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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새끼들은?!"
뱀 대가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뒤에 나타난 사람들은 일견해 보아도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란 것을 느낀 것이다.
"뭐야 보디가드야? 시발 존 나게 재밌어지는구먼."
말은 재미있다고 했지만 뱀 대가리의 긴장한 표정을 보니 별로 재밌어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앞의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들의 기도를 보면 자기들과는 급수가 다른 강자라고 하지만 저쪽이 수적으로 열세이고 싸움이란 것은 느끼는 것과는 달리 주먹을 겨뤄봐야 안다고 생각 하는 것일까,
"다 죽여 버려!"
뱀 대가리의 외침을 시작으로 가장 앞에 있던 몸집 좋은 덩치하나가 나서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미라 불렸던 남자에게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휙."
하지만 지미는 그 주먹에 맞여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이 옆으로 살짝 피한다음 타깃을 잃고 지나쳐 가는 덩치의 팔을 잡더니 사람의 팔이 구부릴 수 없는 각도로 비틀어 버렸다.
"우두둑!"
"크아악!"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미의 손속이 잔인하다.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자 아한이 역시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루시 만이 재밌다 는 듯이 쳐다 볼 뿐이다.
"이런, 어깨부터 탈골이 되어 팔목에서 부러져 버렸는걸!? 최소 십 개월은 사람 구실 못하겠어!"
루시의 말이었다. 뱀 대가리가 이빨을 우두둑 갈았다. 기이한 각도로 휘어진 팔을 붙잡고 쓰러진 아우의 모습 때문인지 눈에서 불똥이 튄다. 한순간에 벌써 한명은 전투 불능이 되어 버렸다. 창피한건 이제 없다. 앞의 기계처럼 느껴지는 이 두 사람을 무찌르려면 협공밖엔 없고 그게 그들의 특기 인듯하다. 그럼에도 쌔미는 도울 생각을 하지 않은 건지,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건지 무표정한 얼굴로 지미의 뒤에서 시립할 뿐이다.
"야! 씨발! 한명씩 가지 말고! 한 번에 다 같이 조져!"
멍청하게도 앞의 두 사람이 뱀 대가리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가 보다. 나머지 세 명이, 그래도 형님의 명령이라고 뱀 대가리의 외침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지미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지미는 정말 예상보다 무서운 남자이었다. 셋이 덤비어도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깔끔한 동작으로 피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는다.
"크아악!"
또 한명의 폭력배가 목 부분을 부여잡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무슨 수법인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목을 잡고 쓰러지니 목 부위에 있는 급소를 강타 당한 것이겠지.
"허어억!"
이번엔 지미의 커다란 체중을 실은 뒷발차기가 다른 폭력배의 허리를 강타했다. 저 정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아마도 갈비뼈가 금이 갔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아까 전 술집에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접근 했던 얼굴만 멀끔한 놈이었다. 자기보다 윗줄에 있는 형님들 세 명이 한순간에 저리 땅바닥을 구르고 있으니 전의를 상실한 체 뒷걸음을 치는 건 아마도 인지상정일 것 이다.
"바보들...지미는 NAVY SEAL 의 ELITE 솔저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는 CIA에서 살인무술 교관을 지냈다고! 무력으로 지미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아마도 울 큰 오빠 밖엔 없을걸!"
"?!"
루시의 빈정대는 말에 뱀 대가리의 붉어졌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다. 네이비 실이라면 미 해군 소속 육해공 특수 부대 이다. 미군에 수많은 내로라하는 특수부대에서도 네이비 실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 테러 진압 특공대원이다. 그 들 개인 한명 한명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 엘리트 출신이라니...다시 말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느린 거다. 아! 그랬군요. 몰라봐서 미안합니다. 하고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다.
"씨발!"
하얗게 질려버린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만 하얗게 질려 버린 건 아니었다. 그래 나의 얼굴역시 뱀 대가리와 같은 얼굴이 되어 버린 거다. 상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한 무력을 뽐내는 네이비 실의 엘리트 출신의 저 지미란 남자를 제압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큰 오빠라면...머리를 뒤 흔들면서 애써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본다.
'가나다라마바사 아차카차...에 해~ 우에우에 우와오'
그렇다. 루시 때문에 생각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혀..형님!"
하나 남은 그 멀끔하게 생긴 놈이 전의를 잃은 체 뒤 걸음을 치더니 뱀 대가리 옆에 선다. 이빨을 부득 갈던 뱀 대가리가 의외로 무슨 믿은 구석이 있다는 냥 결의에 찬 눈빛을 빛내고는 소리친다.
"이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외침과 함께 뱀 대가리가 뒤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
권총이다. 아마도 믿었던 구석이 이것 인가보다. 이 새끼 정말로 큰일을 저지를 셈인...가란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푸슝!"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 왔고 곧이어 단 발마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아악!"
뱀 대가리의 손에 들려져 있던 권총이 무엇에 의해 튕겨져 옆의 땅바닥에 떨어졌고 오른손 손아귀가 찢겨져 나갔는지 붉은 피가 차가운 땅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가 오른손에서 전해지는 짜릿한 고통에 입가에서 잔 신음을 내뱉은 후 왼손으로 오른 손을 부여잡는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켜떠진 두 눈엔 설마 하는 의혹의 그림자가 그리워져 있다.
"우리 쌔미는 영국 특수 부대 SAS 저격요원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는 CIA에서 더블 S급 스나이퍼 이었어! 마음먹고 쏜 것은 절대 빗나가지 않거든, 그래서 별명도 원샷원킬 이지용.“
얄밉다. 내가 듣기에도 루시의 비꼬는 말이 그리 얄밉게 들리는데 당사자는 오죽 할까, 어쨌든 옆의 루시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앞에 전반 적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지미 뒤에 시립해 있던 쌔미가 번개 같은 속도로 가슴속에 갈무리 해둔 소음기 달린 총을 꺼낸 다음 뱀 대가리의 권총을 맞추어 날려 버리고는 다시 품안에 갈무리 한 것이다. 지미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쌔미 역시 엄청난 사람이다. 루시의 말대로 쌔미가 SAS 즉 영국 육군 특수부대 출신이라면 아마도 뱀 대가리는 잘못 걸려도 너무 잘못 걸린 것이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을 상대 하려면 자기 같은 사람들 수십 명 단위로 데리고 와야 할 거다. 바위에 계란을 던진 꼴인 것이고, 불나방이 불로 뛰어든 것이며,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것이 지금 그를 두고 하는 말일게다.
"……."
지미 그리고 쌔미 처음 등장부터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말도 없다. 마치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할 뿐이다. 그들의 기계적인 모습은 정말 사람의 원초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깨워 주기에 하나 모자람이 없다.
"이런 제길...시발 놈들!"
용기인가? 절대 아니다. 저건 만용이다. 사람이 흥분을 하면 가끔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종종 들어와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목숨을 담보로 할 때에는 아무리 분하고 억울하다 해도, 흥분으로 인해 섣부른 판단은 죽음을 초래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뱀 대가리가 그렇다. 굳이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는 듯 앞에 떨어진 총을 주우려 몸을 움직인다. 아니다 다를까, 또다시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푸슝!"
이번엔 희미하게나 쌔미가 총을 꺼낸 것도 총을 쏘고 다시 품안에 갈무리 하는 것도 보았다. 뱀 대가리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투명하게 되어버린 채 돌처럼 굳어진 것으로 보아 무언가 일어난 것 같은데 도통 모르겠다. 위협사격이었나?
"주르륵."
헌데 뱀 대가리의 귀에서 새빨갛게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
자세히 보니 그의 귓불이 손톱만한 크기로 뜯겨져 나가 있다. 총을 주우러 움직이는 뱀 대가리의 귀를 귀신같은 솜씨로 정확히 맞춘 것이다. 몇 센티만 옆으로 비켜 맞았다면 아마 뱀 대가리 얼굴에 커다란 구멍이 났을 것이다.
"이...이..."
이번의 총격으로 그는 잠시나마 죽음을 경험했다. 죽음의 대한 공포는 흥분을 뛰어 넘는다. 이제야 서야 자기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상대임을 자각했는지 흔들리는 그의 눈에는 이젠 더 이상 광기 어린 분노 보단, 죽음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에 짙게 깔려져 있다.
“…….”
뱀 대가리가 전의를 상실 했다. 아니 전의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다는 듯이 풀썩 땅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자 쌔미가 시선으로 아한이에게 묻는다.
"……."
난 느낄 수 있었다. 쌔미의 시선이 묻고자 하는 뜻은 바로 총을 꺼낸 이 괘씸한 놈을 그냥 죽여 버려도 되겠냐는 무언의 물음이다. 그의 말없는 시선에 전신에 소름이 돋으며 오한이 확 끼쳐온다.
"안 돼 쌔미! 안 돼."
아한이의 외침에 쌔미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며시 갸우뚱 거린다.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눈치인지 아니면 꺼림직 하단 뜻인지는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천천히 뒷걸음치던 그 멀끔한 양아치가 쌔미를 쳐다보며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부디 목..숨만!"
쎄미와 지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놈을 쳐다본다. 제길 다시 느끼지만, 저 두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로봇이다. 둘이서 같은 표정, 같은 몸동작으로 둘이지만 하나처럼 절도 있게 움직인다. 말하는 프로그램을 깔지 않았는지 처음 등장 할 때부터 일언반구 없다.
"……."
한참을 말없이 멀끔한 놈을 쳐다보던 그들의 시선이 다시 뱀 대가리로 향한다. 그러자 뱀 대가리가 마치 작살에 꽂힌 참치마냥 몸에 경기를 일으키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무릎을 꿇는다. 아마도 넌 왜 무릎을 안 꿇느냐? 라고 느낀 것처럼.
"사..살려 주십시오!"
다시 쌔미와 지미가 서로를 쳐다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둘은 눈빛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아마도 저 폭력배들의 처신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순간 무언가 결심한 듯 쌔미가 지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멀끔한 놈이 기겁을 한다.
"히이익!?"
멀끔한 놈에게는 천만 다행이도 관심도 없다는 냥 지나치더니 뱀 대가리 앞에 선다. 그리곤 품에서 총을 다시 꺼낸 후 뱀 대가리의 미간에 총구를 겨눈다.
"!?"
차가운 금속의 총구가 미간에 닿는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일 것이다. 그것도 겨눈 사람이 절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은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존재라면 벌써 죽음이상의 공포를 체험하고 있는 것일 게다. 뱀 대가리의 얼굴이 바르르 떨리며 경련을 일으킨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도 온몸에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데 오죽할까? 뱀 대가리가 떨려오는 입술을 열었다.
"사...살려 주십시오...잘 못 했습니다."
비굴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저 뱀 대가리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아쇠에 걸려 있는 쌔미의 검지에 조금이라도 힘이 전달된다면 바로 뱀 대가리는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다..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부디..부디...살려 주십시오!”
그의 처절한 애원섞인 목소리에도 쌔미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아니 그의 손 근육이 꿈틀 되는 것으로 보여 마치 지금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다. 순간 놀란 뱀 대가리가 앞의 남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자각했는지 시선을 살며시 우리에게로 돌린다.
“죄송합니..다..죄..죄송합니다...다신...안 그러겠습니다...부디...부디 살려 주..십시오.”
내가 서둘러 그만 하라는 뜻이 담긴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적지 않게 긴장한 거다. 얄미운 건 얄미운 것이지만, 더 이상 피를 보는 것도 싫고, 사람이 죽은 것은 더더욱 싫다. 아한이가 나를 쳐다보며 자기도 같은 생각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쎄미..됐어. 부탁이야. 이제 그만."
아한이의 말이 꽤나 아쉬운 듯 그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이나마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곧이어 쎄미가 총구로 뱀 대가리의 이마를 힘주어 밀자 그가 뒤로 발라당 우습게 넘어졌다. 쎄미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뱀 대가리를 응시한다.
"다시 우리 눈에 띄이면 그땐 정말로 죽여 버린다. 라고 하는데?!"
루시의 말이었다. 쌔미는 아무런 말 하지 않았지만 루시가 대신 고맙게도 그의 마음을 읽고 말 해준 것이다.
"……."
뭐 어쨌든 뱀 대가리가 잘 알아 들었나보다. 고개를 미친 듯이 긍정의 표시로 흔드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의 표정엔 창피함이나 부끄러움을 찾을 수 없었다. 목숨을 구했으니까,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다면 이까짓 수모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애에에엥."
저 멀리 어디선가 경찰차의 싸일랜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우리의 광경을 보고 경찰에다 신고 한 것이겠지. 그러자 아한이가 한걸음 뱀 대가리에게 다가선 다음 속삭이듯 말했다.
"뉴욕에선 불법 총기를 소지하면 10년형 그리고 저 총 탄창에 얼마나 많은 총알이 들어 있는 줄 모르겠지만, 총알 하나당 2년씩 구형이 늘어나고, 거기다 총기를 꺼내었으니 살인 미수 혐의까지, 아무리 초일류 변호사를 쓴다고 해도 감옥에서 최소 10년은 썩은 다음 한국으로 추방 될걸?"
생각해 보니 언젠가 그녀는 법대를 다닌다고 했단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아한이가 그렇다면 사실 일 것이다. 뱀 대가리가 아한이에게 선처를 바란다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자..잘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다음부턴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옆에서 그 멀끔한 놈이 무릎을 꿀은 체 뱀 대가리를 거들었다.
"정말 다음부터는 사람들 괴롭히지 않고 착하게 살 거야?"
그녀의 물음에 뱀 대가리와 멀끔한 놈이 고개를 미친 듯이 조아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눈물 맺힌 눈까지 만들며, 땅바닥에 고개를 묻는 그들의 모습에 이젠 연민까지 느껴진다. 아까 전 그렇게 잡아먹을 기세로 우리를 협박하던 사람들이 맞은 것인가? 역시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하는 구나란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만들어 진다.
"그럼 제네 들 부축해서 얼른 가봐."
"네?"
아한이가 손가락으로 아직도 고통에 차 낮은 신음을 내 뱉으며 쓰러져 있는 다른 폭력배들을 가리키며 말 한 것이었다. 뱀 대가리가 아한이와 쎄미를 번갈아 쳐다보며 묻는다.
"정...말 그냥 가도 됩니까?"
아한이가 짜증이 났는지 눈매를 좁혔다.
"빨리 안가면 경찰에 잡힌다. 봐 벌써 가까이 왔잖아."
그녀의 말대로 멀리서 들려오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한 층 크게 들려온다.
"네..네 감사 합니다. 야! 얼른 부축해라."
뱀 대가리의 말에 멀끔한 놈이 무릎을 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두 다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려온다. 서둘러 서로를 부축한 폭력배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루시가 팔짱을 끼고는 입술을 삐죽인다.
"치잇. 언니도?! 쟤네들 같은 양아치들은 그냥 잡아 놓고 콩밥 먹이지?!"
그러자 아한이가 짧은 한숨을 토해 낸다.
"그러면, 우리도 함께 가서 조사 받아야 하는데?"
"뭐 까짓것 받으면 되지!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 우린 자기방어 밖엔 하지 않은 거잖아!"
"그러다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아한이의 물음에 루시가 또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그럼....최소한 한 달 동안 외출 금지....하긴 잔소리 대 마왕인데...."
아한이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가자 새우야. 우리도 경찰 오기 전에.."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미 와 쌔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휘이이잉."
그 들이 있어야 할 자리엔 시원한 바람만이 공간을 메우고 있다.
"언제 간 거야?!"
정말 귀신같은 사람들이다. 왔을 때도 그렇지만 갈 때도 인기척이 없다. 그래도 사람인데 간다는 말 즘은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걸음을 옮기 기전 무엇이 생각났는지 번쩍였다.
"그 뱀 대가리 총은?! 그 자식들이 그것을 가져간 것이면 나중에 또 우발적으로..."
루시가 싱긋 웃으며 나의 말을 자른다.
"쌔미가 가지고 갔어."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재촉하며 아한 이에게 물었다.
“근데...그 지미 하고 쌔미란 사람은 말 못하니?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나의 물음에 아한이가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만든다. 대답은 루시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말 못하는 건 아닌데...성격인 가봐....나도 몇 년을 보았는데, 말하는 건 한 두 번 밖에 못 봤어.”
* * *
“천천히 마셔!”
아한이가 나의 잔을 만류 한다. 그래 나도 모른 사이에 취기가 도는 것을 보니 많이 마시긴 마셨나 보다.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나의 손은 또다시 술잔을 거머쥐고 입안으로 털어 넣고 있었다. 어쨌든 취기가 살짝 돌자 계속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까 골목에서 느꼈던 더러운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다. 잠시 아한이를 멀끔히 쳐다본다. 제기랄, 더럽게 예쁘네. 그래 취기 때문인지, 술 마시니까 더 예뻐 보인다.
“루시는? 루시는 어디 간 거야 화장실 간다더니...왜 안 오는 거야?!”
나의 물음에 아한이가 눈매를 좁힌다.
“취해서 내가 먼저 택시 태우고 보냈어...”
그녀의 대답에 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만들어 진다. 역시 아직은 어린 아이다. 아무렴 지가 술을 얼마나 잘 마신다고 해도 감히 영업 생활로 강하게 단련된 나에게 덤비다니, 후후훗 다른 건 몰라도 술은 내가 한수 위다. 아 뿌듯하다. 내가 어린 친구를 상대로 너무 유치한 것인가?
“아이고, 고놈의 계집애 이 오빠한테 인사도 안하고 갔어? 휴~”
“많이 취했잖아. 인사불성이야..그러 길래 왜 그렇게 서로 못잡아 먹을 때까지 마신거야?!”
“하하핫! 너도 봤잖아! 나보다 술이 세다고 하니까 그런 거지....이 오빠가 본때를 보여 준거지..그래야 나중에 함부로 덤비지 않을 것 아니야!”
“무슨 애들도 아니고...”
아한이가 고개를 절래 흔든다. 아 머리가 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제길, 술 잘 마신다고 까부는 루시를 보내 버리려고 나 역시 무리한 거 같다. 다시 힘주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쳐다본다.
“근데, 너..넌 왜 같이 안 갔어?"
“왜? 같이 가줄걸 그랬냐?"
토라진다. 나의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알코올의 과다 섭취로 인해 입 근처의 근육이 이완 된 거다. 아, 이런 헛소리가 나오는 것 보니 정말 취했나보다.
"새우야? 괜찮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데려다 줄께."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들고는 씩 웃었다.
"가긴 어딜가?! 술 조금 남았잖아...이거 다 마시고 가야지! 술을 남기면 안 돼! 땍기!”
그녀가 한 숨을 내 쉰다.
“아한아, 근데, 넌 대단한 게, 세 가지나 있어서 좋겠다!"
"뭐가?"
"첫째롱, 머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공, 또 뭐냐, 얼굴도 세상에서 젤 예쁘공...그리고 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널 지켜 주잔앙."
"너 지금 비꼬는 거지?"
비꼬려는 생각이 아니라, 지금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알 수 없는 열등감이 그렇게 물어본 거다, 아, 그게 그건가?
"아니, 아니 비 꼬는 게 아니라앙..난 정말 대당한 여자 친궁를 둔 거잔앙?"
"……."
아, 혀가 꼬인다. 발음이 샌다. 이 정도 마신 걸로 보아 정말 그녀 말대로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다. 안 그럼 분명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이건 잦은 술 경험으로 인해 터득한 내 신조이다. 근데 아한이가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나보다.
"저기 새우야...“
“응? 왱?”
“너 왜 더 이상 안 물어봐?"
"응? 물앙보다니 뭥?"
"너 매번 나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하고 나의 정체에 대해 물어 봤잖아.”
하긴 오늘 그녀를 만난 후 평상시와는 다르게 그녀를 대할 때 아무런 질문도, 호기심 어린 표정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그런 나의 변화를 느낀 거다. 취기 때문에 그냥 다 털어 놓고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응...그냥, 뭐 네가 말하공 싶지도 않은 겅 같공, 언젱가 때가 되면 네가 말 하겠지잉."
나의 대답에도 의심의 눈초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넌 뭔가 알고 있어! 어제와 넌 많이 달라."
"!?"
뜨끔 한다. 젠장,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눈치 하나도 기가 막히게 빠르다.
"뭐가 다른뎅?"
"글세, 딱 집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날 보는 너의 눈이 편해졌다고 할까? 어제완 무언가 달라도 많이 달라.."
그랬던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왠지 모르게 더 이상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기분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편안했었으니까, 그랬기에 그녀를 대함에 있어도 자연스레 편해진 것이고 그녀 또한 편하게 받아들인 것이겠지, 어찌 보면 지금 그녀가 묻고자 하는 게 당연한 의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우 너 혹시...?"
혹여 그녀가 플린이 어제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을 눈치 챈 것인가?
"너..기억 난거니?"
다행이다. 아마도 그 쪽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가보다. 어떻게 대답할까란 생각보다 입이 먼저 열렸다.
"그래....확실히는 아니지망 어렴풋이...내가 어릴 적 널 만난 것을 기억해 냈엉."
아한이가 눈을 크게 치켜뜨더니 금세 얼굴에 홍조를 만든다.
"정..정말이야? 그..그럼 정말 기억이 조금은 난거야?"
귀엽다. 그녀에게 마치 열여섯 살의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모습도 있었던가, 조금 더 놀래어 줄까? 술기운 때문인지 또 다시 내 장난기에 발동이 걸려 버렸다.
"네..이름 내가 지어준 것이잖앙, 우아한..."
그녀가 핑크빛 입술을 쩍 벌린다. 크게 놀란 듯하다.
"그걸 기억해 낸 거야?!"
고개를 살며시 끄덕여 준다. 재밌다. 놀라는 표정이 왜 이리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걸까,
"너..연구소에서 처음 봤을 때, 넌 그 때...보자..아마도 새 하얀 옷을 입고 있었지.."
"정말! 기억하는 구나?!"
두 손 까지 마주치며 반색을 한다. 후훗! 이제 그만 여기까지 해야겠다. 괜히 더 말하다간 계속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전부야...조금씩 기억이 돌아오지만 그 외에 것들은 잘 기억이 안나.."
"한가지! 그건 기억 할 것 아니야?!"
갑자기 아한이가 소리쳐서 식겁했다.
"엉? 뭐?"
"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 마지막으로 약속 했던 것! 그거 기억 안나?!"
난감하다. 지금 그녀가 묻는 것은 당연히 기억에도 없고 플린 에게 들은 적도 없다.
"글쎄..."
"기억해봐! 분명히 네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을 기억 한다면 마지막 우리 약속 쯤 당연히 기억해 내야지?!"
제기랄, 이젠 손으로 식탁을 치며 화까지 낸다. 잠시 고민하는 척을 보여준다.
"모르겠는데, 그것 까진 아직 기억이...."
"어떻게 다른 건 기억하면서 제일 중요한 건 기억 못하는 거야?!"
"……."
"기억해 내! 그게 바로 내가 네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 이니까!"
"그..게 기억이....."
"야! 기억났다며?! 근데 어떻데 그건 기억을 못해?!"
그만 좀 작작 볶아 대라! 동네 미친년아! 란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면 괜히 꺼냈다. 그냥 다른 말로 둘러 댈걸 이란 후회막심이다.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것이며 그게 지금 뭐가 중요 하다는 건지, 뭐 약속이라면 뻔한 거 아닐까? 한번 막 던져 보자.
"혹시...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는...?"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한다.
"그럼 혹시 내가 다시 널 만나러 온 다는...."
"도리도리"
"혹시...나중에 뭐 결혼하자는..."
"자꾸 그렇게 때려 맞추려고 하지 마! 됐어! 흥!"
삐쳤다. 젠장할, 이게 정녕 삐칠 이유인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마신 술이 깨는 기분이다.
"아한이...네가 말해봐.....네가 말한다면 내가 기억 할 수 있잖아."
"내가 말하는 건 의미가 없어. 괜찮아 됐어...네가 기억이 난다기에 내가 조금 흥분했나봐..하긴 아주 오래전 일이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기억 한 것도 사실..대단한 거지.."
그래! 그게 대단한 거니까, 망각이란 단어를 모르는 너보고 괴물이라 한 거다. 어쨌든 저렇게 말하니까, 괜스레 미안해진다. 도대체 난 그녀와 그 어릴 적 무슨 약속을 한 것일까, 내가 더 답답해진다. 플린에게 물어볼까란 생각도 잠시 아마도 나와 그녀가 한 약속도 모를 거니와, 안 다고해도 기억을 못할 거다.
"미안...해, 기억하지 못해서. 아마 난 돌대가리인가 봐."
그녀가 씁쓸하게 웃는다.
"아니, 괜찮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다.
"계산은? 계산서 달라고 해야지."
"아까 루시 바래다 주면서 내가 했어."
아한이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마도 윙크를 하는 것이겠지. 제길 한 박자 늦게 감이 오는 것 보니 술이 취하긴 한 거다.
"이야~ 아까 대단하다고 말한 것 중에 하나 빼 먹었다!"
"뭘?"
"내 여친은 세상에서 돈도 젤 많아!"
"까분다! 또!"
* * *
선술집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가자 취기가 어느 정도 달아나는 것 같다.
"정말 괜찮겠어?"
고개를 끄덕여 준다.
"야! 그래도 내가 남잔데, 데려다 줘도 내가 데려다 줘야지! 괜찮아! 여기서 지하철 타면 이십분도 안 걸려!"
"그래도..."
내가 혼자 가는 것이 영 불안한가 보다. 사랑스런 여자다.
"그렇게 걱정 되면 우리 집에서 함께 자고 낼 가던지!"
"뭣?!"
아한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
제길, 웃자고 한 농담이었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수줍은 듯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머릿결을 스쳐가는 바람이 헝클여 논다. 때 마침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녀의 얼굴을 잠깐이나마 비추자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이 분위기는 바로 서로의 호흡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것이 로맨스 영화라면 바로 지금 타이밍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의 입술을 막 빨아대는...아니 내가 취해서 말이 헛 나왔다. 그래 키스를 하는 장면인 것이다.
"저...저기..."
심장이 방망이 쳐댄다. 마른침이 꼴깍하고 넘어간다. 그녀를 보니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얼굴만 붉힌 체 아무런 말이 없다. 술도 마셨겠다. 들이대고 보자. 조심스럽게 입술을 그녀의 얼굴께로 가져간다. 눈을 감을까? 아니, 아직 이다. 그래 아직 사정권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입술의 감촉을 느낀 다음 혀를 넣...제길 이것 까지 글에 쓰는 건 좀...그래 어쨌든 입술의 감촉을 느낀 다음 감아도 늦지 않다. 거의 다 왔다. 타깃은 바로 저 핑크빛이 감도는 촉촉한 입술이다. 조금만 더...
"어멋?! 뭐해?!"
그녀가 기겁을 하며 나를 밀어낸다. 다행이다 그래도 따귀는 맞지 않아....서가 아니잖아! 거부했다. 나의 입술을 거부한 거다. 쪽팔린 것은 둘째 치고 어떻게 남자 친구한테 이럴 수 있는 거냐?! 누가 먼저 사귀자 했는데.... 그까짓 키스 정도 해 주는 것이, 나에게 이렇게 커다란 자괴감을 선사하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인가? 순간 손에 들린 쇼핑백들을 던져 버린 다음, 날 무슨 쇼핑 도우미 정도로 생각한 게 아니냐고 와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
"왜...화났어?"
"……."
아, 마음을 다잡으니까,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조금은 서두른 감 도 없지 않아 있으니까, 그리고 더욱이 그녀와 달리 난 술이 취했으니까, 그녀에게 첫 키스는 이렇게 기억되기 싫은 것이겠지, 그래 이해하자...근데 분노가 수그려지니까, 창피함이 엄습한다. 고개를 들기가 싫다. 아니 들 수가 없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녀가 끝말을 흐리며 얼굴을 붉힌다. 제길, 굳이 저렇게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니까 더욱 초라해 진다. 그래 내가 실수한 게 아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재미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남녀 간의 사랑 확인, 그래 난 그녀가 날 정말로 좋아하는지 확인 하고 싶었던 거다. 라고 합리화를 만들어 내 자신을 위로 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그래도 서글픈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더 이상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싫다. 쿨 한 남자처럼 씩 웃어 보이자.
"미안....그냥 내가..술이 좀 취해서...."
"……."
제기랄, 또 어색한 침묵이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취기에 그랬다고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에 옮길 것을 너무 너무 후회된다.
"저기, 대신...."
"쪽."
아한이가 내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
됐다. 이걸로 된 것이다. 비록 반쪽짜리 키스이지만 내가 느꼈던 창피함과 자괴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럼 이만..."
“끼이익.”
아한이가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돌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검은 SUV 차가 그녀의 앞에 선다. 이젠 보지 않아도 저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지미와 쌔미다. 지미가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뒤쪽 문을 열었다. 아한이가 차에 오르자 문을 닫은 후 그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
"……."
악수하자는 건가? 지미에게 이런 모습도 있는 가란 생각에 주저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겉모습과는 달리 맞잡은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의외로 따듯하며 보드랍다.
"……."
그런 우리 모습을 지켜본 아한이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 꼼이 내밀고 크게 웃어 댄다.
"하하하."
문득 무엇이 웃긴 걸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지미의 얼굴을 보니 왜인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썩어 있다.
"엉? 왜.."
고개가 갸우뚱 해질 찰나, 그녀가 외쳤다.
"하핫! 지미랑 손을 잡다니 대단한걸! 바보야. 쇼핑백 건네 달라는 거잖아!"
"허걱?!"
서둘러 손을 빼자 지미의 붉어진 얼굴에 핏발이 선다.
"쏘리..."
"……."
미안하다는 말에도 역시 일언반구 없다. 지미가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획하더니 낚아 채간다. 제길 민망하다.
"지미! 그 중 노란색 쇼핑백은 새우 꺼야."
지미가 여러 게의 쇼핑백중 커플 스웨터가 들어 있는 노란 쇼핑백을 솎아 내더니 나에게 던지듯 건네준다. 필히 내가 손을 잡아서 불쾌한 게 틀림없다.
"……."
얼빵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자 아한이가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지미의 따가운 눈이 느껴졌지만 애써 피한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응.. 그럼 조심이가."
손을 흔들자 아한이를 태운 차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어느새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진다.
"……."
손바닥을 펴 보았다. 아직 지미가 전해준 따듯한 온기가 손에 남아있다.
"제길...쇼핑백을 달라고 말을 하던가 하지...투덜, 투덜, 투덜..“
발걸음을 돌려 우리 집으로 향하는 6번 지하철 입구로 간다. 취기 때문일까? 걸음걸이가 불안정하다.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쇼핑백의 무게가 많이 가벼워졌다.
"……."
근데 왜일까, 손은 가벼워 졌지만 마음속은 더욱 무거워진 기분이다.
"빠앙! 철커덩, 철커덩."
지하철이 들어온다. 늦은 시간이 되어 버려서 인지 차안이 한산하다. 자리가 많았지만 왜인지 앉기가 싫다.
"덜커덩."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문 앞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쳐다본다. 헌데 지하철이기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어두운 터널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중요한건 아니었다.
"이젠...마치 호랑이 등짝에 올라탄 기분이군."
운명인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젠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 운명이듯 느껴지는 건 왜 일까? 내 의지대로 피하려야 피할 수 없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닌 것, 마치 스릴 만점의 롤러코스터를 안전장치 없이 타는 기분이 이러할까?
"오늘은 또 무엇을 어떻게 써 나아가야 할까?"
문득 블루노트가 떠오른다.
"큰 수의 법칙이라...오늘 겪었던 이것 또한 큰 수의 법칙으로 설명 할 수 있는 것인가?"
* * *
"뭐?! 일주일 휴가?! 지금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니겠지?"
이 부장의 대머리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안경을 고쳐 쓰더니 날 위 아래로 훑어본다.
"네. 그렇습니다."
평상시와는 달리 거만한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자네,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지금이 어느 때인 줄 몰라서...휴가를 찾고 있는 거야?!"
"안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태연한척 한손으로 얼굴을 긁는다.
"그럼 사표 쓸까요?"
"'?!"
이부장이 입을 쩍 벌린다. 아마도 오늘 이런 내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은 것이다.
"너 무슨 복권 당첨 되었냐?"
"복권 당첨되었음 그만 두지 휴가를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럼 그 뜻 모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게냐?"
"뭐, 아직 솔직히 말씀 드리긴 그렇고, 잘 하면 복권 비슷한 걸, 맞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만 말 해두죠."
"어라? 뭐 스카웃 제의라도 들어온 거냐?"
"부장님! 정말 주실 겁니까? 안주실 겁니까?"
이 부장의 얼굴이 신문지 구겨지듯 구겨졌다. 지금 분명히 속으로 엄청난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부장님! 어언 일 년 조금 넘게 이 회사에 일하면서 제가 늦거나 아님 하루라도 결근 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
"그럼. 제가 뭐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적이 있습니까?"
"없지."
"그럼 제가 최저 임금으로 여기서 일하면서 큰 계약 몇 게 따 온 것도 아시죠?"
"잘 알고 있지."
"그럼, 일한지 일 년이 넘어가는데 무슨 유급 휴가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좀 쉬겠다는데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그..그건...끄응."
내가 말하면서 내 자신이 역시 난 이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어도 있어야 할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다. 난 역시 돌대가리다. 왜 그동안 내가 이곳에서 어깨를 피지 못하고 지내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부장이 손수건을 꺼내 그 민둥머리를 닦아댄다. 저 제스처는 그가 상당히 난처했을 때 습관처럼 베어 나오는 행동이란 것을 난 잘고 있다.
"그래도...지금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휴가는..."
"그럼 그만 둘까요? 이건 말하긴 좀 그래서 안 드렸는데 말입니다. 저번에 만난 BL PLUS의 고 사장님이 함께 일해...."
이 부장이 내 말을 앙칼지게 자른다.
"알았어! 임마! 그렇게 해! 그럼 오늘 김 대리한테 이번 주에 해야 할 것 인수인계 확실히 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부장님."
이부장의 맘이 바뀔까 서둘러 부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부장실 바로 앞 데스크에 앉아 있는 미스 김 언니가 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막내씨 무슨 좋은 일 있나봐? 귀가 입에 걸렸네?"
"하핫. 좋은 일은 무슨...가서 잘 되면 제가 돌아와서 한턱 쏘죠!"
"왜? 막내씨 어디가?"
그녀를 쳐다보는 내 얼굴에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누나만 아세요! 비밀이에욧! 아틀란틱 시티 가서 돈 따올 거예요! 그것도 아주 많이!"
미스 김 누나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막내씨 도박해?! 하지 마! 집안 망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도박으로 돈 딴 사람 하나도 없어!"
"하하하하핫! 글쎄요? 전 더 이상 누나가 아는 사람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미스 김 누나는 내가 누구랑 함께 가는지 감히 상상도 못 할 거다.
"평범하지 않다니?"
"하하하핫. 그렇게 됐어요. 하하핫."
"그만 웃어 막내씨! 바보 같이 도박 하지 말어!"
"헤헤."
바보? 후후훗. 그래 이 바보는 얼마 안 있음 빨간색 포르쉐를 타고 95번 도로를 질주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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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속도가 계속 늦어지네요. 잦은 술자리 때문에...후훗 이번 편에는 하드에 있는 사진 중 제가 가장 좋아 하는 일러스트 작가중에 한 분인 대만의 진숙분(陳淑芬)이란 일러스트 작가의 그림 중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한이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것을 올려 봅니다^^ 개인적으로 미인을 중심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파스텔, 색연필 ,수채화로 너무나 잘 살린 그녀의 작품을 정말 좋아라 합니다. 다음 회 에는 다른 느낌의 아한이를 올려 볼께용^^;;
첫댓글 ㅎㅎ 지미랑 새우랑 너무 웃겨요 ㅎㅎ 아한이 빵터질만도 한데용? ㅎㅎ 악수 하고 이런다는 ㅎㅎ 아, 새우 못말려~ 오늘도 완전 재미나게 읽고 갑니당. 저도!! 네이비 씰이랑 SAS 경호 있으면 좋겠어요~!!! ㅎㅎ 동네 동생들 삥 뜯으러 다닐 때 완전 좋겠어용 ㅎㅎㅎㅎㅎ 담편 완전 기대하고 있을게요 ㅎㅎ
재미나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다음 편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후훗 이건 또 왠 자신감인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제 손이 추천한다고 바빠져요. 위에 핑크님도 글쿠요... ^^
이번 편 진짜 잼있었요. 지미가 전해준 따듯한 온기...ㅋㅋ 새우가 아한을 만나 더이상 평범남이 아닌걸 추카추카!
아틀란틱 시티편 막강 기대되요. ㅎㅎ 그림 너무 예뻐서 저장했어요. 또 올려주세요. ^^
아! 여기도 추천이란게 있었군요-,,-;; 하핫 정포님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알면서 해피해 지네요^^ 이번 편엔 웃음 코드가 별로 없어서...웃음을 드릴 수 있는 장면이 별로 없었는데...다행이 지미하고 새우가 한건 했군요. 다음 편엔 더욱 예쁜 그림으로 한번 올려 보죵!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낭낭님의 기대치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니까 이번엔 정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글을 써나가야 겠군요! ^^ 매번 댓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저도 몰랐는데 댓글 하나 하나가 글 쓴이에겐 엄청난 힘이 되는 군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