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주님 발치에 앉아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특별하고 신비로운 여인이다. 그는 요한복음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더 신비롭다.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집에 그대로 있었다.(요한 11,20) 반면에 언니 마르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맞으러 뛰쳐나갔다. 나중에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시자, 그제야 비로소 그도 뛰쳐나왔다. 알고 보니 마리아도 언니처럼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32) 둘 다 같은 마음이었고 같은 걸 바랐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집에서 신세를 질 때처럼 말이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반면에 마르타는 짜증이 날 정도로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그는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9.40) 여기에서 ‘주님 발치에 앉아 있다’는 건 제자가 지녀야 할 마음 자세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한다. 사실, 환대는 손님맞이의 기본이자 본질이다. 손님을 가족처럼 대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거다. 환대는 그의 마음을 알아 그를 편하게 해주는 거,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손님이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내 집 밖에서 내가 문을 열어 맞아들여 주기를 기다리는 절대적인 손님이다.(묵시 3,20) 내 안에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그런 분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 생명의 주인이고, 집주인이면서도 내가 초대할 때까지 문밖에서 서성이신다. 그분을 환대해서 내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그래야 나는 산다.
언젠가 사제와 수도자를 포함해서 교구민 전체가 모여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화 주제 중 하나가 사제에게 묻는 것이었다. 정확한 글귀는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평신도라면 어떻게 봉사하겠나?’ 였던 거 같다. 모든 이를 빵 터지게 하는 대답 하나가 있었다. ‘내가 평신도라면 나는 봉사하지 않겠다.’ 였다. 요즘 말로 웃픈 대답이다. 교회 봉사자들의 고충과 마음고생을 잘 아는 사제의 고백이다. 그것을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걸 해결해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뜻이겠다.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게 부르신 주님, 그분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보람도 수고했다는 위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예수님,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러면 믿음이 약해질 테니 즉시 그 바람을 취소합니다. 문을 열고 주님을 향해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든 이를 위로해 주시고 봉사와 희생을 통해서 아드님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