없어 보이는 파란 논을 따라 저기까지 걷다가 돌아서서 정자 쪽을 향해 걸어갔다. 수목정水木亭이라 쓰인 정자에는 할머니 십여 분이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들께서 수다로 소일을 하는 중이 아니라 앉아 있는 모습이 딱 민화투를 치는 자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화투가 머릿속을 맴도는 마당에 옳다구나 하고 수목정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목정 안은 화투판답게 목하 팽팽한 기氣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화투판이 한 판 끝나고 정산을 하는데 한 할머니께서 비약을 깜빡 잊고 세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는데 반해 그에 맞선 할머니께서는 이미 표를 섞어버렸기 때문에 그 비약은 인정해줄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각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제각기 나름 인정받을 만한 논리가 있기는 하지만 화투판의 규칙이란 것이 있어서 누군가가 그 규칙을 상기시켜주면 대체로 이런 종류의 분쟁은 해소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밤일낮장이라든가 낙장불입落張不入은 화투판의 관습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민화투에서는 비약이나 초약, 풍약에 비해서 청단과 홍단약이 더 컸다. 그리고 광을 팔고 판에서 슬며시 빠진다거나 그 이상 터무니없는 약들이 없는데다 비상하게 잔머리를 굴려야 할 까다로운 규칙이나 꼼수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민화투는 생래적으로 고스톱이나 육백, 짓고땡에 비해 도박이라기보다는 유희에 가까웠다. 그런 민화투를 밀어내고 고스톱이나 짓고땡이 화투판에서 득세를 한다는 사실은 유희가 도박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화투로 팔목맞기는 하지만 고스톱으로 팔목맞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다시 새판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이번에는 저쪽 골목길로 들어서려는데 한 할머니께서 손짓을 하며 나를 큰 소리로 부르셨다. 수목정으로 돌아가니 우드 님과 우리 일행들이 수박과 참외를 쟁반에 받쳐 들고 와 수목정에 할머니들과 둘러 앉아 있었다.
할머니들과 함께 수박과 참외를 나누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농촌생활 이야기. 올갱이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로부터 결국은 가뭄이야기가 나왔지만 다른 곳에 비해 저수지 덕을 보고 있지만 이제는 저수지 물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우리들이 나타나서 할머니들의 화투판은 자연스레 끝나버렸지만 뜨개질이나 젓가락질 못지않게 민화투치기가 치매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할머니들께서 건전한 유희로써 민화투를 즐겨 치시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뒹굴뒹굴, 너희가 민화투를 알아? -)
첫댓글 아침에 마을을 둘러 보다 정자에 누웠더니 정자 지붕에 어제 할머니들이 화투판을 벌렸던 담요가 똘똘 말려 지붕 서까래에 찔러 있어 한바탕 웃었다~깔깔깔 누워보지 않았다면 그 누가 알랴~ㅎ
민화투? 고스톱은 제대로 몰라도 민화투는 조금 압니다. ㅎ ㅎ
이 가뭄에 농수로에 물이 흐르는 것만 보아도 시원하고 반가웠어요.
정말 살기좋은 축복받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우리 없는 사이에 괴산에 잘 다녀왔구랴... 한가로운 시골풍경이 그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