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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시사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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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조총련에 광주사태 공작 지시를 내렸고, 조총련은 독일인 기자 위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를 이용하였다. 광주사태를 조직하는 세력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를 흘렸고, 힌츠페터가 조총련이 흘린 그 유언비어를 진실로 믿은 것이 그가 급히 광주로 달려오게 된 계기였으며, 조총련 조직은 그가 광주로 오는 것을 도왔으며,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길 안내를 하였고 그런 장면 촬영에 그를 이용하였다. 북한과 독일에 동시에 보내졌던 그 영상물은 조총련이 다시 편집하고, 5.18사기꾼들이 다시 편집하여 근 30년간 왜곡된 주장에 이용되었다. 조총련과 5.18사기꾼들이 편집한 것을 2003년 KBS가 또 편집하여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바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명칭의 다큐멘터리 방송물 속에 들어있는 힌츠페터의 영상물이 5.18사기꾼들 주장의 헛점의 급소를 찌르고 있다. 광주사태 논리에서 몹시 중요한 것이 시민군의 최초 무장시점이다. 민간인들이 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무장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이 점에 달려 있다. 광주사태가 일어난지도 이미 어언 3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5.18을 주제로 토론이 시작되면 그 끝없는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이다. 무장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무장반란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공수부대가 발포하여 광주시민들이 무장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채동욱 등 5.18 검사들은 그런 주장의 가정 하에 시위대의 무장을 정당화시키는 5.18 법리를 만들었다. 즉, 5.18 법리는 시민군 최초 무장시점이 5월 21일 오후 3시 이후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KBS의 힌츠페터의 영상물 공개로 말미암아 5.18 법리의 기본 전제가 와장창 깨져 버렸다. 5.18 사기꾼들은 5월 21일 아침 운전이 미숙한 시민군이 과속으로 군용차량을 몰며 전라도 44개 무기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기를 탈취하러 다니다가 일으킨 대형교통사고 희생자들의 관으로 23일 시체장사하며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다. 이렇게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논리는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무장이 불가피하였다는 논리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왜 20일에 무장하였는가?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광주시민이 아닌 외지인 무장단체가 20일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힌츠페터가 아래 사진을 촬영한 시점에 대하여 지금 인터넷상에서의 토론의 열기가 아주 뜨겁다. KBS의 영상물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 공개된 이 사진은 5.18사기꾼들을 유리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리하게 해 주는 사진이다. 평화로운 도로 위로 민간인 무장단체가 군용트럭을 타고 들어오고 있다. 도대체 평화로운 도로 위에서 민간인들이 총을 든 채로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진입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만약 이석기의 무장반란음모가 성사되어 RO 회원들이 저렇게 총을 들고 군용트럭을 타고 어떤 도시로 들어오면 정부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석기도 만약 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면 군경이 총을 쏘니깐 무장한 것이었다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무장폭동 행위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사진 촬영 시점이 중요해진 것이다. 5.18 대표 논객들은 힌츠페터가 이 사진을 23일 찍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위의 사진에 대한 몇가지 객관적인 사실들을 짚어보자. 당시 광주로 진입하는 길은 나주에서 신의주1호선 국도로 광주 백운동을 경유 금남로와 도청 방면으로 갈 수 있었고, 또 하나의 길은 나주-송정 경유 광주 양동다리를 경유, 도청으로 갈 수 있었는데 두곳 모두가 진행방향이 동쪽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산에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찍은 사진이다.
힌 츠페터가 본 시위대 손도끼를 대표적인 시민군 윤석진도 보았다. KBS 나레이터는 숨기지만, <푸른 눈의 목격자>를 유심히 본 국민이 받는 충격은 시위대가 이미 5월 20일에 군용트럭을 몰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민군 윤석진은 손도끼와 일본 낫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이미 19일부터 군용트럭을 몰고 다녔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 튿날(19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언덕으로 을라갔다. 시내 곳곳에서 연기들이 치솟고 있었다. 나는 연기나는 곳에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발산대교를 건너 농성동 로터리로 갔다. 도로변에는 시민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화정동쪽 도로에 목재와 폐타이어 등으론 바리케이드를 쳐놓았는데 그것이 불타고 있었다. 또한 간간이 시위차량들이 지나다녔다. 그중 내가 맨 처음 본 것은 군용트럭으로 적재함 위에 일본 낫(만발이 크고 길어접었다폈다할수있음), 쇠스랑, 손도끼, 각목 등을 들고 시위대가 타고 있었다. 시위대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김대중씨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그들은 구호를 외쳤다. 시외버스도 지나갔는데 유리창이 없는 상태에서 시위대는 상반신을 내놓고 있었다. 시위차량 앞에는 '살인마 전두환 찢어죽이자'는 플래카드를 달고 다녔고, 사람들은 붉은글씨로 구호가 씌어진 띠를 머리에 묶고 있었다 (윤석진 1989).
윤석진의 증언은19일 쇠갈퀴와 낫과 쇠스랑 등이 시위대 무기로 등장했다는 김영택 기자의 기록으로 확증된다 (김영택 1988, 53). 5.18 사기꾼들처럼 시민군 무장 동기가 21일 오후에 시민들이 군인 총에 맞아 죽으니깐 무장한 것이 아니라, 20일에 이미 총기를 소지한 목포의 깡패 조직이 군용 지프와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다. 20일 오후 광주 입구에서 힌츠페터가 만난 무장단체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목포의 깡패조직이었다. 그들은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아니라, 외지인들이었다. 이미 5월 20일에 군용지프와 군용트럭을 몰고 다니는 무장단체가 광주로 진입하는 장면을 KBS의 영상물 <푸른 눈의 목격자>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로써 힌츠페터가 맨위 사진, 즉 바로 위 사진을 촬영한 날짜가 5월 23일이라는 5.18대표논객들의 주장과 달리 5월 20일 오후에 힌츠페터 일행이 광주로 진입할 때 찍은 사진이었음이 분명하게 입증된다. 5.18사기꾼들의 주장처럼 5월 21일 오후에 광주시민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총기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 무장단체가 그 다음날인 21일에 광주에서 총격전 상황이 벌어지게 할 목적으로 총기를 들고 침투하였으며, 그 총기를 이용하여 21일 오전부터 군 무기 탈취를 시작했던 것이다. 외지인 무장단체는 치안 혼란 상태를 야기한 다음 국군에게 누명을 씌울 목적으로 총기와 흉기 등을 소지하고 20일에 광주로 침투하였다. 따라서, 이제 5.18대표논객들은 20일에 민간인이 총기를 소지하고 군용트럭을 몰고 다니는 폭동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역사학도
☞ 이석기 및 채동욱 사태에 즈음하여 재조명하는 1980년 5월 19일 ☞ 5.18 주동자 박형선과 문재인의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 5.18 인민군 검사 채동욱과의 역사논리 전쟁 돌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