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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
독일 출신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한 한국은 본래 홍명보 감독의 임기 내 보장되었던 2015 호주 아시안컵 본선에 참가했다. 4개월 여의 기간을 준비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대표팀은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찾았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대표팀은 꽃을 받았다. 반 년 전 월드컵에서는 이들에게 엿을 던진 팬들이 있었다. 태극전사들은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2014 브라질월드컵을 이끌었던 선장 홍명보는 여전히 태극호와 함께 침몰에 바다 깊숙이 가라 앉아 있다. 아시안컵 준우승으로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홍명보 전 감독을 향한 비난 여론이 되새김질 되고 있다. 홍명보 감독에겐 여전히 엿이 날아들고 있다.
홍명보가 떠났기 때문에 대표팀이 잘한 것 일일까?
슈틸리케 효과는 어느 정도였을까? 냉정하게 말하면, 대표팀의 전력은 2014 브라질월드컵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수비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공격진의 창조성과 결정력은 충분하지 못했다. 오만과의 첫 경기에서는 무승부가 될 수 있었던 위기에서 골대의 행운이 있었다. 핵심 선수들의 감기와 부상을 감안하더라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보인 경기력은 팬들의 공분을 샀다.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는 90분 이전에 패할 수 있는 위기가 있었다. 이라크와의 준결승전에서도 적지 않은 실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결승전까지 한국은 무실점 전승을 기록했다. 아시아 팀들은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이들이 우승후보로 꼽히는 대회에서 한국이 좋은 성적을 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 대회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던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일본 등 우승후보를 토너먼트에서 빠지지 않고 만났기 때문이다. 이번 아시안컵의 대진표와 일정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월드컵 본선에 오르지 못했던 다른 아시아 팀들의 경우 나란히 골 결정력과 체력, 그리고 경험과정신력에 문제를 드러냈다. 꾸준히 월드컵 등 메이저 대회를 경험한 한국, 호주, 일본, 이란 등은 이들에 비해 분명히 한 수 위였다. 이들은 월드컵이라는 경험은 물론 유럽 빅리그의 경험을 갖춘 선수들도 없었다. 아시안컵에서 보인 한국의 전력으로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를 상대했다면 16강 진출이 쉬웠을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준우승 이후 쏟아지는 찬사에 대해 경기력 측면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보완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다만 그가 힘겹게 한국 말로 읽어 내리며 “대표팀을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고 말한 부분은 한국 대표팀이 마지막까지 정신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였던 점이다. 하나로 단단히 뭉쳐 모든 것을 쏟아낸 대표팀의 모습은 우승컵을 들지 못했음에도 국민적 지지를 끌어냈다. 국민들은 우승컵이 아닌 ‘투혼’에 감동했다.
다리에 쥐가 난 홍정호 |
그렇다면 2014 브라질월드컵에 나섰던 선수들은 국민들이 바라는 ‘투혼’을 보이지 못했을까?
벨기에전을 마친 뒤 탈진해 눈물을 흘리던 선수들. 격한 몸싸움을 치르고 온 몸에 상처를 입은 김영권의 모습에서 ‘불성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러시아와의 1차전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둔 이후 여론은 투혼의 부활을 말했다. 편애 논란과 별개로 선수단의 훈련 분위기도 좋았다. 알제리와의 2차전에 당한 무기력한 패배 이후 비난이 시작됐고, 벨기에전 패배로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 대표팀은 ‘대역죄인’이 되었다.
진정성은 측량하기 어렵다. 브라질 현지에서 취재했던 대표팀 선수들은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에 모든 것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버겁고 힘겨운 미션이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기간 ‘대통령 선거에 나서도 당선 될 것’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차범근 감독이 네덜란드전 0-5 참패 이후 경질된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전력을 본다면 실점 시점에 따라 대패를 당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경기였다. 지금 돌아보면 알제리 역시 독일과의 16강전에서 보인 경기력을 통해 매우 높은 수준의 팀이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우승국 독일을 가장 괴롭힌 팀이 알제리였다.
한국 대표팀의 16강 진출이 이루어 지지 못한 과정에는 단 한 골의 아쉬움이 남았다.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내주지 않았다면. 알제리와의 경기에서 전반전 연속 실점을 두 번째 골에서 멈출 수 있었다면. 벨기에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지켜냈다면. 1승 1무 1패의 한국의 16강 진출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법이 월드컵에서는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좋지 않은 쪽으로만 흘러갔다. 아시안컵에서는 호주와의 결승전을 제외하면 샐리의 법칙이 한국 대표팀을 따라 다녔다.
월드컵 참패에 대처한 스페인의 자세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스페인 대표팀의 사례는 한국 대표팀에서 벌어진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10년 째 스페인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따라다니고 있는 스페인 축구기자 미겔 앙헬 디아스(그는 월드컵 전 발간된 델보스케의 자서전의 공동저자다)는 “델보스케 감독은 여전히 브라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있다. 준비 과정은 매우 좋았고,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더라도 바꿀 만한 점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회가 실패로 끝난 이후 언론과 여론은 차비 에르난데스, 사비 알론소, 다비드 비야, 페르난도 토레스, 이케르 카시야스 등이 전성기가 지나 세대 교체가 이루어 졌어야 했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반열에서 평가 받고 있었으며, 지금도 당시의 스페인 대표 선수 대부분이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고 있다. 과연 대표 선수 선발 시점으로 돌아갔을 때 후보 리스트에 브라질월드컵에 출전한 스페인 대표 선수들의 이름이 있다면 선발하지 않았을 감독이 존재할까?
더불어 이들은 이미 델보스케 감독과 2010 남아공 월드컵 우승 및 유로2012 우승 과정을 함께 한 ‘동지’다. 미겔 앙헬 디아스 기자는 2014 브라질월드컵을 자신들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로 여기고 있는 이들을 뚜렷한 징후 없이 외면하는 것도 델보스케 감독에겐 어려운 일이었다고 전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에 1-5 참패를 당하기 전까지 A매치에서 8년 동안 선제 득점한 경기에서 패배하지 않은 팀이었다. 어쩌면 수 년간 대표팀의 중심 기둥 역할을 해온 이 선수들을 내치는 쪽이 더 매정하고 불공정한 처사로 느껴졌을 것이다.
브라질에 도착한 스페인 대표팀은 훈련 분위기나 피지컬 컨디션에서 모두 문제가 없었다. 선수들은 즐겁게 월드컵을 즐겼고, 계속 된 승리와 우승으로 큰 대회에 대한 부담도 크게 느끼지 않고 있었다.
선수 선발을 둘러싼 논란
당시 한국 대표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홍명보 감독은 2012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당시의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다. 월드컵 예선을 거치지 못한 홍 감독은 1년 이라는 제한된 준비 기간 동안 이미 자신의 전술에 익숙한, 올림픽이라는 국제 대회 경험을 함께 한 선수들을 대표팀에 다수 정착시켰다. 이를 두고 여론은 홍명보 감독이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편애한다는 지적이 따랐다.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본선 세 경기에서 중용한 선수들 중에는 손흥민, 이청용, 이근호, 김신욱, 이용 등 유럽 무대와 K리그에서 검증된 선수들의 자리가 분명히 있었다. 2015 호주 아시안컵에 나선 슈틸리케호는 이정협 발탁이라는 파격 인사를 중심으로 대대적 쇄신이 이루어졌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23명의 최종 엔트리 중 12명은 홍명보 감독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선발한 선수들이었다. 김진수는 홍 감독이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해 꾸준히 주전 레프트백으로 기용하며 성장시켰다. 불운한 부상으로 월드컵에 가지 못했다.
김민우, 조영철, 남태희, 이명주, 장현수, 김진현 등 6명도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전 평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소집해 테스트한 바 있다. 마지막까지 이어진 고민 속에 낙마했다. 차두리의 경우 그리스와의 친선전을 앞두고 소집했으나 부상으로 합류하지 못해 점검 시간을 갖지 못했다.
다시 월드컵 최종 엔트리를 정해야 하는 시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홍 감독의 선택지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점검해보고 검증하지 못한 선수, 감독이 확신을 갖지 못한 선수를 선발하는 일은 도박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슈틸리케호에 승선한 선수 가운데 홍명보호가 불러서 보지 않은 선수는 이정협과 한교원 정도뿐이다.
호주 아시안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감동을 줬고, 찬사를 받아 마땅한 대회를 치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것이 또 한번 물러난 홍명보 감독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미겔 앙헬 디아스 기자 역시 같은 관점에서 “다시 대회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스페인은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같은 선발라인업을 내세울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재앙 같은 결과가 벌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승리한 뒤에는 세세한 일들에 대해선 어떤 것이든 뒤로 제쳐두게 된다. 지게 되면, 별것 아닌 사소한 일도 과장되어 표현된다”고 말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전력분석 코치로 일한 데니스 이와무라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을 남겼다. “물론 전술적으로 팀과 선수에 대해 더 잘 분석할 수도 있었겠지만 졌기 때문에 준비가 부족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겼다면 같은 준비를 했어도 준비를 잘 했다고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결과론적 분석의 위험성
승리한 경기에도 문제는 있기 마련이나 잊혀진다. 패배한 경기에서는 별일 아닌 것도 패배를 부른 나비효과였다며 강한 질타가 이어진다 결과론적 분석이 낳게 되는 부작용이다. 스페인에서는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스페인이 페널티킥 선제골을 넣은 이후 너무 일찍 느슨해졌던 점을 지적한다. 다비드 실바가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는 가정법도 등장한다.
결국 경기는 그런 우연한 사고가 맞물리고 쌓여서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가진 실력대로만 경기 결과가 나온 다면, 대회를 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나 대표팀의 코치로 현재 2015 아프리카네이션스컵에 참가 중인 스페인 지도자 제라드 누스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치른 월드컵 3경기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던 것을 알고 있다. 스페인도 재앙 같은 월드컵을 보냈다. 허나 그런 결과가 있었다고 스페인의 축구 스타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축구 경기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방식 중 하나다. 스페인의 실패와 비슷한 것이 한국에도 일어났다고 본다. 그저 그 순간에 잘 작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이 시도한 경기 방식이 아주 나빠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월드컵의 결과가 나빴지만 비판은 과도했다. 한국 선수들이 보여준 플레이는 전체적으로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 축구가 ‘똥’이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한국 축구는 발전하고 있고, 이는 선수들의 소속팀이 말하고 있다. 브라질월드컵에 나선 한국 대표팀은 역대 어느 때보다 많은 수가 유럽에 진출해 있는 팀이었다. 프리미어리그와 분데스리가에 역대 가장 많은 수의 한국 선수들이 가서 뛰고 있고, 능력을 인정 받고 있다. 대표팀의 경기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는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에는 최고의 선수들이 있었다. 대표팀의 패배와 한국 축구의 위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스페인이 월드컵에서 실패한 진짜 이유
그렇다면 한국과 스페인이 기록한 월드컵에서의 실패가 단순히 불운 탓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스페인 대표팀은 유로2008부터 이어진 메이저 대회 3회 연속 우승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무사안일’의 마음 가짐이 스며들었다. 미겔 앙헬 디아스 기자는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도 스위스와의 첫 경기에서 패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으나,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네덜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패한 뒤와 4년 전 대표 선수들의 행동과 자세가 달랐다고 전했다.
“스위스에게 지고 나서 믹스트존에서 만난 스페인 선수들은 기자의 손을 맞잡고 믿어달라며 소리쳤다. 해낼 수 있다고, 이겨내겠다며 강렬한 의지를 내뿜었다. 선수들 모두 만회하겠다는 정신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전을 마친 뒤에는 스위스전 패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어선지 오히려 스스로 안정감을 가진 모습이었다. 부담 없이 평소처럼 훈련했고, 칠레전을 준비하는 동안 즐겁게 웃으며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했다. 팀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한 대표팀 선수는 정신적 강인함이 이전 대표팀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약했다고 말했다.”
칠레와의 경기에서 보인 스페인의 모습은 더 처참했다. 경기 시작 20분 만에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만회의 기회는 없었다. 사비 알론소는 탈락이 확정된 이후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배고픔과 동기부여가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결국 기량 보다 정신 자세의 문제였다. 계속된 성공에 젖어들어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압박감이 사라진 스페인은 개인 기량을 팀 플레이로 온전히 가져가지 못했다. 기술 만으로는 더 강한 마음가짐으로 나선 상대팀을 이길 수 없었다. 스페인 선수들을 호통으로 다잡아온 카를라스 푸욜이 없었던 것도 스페인에겐 아쉬운 부분이었다.
2014 브라질월드컵의 한국 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도 정신력이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던 때와 비교하면 선수들의 정신적 허기는 이전보다 덜 했다. 월드컵 예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팀 내 파벌 논란과 월드컵 본선 엔트리 확정 과정에서의 논란도 선수들이 월드컵 경기 자체에 100% 몰두하기 어렵게 했다.
이케다 세이고 당시 대표팀 피지컬 코치는 선수단 내에서 여론의 분위기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어 편치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순간 몸은 경직되고 과감한 플레이는 어려워 진다.
홍명보의 패착, 베테랑의 부재
이러한 심리적 위기 속에 드러난 홍명보호의 가장 큰 문제는 베테랑의 부재였다. 2015 호주 아시안컵에서 한국이 어려운 순간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차두리와 곽태휘 등 베테랑 선수들이 경기장 안팎에서 선수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 주효했다. 차두리가 2014 브라질월드컵에 해설위원으로 참여하며 눈물을 보인 것은 후배 선수들이 어려운 순간 함께 해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알제리전에서 쉽게 허물어진 것은 선수들의 열의가 부족했다기 보단, 급격하게 허물어지는 선수들의 정신력을 잡아줄 그라운드 안의 리더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홍명보 감독 역시 베테랑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박지성을 선발하기 위해 네덜란드 현지로 날아갔으나 무산되었고, 차두리와 이동국은 대표팀에 소집해서 점검하려는 순간 부상을 당해 합을 맞춰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곽태휘를 선발했으나 가나와의 대회 전 마지막 친선 경기에서 실수를 범한 뒤 기용하지 않았다.
홍명보 감독은 위험을 감수하고 박주영을 선발했다. 원톱으로서 그의 기량과 더불어 2012 런던올림픽에서 맏형 역할을 했던 박주영의 리더십이 대표팀에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박주영의 컨디션은 기대만큼 올라오지 않았다. 긴 경기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다. 박주영 스스로 대회 기간 동료 선수들과 모인 자리에서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 홍명보 감독에겐 패착이 있었다. 감독 홍명보 역시 경험이 부족했다.
델보스케 감독은 월드컵 전 성공을 이어가는 팀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당시 스페인 라리가에서 장기간 최고의 활약을 보인 브라질 공격수 디에고 코스타를 귀화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 파격적인 선택이었으나, 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2014 브라질월드컵이 끝난 뒤 젊은 선수들을 대거 선발하며 리빌딩에 나서고 있다.
과찬은 슈틸리케에게 독이 든 성배가 될 수 있다
홍명보 감독은 월드컵의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결국 월드컵을 경험한 선수들이 아시안컵에서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팀의 중심 기둥 역할을 했다. 주장을 맡은 기성용은 한층 더 성숙한 기량으로 아시안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다. 월드컵에 나섰던 다른 선수들 모두 기량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더욱 강해졌다. 비 온 뒤에 땅은 더 굳어졌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됐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
그러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은 홍명보 감독은 만회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스페인은 월드컵과 유로 우승을 이룬 영웅 감독을 지켰지만, 한국은 2002 한일월드컵의 영웅이자, 런던올림픽 동메달의 영웅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쌓아온 경험치가 의미없게 되어 버렸다. 시스템의 실패는 개인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패배한 경기 후에 쏟아지는 비난을 보면, 마치 감독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슈틸리케 감독의 부임이 한국 축구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정협 발탁이라는 파격, 세트피스 전면 지역 방어와 같이 국내 지도자들이 과감하게 적용하지 못했던 방식을 도입 한 전술적 변화,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 축구를 진단할 수 있는 입장, 선진 축구의 감각 이식 등의 강점은 호주 아시안컵 대회를 치르며 드러난 슈틸리케 효과다.
그런 이유에서 홍 감독이 부임하던 당시에도 최강희 감독이 물러나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외국인 지도자가 좀 더 대표팀을 이끌며 국내 지도자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슈틸리케 감독과 같은 인물은 오히려 더 빠른 시기에 한국에 왔어야 했다. 조광래와 최강희, 홍명보라는 유능한 국내 지도자를 차례로 잃기 전에 필요했다.
대한축구협회의 잘못된 선택에 홍명보 감독이 독이 든 성배를 들이켰다. 우리는 브라질월드컵에서 실패했을 뿐 아니라 축구 영웅 한 명을 잃었다. 슈틸리케 감독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결과 자체에 취해있다면, 강적을 만나 처참한 패배를 당한 뒤에는 “슈틸리케도 별 수 없다”는 비난 여론이 쏟아질 수 있다. 이미 한국은 움베르투 코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레, 핌 베어벡 등의 외국인 지도자들을 ‘악화된 여론’을 이유로 무례하게 떠나 보낸 바 있다. 성급한 비난 여론의 ‘철퇴’는 국내외 감독을 가리지 않는다.
월드컵 참패에도 감독을 교체하지 않은 스페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대회의 결과가 아닌 내용으로 평가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점이다. 과도한 비난만큼 과도한 칭찬도 독이 될 수 밖에 없다. 냉정한 시선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불안 요소는 언제든 폭탄이 되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게 된다. 고용 불안정성이 극심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실수한 이들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갑질 논란'의 방향성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낸다. 실수한 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회생의 여지를 찾기 어려워 진다. 사회는 실패한 사람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낙인이자 운명이 되고 만다.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은 2006 독일월드컵 16강전에서 탈락했지만 2년 뒤 유로2008 대회에서 우승했다. 당시의 실패를 시행착오로 받아줄 수 있는 인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라울 곤살레스 제외라는 파격의 논란 속에 양분된 여론에도 아라고네스 감독의 방식에 대한 믿음이 스페인 대표팀의 전면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다. 처참한 패배를 맛본 델보스케 감독과 5년 째 함께하고 있는 스페인 대표팀이 한국 축구에 주는 메시지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 결과와 관계 없이 2018 러시아월드컵 예선까지 임기를 보장 받았다. 본선에 진출 시킬 경우 계약은 유지된다. 그러나 축구계에서 계약은 무의미한 편이다. 월드컵까지 2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고, 슈틸리케 감독의 보장된 임기는 지켜져야 한다. 예선 과정에서 어떤 실패와 비난이 있었더라도 본선까지 함께 해야 한다. 한국축구는 더 이상 감독 잔혹사라는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글=한준 (풋볼리스트 기자, 스카이스포츠 축구해설위원)
첫댓글 홍명보이사장님에 대한 직접적인 '소식'은 아닙니다. 다만 홍명보이사장님과 관련된 기사가 하나 나왔기에 많이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한준 기자님께서 굉장히 사실성 있게 기사를 작성했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제 마음 그대로인 글이네요..사람들은 또 이런글은 안보겠죠ㅠㅠ
정말 제가 하고싶은 말이 이거라니까요!!
다시 일어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잔혹하게 들이대는 안타까운 사회분위기가 이사장님같은 큰 인물을 쥐고 흔드는 거 같아요. 이사장님은 한국에 이바지하고싶으셔도 지금의 분위기는 아닌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