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집착의 관계
- 집착은 정진을 도울 수 있다 -
집착은 욕망을 낳기 때문에, 집착을 멀리해야 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도 일종의 집착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깨달음에 대한 집착도 멀리해야 한다. 많은 불교의 종단에서는 이 논증에 따라, 모든 집착을 멀리하는 수행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수행의 방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이라는 표현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집착을 멀리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분적인 집착은 용인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표현 그대로 모든 집착을 멀리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깨달음은 ‘집착’이 아닌, ‘집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집착은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집착이 생겨나고, 수행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집착은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로 정의해도 되는 것일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매 순간 우리의 의식이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식사하는 순간, 여가를 보내는 순간, 수행을 하는 순간마다 깨달음에 관한 사념에 빠진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집착, 즉 욕망은 집중을 방해한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만 삶이 그 욕망을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할 때 그 사람을 기준으로 나의 삶이 구성되는 것처럼, 깨달음에 집착할 때 삶은 그 깨달음을 중심으로 질서 지워진다. 삶의 매 순간이 수행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뜻이다.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다. 그들이 잡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수행 과정에서의 잡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그 주장은 마치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자연으로 떠난 도사가 되기 위해서 집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우는 행위와 같다. 도사는 깨달음으로 인해 세속에서 벗어났을 뿐, 세속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깨달음으로 인해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났을 뿐,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첫댓글 집착과 집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대개 집착이라고 하면 대상이나 욕망에 휘둘리는 부정적인 상태를 말하고, 집중이라고 하면 대상에 대해서 주목하는 긍정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따라서 집착은 정진을 도울 수 있다는 표현에서는 집착을 집중으로 바꾸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어 두어도 사실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유학에서는 "윤집궐중, 그 가운데(진리)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러한 금언에 휘둘릴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부처의 길을 가야 한다는 데 집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그 말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합니다. 부처의 가르침, 부처가 되고자 하는 실천에 집중하는 데도 그럴 우려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거나, 부처가 되고 하는 실천이 완벽하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라는 명제조차도 비판적 대상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집착과 집중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모든 집중 행위에는 욕망이 선행되야 하지 않을까요? 욕망이 없는 집중이 있다면, 그 집중은 무엇을 원동력으로 하는지 궁금합니다.
본문에 '욕망에 휘둘린다'는 표현은 다소 추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을 가지게 된다면, 삶이 그 욕망을 주축으로 구성됩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죠. 이러한 측면에서 욕망에 따라간다, 즉 욕망에 휘둘린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욕망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된다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욕망에 휘둘린다'는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후자를 지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욕망과 이성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지성사의 발전은 욕망의 결과물이 아닐까요?
본문 내용 중, '부처의 길을 가야 한다는 데 집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그 말에 휘둘릴 수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봤을 때, '부처의 길을 가야 한다는 데 집중한다'는 말 자체가 일종의 집착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즉 집착하지 말자는 말이 곧 집착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일종의 자기지시적 문장(self-referential sentence)으로 논리적 역설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수행의 근원으로 둔다면,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집착하지 말자'는 전제를 폐기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정과 결과의 혼동으로 인해, 이러한 모순이 초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깨달은 자)가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해서, 과정이 이와 똑같을 필요는 없죠. 부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수행자들의 목표는 부처가 아닌 부처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 과정을 재고하는 과정을 통해 , 본문의 '부처가 되고자 하는 실천이 완벽하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여쓰기가 인식 되지 않네요ㅠ 죄송합니다..
@김남우 집착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으로, 부정적 어감이 강합니다. 이에 비해 집중의 사전적 의미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또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취함'으로, 긍정적 어감이 강합니다. 집중에도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집착과 집중을 동일한 것으로 본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중해야 하는데, 욕망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지나침, 또는 모자람이 있는 것을 집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휘둘린다'고 한 것은 이 점에 주목한 표현이고요. 개념적인 것은 대개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욕망이 '본래 없던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관점은 서양철학적 전통에서 보자면 신 안에 머물러 있도록 되어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본질의 결여' 상황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집중은 '욕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욕망이 작동될 수 없는 본질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이성은 욕망을 제어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김남우 '부처의 길을 가야한다는 데 집중하면서도, 결국은 그 말에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은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닌 거짓 행위, 곧 치우침이라든가 과불급이 있는 행위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결국 집중해야 하는데, 집착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거짓말장이 오류처럼 자기지시적 문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집착과 집중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부처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부처의 길을 가야하는 것에 집착할 경우를 경계한 것입니다. '집착하지 말자'는 '집중하자'이므로, 집중한다고 하면서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말은 상충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는 이 말을 포함하여 자신의 말을 일종의 '방편', 곧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하나의 제안, 모델, 도구로 이해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 역시 자기지시적 문장은 아닙니다. 나의 길은 부처가 되는 하나의 길이지만, 유일한 길은 아니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길과 유일한 길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깨우침의 과정이 부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부처는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김남우 부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부처가 된 방법으로서 제안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가질 수 있습니다. 불교교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유일하게 깨달은 자가 나의 방식은 이러했다라고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부처의 선택이었고, 부처를 따르고자 하는 수행자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행자는 꼭 이러한 선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거나, 부처가 되고자 하는 실천이 완벽하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부처가 말한 대기설법과는 별개로, 우리의 인식과 실천이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조건이 상이하므로 부처와 완전히 동일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부처가 대기설법을 이야기한 이유도 이와 유사한 의미맥락을 가진 것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모순이 아니며, 서양철학적으로 말하면 부조리한 것이며, 이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식은 '실존적 선택'과 그것에 뒤따르는 책임입니다.
@김남우 덧붙여 선의 인식 및 실천에도 '욕망'이 추동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경험세계에서는 모든 행위에 욕망이 수반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욕구와 욕망의 구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선의 인식 및 실천'과 관련하여 회의적이거나 비판적 입장인 사람은 결국은 도덕적 인식과 행위가 지식욕, 명예욕에 의해 추동된 것이므로, 욕망의 충족이라는 점에서는 비판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합니다. 심지어는 그래서 순수한 선의 인식과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합니다. 유사한 논리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스토아학파의 아낙시메네스 등에서 경건주의, 엄숙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결여로 보고, 선의 인식과 실천을 충만함으로 본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는 성취하고 난 뒤에 느끼게 되는 만족감을 욕망의 만족으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나 종교 체험을 통한 황홀경 같은 것은 그런 관점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