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장, 모용홍, 모용충에게 포위되다시피 한 장안의 부견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걸복건귀는 머나먼 농서에 처박혀 있으니 제외하더라도.) 요장은 북서쪽에서 세력을 펼치고 있었고, 모용홍은 그야말로 장안의 코앞에서 장안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모용충은 하동(河東)에서 격파당해 모용홍에게 투항하였지만, 포위의 형세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6월이 되자 부견은 몸소 보기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요장을 공격하러 출진하였다. 북지(北地) 일대에서 요장과 맞서 싸운 부견은 초반에 요장을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요장의 군영으로 통하는 물길을 모두 장악하여 말 그대로 말라죽도록 압박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요장군은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결국 요장과 부견은 북지 일대에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바로 등 뒤에서 장안을 노리는 모용충을 두고 있는 부견에게는 피가 마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요장이라고 모를리가 없다. 요장은 아들 요숭(姚嵩)을 모용충에게 인질로 보내고 화의를 청한다. (요장은 모용홍을 공격하려다 패배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 셈이니 두 세력은 일단 적대관계였다.)
한편, 장안으로 향하던 모용홍은 가혹한 군령을 내세우는 바람에 부하들의 불만을 사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모용홍의 뒤를 이은 것은 동생 모용충(앞서 평양에서 설치다가 깨지고 투항한 그분)이었다. 모용충은 장안을 향해 다시 진격을 시작하여 부견의 뒤통수를 제대로 압박했다. 부견은 모용충을 막기 위해 요장을 내버려두고 귀환하였는데, 마침 부휘가 낙양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귀환하여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요장은 모용홍과 화의를 맺고 사실상 군사동맹을 맺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북지에서 상황을 주시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치밀함을 보인다.
"연인(燕人)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관중을 떠나 돌아갈 것이다. 나는 마땅히 영북(嶺北)에서 주둔하고 널리 물자를 거두어서 진이 망하고 연이 떠나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런 연후에 팔짱을 끼고 장안을 차지할 뿐이다."
부견은 어쨌거나 배후의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황이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부견이 모용충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족족 박살나고 있었으니 배후의 걱정은 덜었지만 눈 앞의 위기는 더욱 심해지는 셈이었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진격한 모용충은 7월에 이르러 아방성을 점령한다. 진시황이 만든 바로 그 아방궁이다. 장안의 성 바로 아래까지 다다른 것이다.
==============
"이 쳐죽일 놈의 오랑캐들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이냐!"
"폐하,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앞으로 나가시면……."
"모용충! 이 종놈의 자식이!"
성벽 위 장대에서 포악한 외침 소리가 울려퍼졌다. 모용충은 비웃음을 띄며 말을 달려 성벽 근처로 향했다. 부견이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올라 벌겋게 된 얼굴로 날뛰는 모습이 보인다. 부견도 모용충이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는지 더욱 발광하며 외쳤다.
"이 종놈의 자식아! 네놈이 여기까지 와서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오냐. 내가 네놈의 고생을 생각해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이 종놈은 종놈의 고통이 싫어 너를 잡으러 왔다."
"뭐라고! 네놈이!!"
"너를 잡아서 나 대신 종살이 시켜 주겠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이 쳐죽일 놈이!"
부견은 당장이라도 성벽을 뛰어내려 달려올 기세였다. 부견을 뜯어말리는 시위대들도 힘에 부쳐보인다. 모용충은 다시 말을 돌려 본진으로 향했다. 등 뒤로 부견의 폭언이 쏟아졌다.
==============
장안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도록 공격과 대치는 지리하게 계속되었고, 보급이 끊긴 성 안은 처참한 상황이었다. 385년 정월에 부견이 신료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에 참가한 신료들은 모두 입 속에 고기를 숨기고 돌아가 처자식에게 먹일 정도였다. 백성들도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니 농성전의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의 황제였던 모용위는 당시 장안에서 살고 있었다. 며칠 전인 384년 12월, 모용위는 성 내에 거주하고 있던 선비족 1000여 명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하다가 발각당했는데, 부견은 마지막 남은 자제심을 발휘했는지 모용위를 불러 물었다.
"내가 그대를 대우한 것이 어떠했기에 이런 뜻을 품었는가?"
모용위는 목숨이 중했는지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모용위의 가신 모용숙은 당당하게 부견에게 말했다.
"가문과 나라의 일이 중한데 어찌 의기(意氣 : 부견이 두텁게 대우해 준 은혜)를 논하겠소!"
부견은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모용숙, 모용위를 비롯한 선비족들이 모조리 몰살당했으니, 살아남은 것은 탈출에 성공한 모용수의 어린 아들 모용유와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慕容盛) 뿐이었다.
처참한 포위전의 와중에도 부견은 지속적으로 반격을 하였다. 부견이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범상찮은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견은 작은 승리를 쌓고 쌓은 끝에 마침내 정월 계미일(29일)에 모용충을 크게 격파하였다. 달아나는 모용충을 쫒아 아방성 밑까지 도달할 정도였다. 제장들은 이긴 기세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 소탕전을 벌이기를 청하였으나 부견은 기습을 염려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부견이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어렵게 잡은 승기를 놓칠 부견은 아니었다. 처절하게 농성하던 상황을 뒤집어서 일진일퇴의 상황으로 만들어 놓은 것만 보아도 평범한 능력은 아니다. 장안 근방의 각지에서 모용충의 선비족 군단과 부견의 군단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부견이 선전을 펼치기는 하였지만 모용충의 공격도 가열차게 이어졌다. 관중은 황폐화되어 천 리 안에 밥짓는 연기가 없었다고 한다. 부견이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근거지가 이렇게 초토화되는데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관중 각지에서 부견을 지원하기 위해 보내온 병력과 군량들도 대부분 모용충에 의해 차단되었다. 점차 파국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5월이 되었다. 모용충은 다시 한 번 장안까지 육박하였는데 몸소 전투를 독려하던 부견은 화살을 맞고 말았다. 그것도 한 두 대가 아니고 몸에 가득 박혀 피가 줄줄 흘렀을 정도라고 하니, 심각한 상처였을 것이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부견에게도 최후에 대한 위기감을 떠올리게 한 것 같다.
부견은 각지의 지원 세력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을 돕지 말고 국력을 보전할 것을 명하기도 하고, 외부의 지원군이 양동작전을 제안해도 이를 거부하는 등 소심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결정타로 날아온 것은 부견의 맹장 양정(楊定)이 사로잡힌 일이었다. 부견은 마침내 장안을 버리고 몸을 피할 생각을 하였다.
부씨 일가는 예전부터 도참에 많이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성씨를 부씨로 바꾼 것도 도참에 의한 것이고, 폭군 부생의 등극도 도참 덕분이었다. 엄친아 부견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까칠남 왕맹도 도참 같은 것을 용인할 사람은 아니다. 이 때문에 부견은 도참을 내치고 배우지 못하도록 한 바 있다. 그랬던 부견이 이 때에 이르자 갑자기 도참을 믿기 시작했다. 역시나 심약해진 탓일 것이다.
"황제가 오장산으로 나오면 오래 갈 것이다."
도참을 따라 부견은 장안을 태자에게 지키도록 한 뒤 자신은 수백 기의 기병을 이끌고 장안에서 탈출했다. 태자 부굉(苻宏)에게는 구원군을 꾸려 포위를 풀게 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기약없는 약속이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부굉도 알았을 것이다. 부굉도 장안의 수비가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견이 성을 빠져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을 버리고 탈출하였다.
마침내 모용충은 385년 6월 말에 주인이 떠난 장안에 무혈입성하였다. 무혈 입성에 성공했다고 해서 승자의 권리인 약탈을 포기할리는 없다. 선비족 군대의 약탈로 장안성의 백성들이 수없이 죽고 성 안쪽마저 황폐해졌다.
오래 살게 해준다(?)는 도참을 따라 오장산으로 들어간 부견은 곧 도참을 믿은 대가를 치른다. 요장이 오장산을 포위하고 부견을 사로잡은 것이다. 부굉은 남쪽으로 도망쳐 동진에 항복하였다.(당시 동진은 북진을 거듭해서 황하 이남 지역을 거의 다 수복하고 촉과 한수 유역까지 점령하여 최대의 강역을 자랑하고 있었다.) 부씨 일가의 초라한 몰락이다.
==============
"나 요장은 다음 역수(歷數 : 참위서에 기록된 왕조의 순서)에 호응하는 것이니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이오."
요장이 유폐된 부견에게 사람을 보내 전국새(傳國璽)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전한 말이다. 이에 부견은 눈을 부릅뜨고 요장의 전인을 질책하며 전언을 남겼다.
"어린 강족 놈이 감히 천자를 핍박하느냐. (역수에 적힌) 5호의 순서에 너 같은 강족의 이름은 없다."
요장은 도참에 따라 자신이 다음 순서라고 말하고, 부견은 도참에 요장이라는 이름은 없다고 답변하는 기묘한 대화였다. 도참에 잘 휘둘리던 당시 사람들의 일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도참을 매우 싫어했던 부견이 할 대답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기묘한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붙잡혀서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할 대답은 아니었다.
요장은 다시 사람을 보내 이번에는 선양을 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부견의 대답은 또 걸작이었다.
"선양으로 교대하는 것은 성현의 일인데 요장은 반란한 도적에 불과하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선양(禪讓)은 고대 전설 속의 제왕 요가 순에게 왕위를 물려준 일화를 말한다. 말 그대로 전설이지만 동시에 유교적 이상향의 하나였기에 고래로 수없이 회자되고 칭송 받아온 일이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선양은 겉으로만 "물려준 것"일 뿐 실제로는 "빼앗은 것"이다. 신(新)의 왕망(王莽)이 처음으로 선양을 가장한 찬탈을 한 이후, 위 문제 조비, 서진 무제 사마염 등이 선양의 예를 따라 찬탈을 한 바 있다. 부견은 선양을 원하는 요장에게 제대로 모욕을 준 셈이다.
부견과 요장의 관계도 불꽃 튀기는 관계는 아니었다. 요장이 부견에게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고(요장은 부생의 치세 때 패하고 복속되었다.) 부견은 요장을 여러모로 중용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도록 해준바 있다. 그러나 비슷하게 배신한 모용수와 달리 요장에 대해서 부견은 계속해서 화를 내고 욕하면서 죽여주기를 바라는 듯한 행동을 한다. 딱히 요장을 미워했다기 보다는 죽음을 재촉하고 싶어 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견 자신이 죽기를 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을 하는데다가 요장에게 부견을 살려두어서 득이 될 것은 없다. 요장도 결국은 부견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8월 26일. 부견은 신평(新平)에 있는 사찰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엄친아의 최후였다. 향년47세. 요장이 부견에게 올린 시호가 장렬천왕(壯烈天王). 부비는 세조(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라고 추증하였다.
첫댓글 모용 위야 나라를 말아먹고 부 견에게 배신까지 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지만 부 견의 죽음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군요. 딱히 요 장을 미워할 일은 없었겠지만 모용 홍과의 싸움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 그에게 절대 좋은 감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원래 적보다 더 밉살스러운 사람이 옆에서 옆구리를 찔러대는 부류이니까요. 여하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