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천운영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를 그려달라고 했다. 남자가 가져온 인쇄물은 거미라기보다는 커다란 홍게처럼 보였다. 새를 먹는 골리앗거미.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의 이름이다.
“이 완벽한 대칭 좀 봐. 꼭 반으로 접어 찍어낸 것 같지 않아?"
남자는 인쇄물 속의 골리앗거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똑같이, 똑같이 그려 줘. 몸을 덮고 있는 이 보송보송한 털까지.”
남자가 원하는 것은 거미의 털이나 대칭으로 잘 뻗은 다리가 아니다. 남자는 협각류의 외피를 원한다. 거미가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에게 위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단단한 외피를 획득한 탓이다. 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 인간의 살갗은 오히려 과일에 가까워 쉽게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인간의 살에 거미의 외피를 그릴 수 있다.
침대에 수건을 까는 동안 남자는 웃옷을 벗고 거미 사진을 이리저리 대보며 문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남자의 등과 가슴에는 길이 30cm의 거대한 거미가 줄을 칠 자리가 없어 보인다. 배꼽을 중심으로 화려한 무늬를 가진 나비의 날개가 펄럭이고 있다.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타고 올라간 대나무는 남자의 팔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켜고 향을 태운다. 송진내를 품은 연기가 유령처럼 방안을 떠돈다. 향내가 사라지면 바늘을 손에 쥔 채 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여러 번 향을 덧꽂을 것이다. 바늘집에서 5호 바늘을 꺼내 알코올램프에 달군다. 불꽃 속의 바늘이 거뭇거뭇해지다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요즘은 에이즈 때문에 다들 기계 문신을 하지. 색도 고르게 나오고 훨씬 안전하거든. 근데 나는 네가 해주는 바늘 문신이 좋아. 기계 문신은 치과 병원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 마취 주사가 잇몸을 뚫고 들어오는 기분 알지? 벙벙하니 떫은 감을 물고 있는 기분인데, 의사들은 마취를 해 놓고는 꼭 옆에 환자를 먼저 치료한단 말야. 그때 들리는 기계 소리. 소름이 돋아.”
남자는 바늘이 소독되는 걸 지켜보며 느릿느릿 말을 한다. 바늘을 내려놓고 소독 솜으로 남자의 허벅지와 내 손을 닦아낸다. 나는 문신을 하는 동안에는 말을 삼간다. 나는 평소에도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내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발설의 욕구는 일종의 충치 같은 거였다. 혀끝에서 거치적거리며 고통을 주는, 그러면서도 잇몸 깊숙이 박혀 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충치. 그것을 뽑아 세상에 보이려 하면 이미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바스러져 버리곤 했다.
남자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말들을 계속할는지도 모른다. 나와 두 번의 거래를 통해서 깨우칠 만도 했지만 거미나 전갈 따위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남자는 두려움을 침묵으로 이겨내지 못했다. 남자에게 독한 코냑을 얼음 없이 한 잔 가득 따라 준다. 약이나 대마초는 내 앞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협각류의 외피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남자는 긴장하고 있다. 내가 유성 펜으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바늘로 그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착색하는 과정보다 처음 밑그림을 그릴 때 더 조심스럽다. 피가 나지도 않고 발갛게 부풀어 오를 정도의 얕은 상처. 지울 수 없는 문신의 문양이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늘을 들고 남자의 무릎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거미의 몸통을 그리기 시작한다. 몸통은 정팔각형 모양이다. 몸에 사방무늬가 있지만 일단 실루엣만 그리면 된다. 몸통 밑에 꼬리 부분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한없이 실이 뽑아져 나올 것 같다. 다섯 쌍의 보각(補角)은 남자의 말대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바늘 끝을 따라 거미가 조금씩 형태를 드러낸다.
남자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다.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올리고 다리는 어정쩡하게 벌린 상태로 누워 있는 남자의 몸은 체념이 무엇인지 아는 듯한 자세다. 바늘이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공격을 가한다면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힘 한 번 못 쓸 것 같다.
허벅지에 문신을 새기는 작업은 등이나 가슴 쪽보다 훨씬 신경이 쓰인다. 상대의 종아리에 올라탄 채 팬티 사이로 비어져 나온 털을 보면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고른 숨소리와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뜻한 바람은 남자의 사타구니를 데우기 충분하다. 남자의 성기는 내가 바늘을 댄 순간부터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해 밑그림이 끝날 즈음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문신을 시작한 이래 내게 성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예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 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게 간절해지거든. 근데 넌 문신 기술은 좋지만 도저히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하긴, 그림을 그려 준 그 많은 놈들이 너한테 덤벼들었다면 너는 매일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 했을 거야.”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꼽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 남자가 말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이유들이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추하다는 추상어가 명백히 눈앞에 펼쳐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
거미 문신에 색을 넣기 위해 염료가 진열된 장식장 앞에 선다. 거미 몸통의 암홍색을 위해서 베네티안 레드와 인디아 잉크, 징크 옥사이드를 고른다. 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거미 다리는 크롬 그린과 암청색 인디고 염료를 사용하면 될 듯하다. 남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털은 티타늄 정도로 하면 느낌이 살아난다. 티타늄은 제트기나 로켓의 재료가 되는 금속인데 안료로도 쓰인다. 은백색의 반짝거림이 있기 때문에 금속성의 칼이나 활 등을 문신할 때 종종 사용한다. 골리앗거미처럼 털이 부스스 일어난 경우에도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여덟 개의 바늘을 알코올램프에 달구어 각각의 바늘귀에 명주실을 꿴다. 바늘 끝에서부터 0.5cm가 남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명주실을 감는다. 명주실을 감을 때에는 실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잉크가 뭉치거나 한꺼번에 나오는 일이 없다. 바늘귀 부분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1cm정도 맨몸으로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주실에 먼저 베니티안 레드를 묻힌다.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이슬이라고 부른다. 첫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내려온다. 붉은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마치 머리 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 주는 듯한 기분. 바늘땀을 뜰 때에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거즈로 피를 찍어내고 잉크의 농도를 확인한다. 일단 첫 땀이 성공적으로 떠지는 것을 확인하면 그때부터 내 손은 빨라지기 시작한다. 속도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고른 색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명주실에 묻은 잉크 양을 조절하며 거미에게 살을 심어 준다. 거미는 어느새 붉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살을 뼈로 감쌀 차례이다. 거미는 인간과 달리 뼈가 밖으로 나와 있는 셈이다. 그것을 외골격이라 하지만 나는 단단한 피부라고 생각한다. 인디아 잉크와 징크 옥사이드로 외피를 완성한다. 크롬 그린이 합류되며 거미는 이제 완벽한 외골격을 갖춘다.
살갗에 묻은 잉크와 피를 닦아내자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골리앗거미는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 밀림 속에서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어느새 밀림 속에 숨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 가느다란 여덟 개의 다리로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미줄에 미끄러지듯 걷는 거미. 발끝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부주의한 청색 나비 한 마리가 내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청색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가 나달나달해지기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다리에 난 섬세한 털로 남자의 몸을 애무하듯 먹잇감을 부드럽게 감싼다. 주사바늘을 꽂듯 나비의 몸통에 촉수를 박는 그 순간.
"기집년들이 보면 환장하겠는 걸?"
남자가 내 어깨를 치며 말한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내 몸의 모든 기가 거미의 촉수로 빨려간 것 같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문다. 남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암홍색 골리앗거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남자는 이제 손바닥만한 외피를 얻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큼 더 강인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 형사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미륵암 주지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일간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출두해 달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미륵암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서 날개 치듯 퍼덕였다.
"듣고 있습니까? 김형자 씨가 어머님 맞죠? 김형자 씨가 미륵암 주지를 죽였답니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왜 이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박영숙 씨가 김형자 씨를 만나 보셔야겠습니다. 여보세요? 듣고 있습니까?"
문 형사는 내게 계속 대답과 반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혀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미륵암 주지, 김봉환을 아십니까? 그 뭐야 법명은 아, 현파. 현파스님이라고."
김봉환이라는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현파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거센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이루며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복숭앗빛 피부의 스님을 기억해 냈다. 스님의 삭발한 머리는 하나하나 깨끗이 손질된 느낌을 주었고, 희끗희끗 올라오는 하얀 머리털은 은회색 모래가 반짝이듯 아름다웠다. 스님이 입은 낡은 승복조차도 언제나 희게 빛이 났다. 그런 스님과 죽음이라니.
나는 전화기 코드를 뽑아 버렸다. 검고 긴 전화선이 꼭 불길한 해충이 나오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한복 저고리를 바느질하던 엄마의 손은 옷감에 새겨진 고급 손수 같았다. 그리고 엄마와 스님과 함께 하던 차시간, 다기에 그려진 대나무보다 곧고 부드럽던 엄마의 손을 따라 떨어지던 옥빛 찻물. 그런 손이 정말 스님을 죽일 수 있었을까? 마치 내가 노사의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못이 박히고 투박한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결정적으로 거부당한 사람이 그렇듯이 나는 곧 냉정해졌다. 보통 때처럼 아침 청소를 하고 밥을 먹었다. 구입해야 할 잉크 목록을 만들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생수를 확인했다.
거대한 곡물 창고를 방불케 하는 대형 마트에는 카트를 밀며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생수 한 묶음과 독한 술 몇 종류를 바구니에 담고 곧장 육류 코너로 향한다. 얼리지 않은 돼지 삼겹살 부위와 아롱사태를 덩어리 채, 살이 제법 붙어 있는 돼지 등뼈를 고른다. 쇠고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떡심이 있는 등심, 스테이크용 안심을 한 팩씩 골라 담는다.
나는 양념하지 않은 고기를 먹는다. 손가락 두께로 썰어서 피가 살짝 날 정도로 구운 쇠고기나 마늘과 양파를 많이 넣고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상추와 같은 야채를 곁들여 먹지도 않는다. 구운 고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채소류가 아니라 하얀 쌀밥이다. 쌀눈이 살짝 비치도록 말간 밥알에 약간 검어진 육류의 핏물이 스며들 때, 고기의 맛은 정점에 이른다.
육류 코너를 떠나다가 쟁반 위에 올려진 붉은 살덩이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둥그런 모양의 고깃덩어리는 꼭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연상시켰다. 말끔하게 정리된 스님의 머리통은 곧 솟아오를 태양과 같았으며, 그 위엄이 넘쳐 어찌 보면 동물적인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론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스님의 머리통에 마오리족의 혈흔문신을 새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삭발한 머리통에서 보였던 동물적인 느낌이 내 뒤틀린 성욕과 함께 희석되어, 고운 여자의 손이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정사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곤 했다.
냉동고에서 서늘한 바람이 몰려온다. 다리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 잊고 있던 감각이 저릿저릿 온몸을 자극하고 있다. 배와 가슴을 따라 급속 냉동되듯 마비증상이 오고, 결국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드러눕는 간질병.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엄마의 손을 잡고 미륵암을 향해 오르던 비탈길. 엄마의 끊임없는 절과 스님의 목탁소리. 주문처럼 온몸을 휘감던 엄마의 염불.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마트에서 빠져나온다. 생수와 고기 팩들, 생활용품 코너에서 생각 없이 집어넣은 변기 청소용 솔이 든 쇼핑봉투가 제법 무겁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진다. 빨리 집에 들어가 커다란 들통에 고기를 삶아 입안 가득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 이 사이로 새어나올 뜨뜻한 육즙이 벌써부터 입안에 가득 고이는 것 같다.
승강기는 칠 층에서 오래 머무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일 층에 부려 놓는다. 변기 청소용 솔 때문에 비닐 봉투가 곧 터질 태세다. 조심스럽게 승강기에 올라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누른다. 이중으로 된 승강기 문은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닫힌다. 두 개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누군가의 손이 안으로 쑥 들어온다. 문이 다시 열리고 좁은 문 사이로 팔뚝과 어깨, 머리가 차례로 들어온다. 왼쪽 다리가 완전히 승강기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 문은 덧없이 활짝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남자는 등을 돌린 채 가쁜 숨을 내뱉고 있다. 남자의 등이 위아래로 심하게 움직였다.
승강기가 움직이지 않는다. 승강기는 여전히 일층에 머물러 있다. 남자와 나는 아무 층수도 누르지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 짐을 한 손에 모아 쥐고 팔 층 버튼을 누른다. '8'자에 녹색 불이 들어오는 동시에 남자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누른다.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비닐 봉투가 찢어지며 물건들이 쏟아진다.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중심을 잃고 핏물이 흐르는 고기 팩 위에 주저앉고 만다. 한 손으로 물건들을 감싸 안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나머지 물건들을 내 가슴에 올려 준다.
금속성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열린다. 승강기에서 내려 나는 오른편으로 남자는 왼편으로 방향을 돌려 걸어간다. 문 앞에 물건들을 쏟아내고 고개를 돌려 남자가 간 곳을 본다. 남자는 나와 거의 같은 속도로 걸어 복도 끝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고 있다. 이쪽 복도 끝이 806호이므로 남자의 집은 801호다. 남자와 나는 승강기를 타고 항상 같은 층에서 내리고 거의 비슷한 거리까지 걸어가서 혼자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승강기를 축으로 반을 접는다면 남자와 나는 한 곳에서 만난다. 골리앗거미의 보각처럼.
문득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던 것 같다. 쇼핑한 물건들을 발로 밀어 넣고 문을 닫는다. 바닥에 뒹구는 고기 봉지에서는 핏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허기가 진다. 당장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아 비닐 포장을 뜯고 맨손으로 날고기를 집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들짐승처럼 입가에 피를 묻힌 채 허겁지겁 먹을 것을 해치우고 포만감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엄마가 정말 현파스님을 죽였을까?
오후 두 시. 집을 나와 한강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길은 두텁고 긴 힘줄처럼 도시 한 가운데로 뻗어 있다. 공중에서 도시를 내려다본다면 껍질을 벗긴 사람의 몸체 같을 것이다. 몸의 구석구석 뻗어 있는 힘줄과 핏줄의 왕성한 전력질주.
스님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미륵암에서의 새끼 고양이를 기억해낸다. 미륵암을 배회하던 수많은 고양이떼. 마당이나 법당까지 함부로 나다니는 고양이들이 무척이나 두려웠었다. 그러나 고양이들은 아름다웠다. 그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몸속에는 온갖 아름다움이 용수철처럼 휘어져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여리고 따뜻하고 조금은 메마른. 스님은 때로 신도들이 가져온 생선대가리나 고깃덩어리를 요사채 앞에서 고양이들에게 던져주곤 했다. 그때마다 눈빛을 번득이며 육질의 맛을 느끼고 있는 고양들을 나는 시기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느 날 땔감으로 쓸 나무더미 사이에 이제 막 낳아 놓은 새끼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새끼 고양이 몸에 손을 대 보았다. 순간 어디선가 어미 고양이가 기습을 가하듯 나타나 등을 굽히며 내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나는 새끼 고양이를 들고 뛰었다.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해 공중변소에 몸을 숨겼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고양이는 작고 여리고 아름다웠다. 새끼 고양이를 변기 속으로 집어던지기까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구더기가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변기통 속으로 새끼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나는 전쟁기념관 앞에 서 있다. 서둘러 입장권을 끊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간다.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대부분 그렇듯이 시대별로 구성된 각 방에는 발굴되었거나 보존된 유물들이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들은 플라스틱이나 밀랍으로 아주 잘 만들어진 모형임을 알 수 있다. 유리관 속에 전시된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스님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한다.
명적(鳴鏑)이 활시위를 떠나 새소리를 내며 심장을 관통하고 칠지도(七支刀)의 일곱 날이 내장을 갈가리 찢는다. 말의 전진을 막기 위해 뿌려 놓았다는 철침 모양의 마름쇠가 스님의 발을 찔러 피가 솟구친다. 빨갱이를 잡던 45구경 권총이나 경기관총 심지어 탱크까지 각종 무기들을 써 보지만 어느 것 하나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좀더 강하면서 잔인한, 증거가 남지 않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그런 방법.
나는 복도 귀퉁이에 있는 귀주대첩 기록화에 발목을 붙잡힌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주는 억세고 포악한 어감이었다. 그러나 그림이 주는 느낌은 포악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다. 바람을 맞아 한 방향으로 몸을 뒤채는 풀들을 그린 풍경화. 창을 들고 달려가는 병사들과 콧김을 뿜으며 돌진하는 말들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바람결을 느끼며 휘파람을 부는 풀숲처럼. 바람에 날리는 갈기는 더 없이 부드러워 보였고 죽음을 마주한 병사들조차 무용을 하듯 행기가 있다.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한 전쟁은 이런 수묵화로 그려진 풍경화가 아니라 원색의 고통과 절규로 점철된 사실화다. 그러나 전쟁에 반드시 있어야 할 피와 살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어지럼증이 인다. 속이 미식거리고 귀울음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허둥거리며 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관람방향을 표시해 놓은 형광 화살표는 관람객의 행보를 규정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기념관 내부의 모든 방을 통해야만 가능하도록. 나는 거인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난쟁이처럼 버둥거리며 방들을 통과하다가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 전쟁 체험실.
입장권을 새로 끊고 철로 된 체험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입장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 손에는 저마다 수첩이 들려 있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문이 열리고 매표원이 나왔다. 매표원은 꼼꼼하게 표를 받으며 사람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 뒤에 처져 매표원에게 표를 건넨다. 매표원은 받은 표를 한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을 내밀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고개를 들어 매표원을 올려본다. 빳빳하게 다려진 유니폼, 날이 선 칼라 사이로 선을 드러낸 하얀 목덜미. 매표원은 801호 남자다. 내 손에서 표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남자가 허리를 굽혀 표를 줍는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다. 체험실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둡다.
어둠 속에서 포성이 울린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발밑에서 불이 번쩍거리고 머리 위로 총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군인들의 고함과 비명, 지원을 청하는 무전 소리, 작전을 지시하는 상사의 외침…….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어둠 속에서 문득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발작의 전조증상과 같은 미세한 전율.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맹수의 움직임과 같았다. 은밀하고 긴장된 숨소리. 뒷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두터운 귓불에 뜨뜻한 입김이 느껴진다.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고 빨라진다. 포격이 멎는다. 동시에 숨소리도 멎는다. 바람이 부는지 옷깃이 휙 날린다. 빨간 조명이 켜지고 아이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밀치며 재빠르게 달려 나간다. 나는 붉은 방을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온다.
801호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숨소리였을까? 코끝에 진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탱크와 헬리콥터가 전시된 마지막 방을 지나 전쟁기념관 밖으로 나왔다. 온몸에 기운이 빠진다. 야외 잔디밭에 전시된 탱크 옆에 길게 눕는다. 어렴풋이 목탁 소리와 엄마의 염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코끝에 맴돌던 화약 냄새는 어느새 연한 향냄새로 바뀌어 있었다. 기념관에서 보았던 장검이 섬광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날렵하고 섬세한 칼날, 그 끝에 정교하게 새겨진 호랑이 문양, 아름답고 영예로운 칼. 나는 그 아름다움에 무릎 꿇고 쇳내 나는 칼날을 개처럼 핥는 꿈을 꾸었다. 혓바닥을 저릿저릿 자극하는 것은 비릿한 강철 냄새 같기도 했고 향냄새나 화약 냄새 같기도 했다.
"부검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노환에 의한 자연사로 잠정결론 내렸습니다. 신도들이 부검을 반대하고 나와서……. 하긴 죽기 전에 스님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답니다. 뭐 땜에 자기가 죽였다고 우겼는지 모르지만 김형자 씨 덕택에 괜한 사람들만 고생했지 뭡니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하는 문형사의 말은 공복에 피우는 새벽 담배처럼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아침이라 경찰서는 한가했다. 그럼에도 문형사는 부산히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내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럼, 엄마가, 스님을, 죽이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렇다니까 그러네요. 어제 김형자 씨는 구치소에서 풀려났습니다. 집으로 갔겠죠."
문형사는 바쁜 일이 있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경찰서 입구 층계에 앉아 분주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신발 부리를 바라보았다. 미아가 된 기분이다. 엄마가 떠난 길목을 바라보며 한복집 앞에 꼼짝도 못하고 있던 그날처럼.
간질발작이 다 나은 이상 엄마와 나는 더 이상 미륵암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한복집 셔터를 올리면서 미륵암에서의 모든 일들을 기억 속에서 삭제시키기로 했다. 내가 죽인 고양이, 스님과 함께 했던 차시간, 짙은 향냄새까지도. 엄마에게 한복 만드는 법을 배워 엄마처럼 고운 옷을 만들리라, 실톳에 밑실을 감거나 옷감 물들이는 일부터, 앞섶의 날렵한 선을 박음질 할 수 있을 때까지 엄마 곁에 꼭 붙어 있겠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나흘 동안 숯물들인 무명 동방의와 바지, 치자물들인 가사를 만들었다.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까지 완벽히 끝났을 때 엄마는 내게 겨자색 보자기에 둘둘 말린 것을 꺼내 놓았다. 엄마가 준 보자기에는 꽤 많은 돈 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스님의 옷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나는 그곳으로 가야겠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스님을 죽인 것은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스님을 죽였다고 생각한 것은 기념관에 전시된 무기들처럼 실현 불가능한 살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전쟁들이 미화되어 있었듯이, 스님의 아름다움을 지켜 주기 위해 누군가가 사건을 은폐시켰을 수도 있다. 나는 미륵암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숲에 둘린 미륵암은 스스로 숲이 된 듯 고요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다. 대웅전과 미륵전은 커다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져 있다. 마당에는 마른 솔잎들이 잔뜩 쌓여 폐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사채로 들어가는 대문 역시 빗장이 질러져 있다. 나는 헐거워져 달그닥거리는 감정의 나사를 단단히 조인다. 대문 옆에 버려진 나무 궤짝에 올라가 요사채 안을 넘겨본다. 미륵암은 기괴할 정도로 깊은 정적에 빠져 있다. 그 많던 고양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손을 뻗어 안으로 잠긴 빗장을 푼다.
부엌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수챗구멍에 밥알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식칼이나 길고 뾰족한 젓가락, 무쇠로 만들어진 솥, 아궁이 속에서 불타는 나무, 한 번의 점화로 요사채를 날릴 수 있는 프레온 가스…….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살인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가 스님을 죽였을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엄마와 내가 머물었던 방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입었을 듯한 옷가지와 이불이 눅눅한 냄새를 풍기며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 가구 하나 없이 휑하다. 창가에 놓인 라면 박스 위에는 엄마가 매일 읽었을 예불 책과 짚으로 만든 바느질 그릇, 반쯤 쓴 싸구려 화장품 등이 얌전히 놓여 있다. 바느질 그릇을 뒤집어 바닥에 쏟아낸다. 흰색 실패가 도르르 굴러간다. 단추와 초크 줄자 등을 넣어 놓은 봉투 하나, 능견으로 만든 침낭(針囊) 하나, 일제 기린표 금도금 바늘 한 쌈, 하늘색 플라스틱 빗, 검은색 머리끈이 다였다.
'머리카락을 넣어 두면 바늘이 녹슬지 않아.' 엄마는 침낭을 열어 머리카락을 넣을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다. 엄마의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은 동그랗게 말린 채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때로 뭉텅으로 빠지는 뻣뻣하고 두터운 내 머리카락도 엄마는 정성스럽게 넣어 주곤 했다. 나는 엄마의 침낭과 바늘쌈을 바지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엄마는 이제 바늘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바늘들은 내가 가지고 가 아름다운 문신을 그리는 데 쓸 것이다. 승전품(勝戰品)을 얻은 것처럼 바늘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심장은 격렬한 박동질을 하고 있었다.
김 사장이 데리고 온 사람은 평생 화투판을 전전했다는 사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유난히 숱이 많은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을 하고 송아지처럼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자의 어깨에는 푸른색 닻이, 가슴팍에는 커다란 사각형이, 배에는 다섯 개의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이기는 내가 외항선 탈 때 단체로 그린기고, 이 네모는 '?_'자 데이.'마산대표'라고 쓸라캤는데 문신하던 놈이 '?_'자만 쓰고는 딸려가뿟다.'?_'자를 이리 크게 써 갖고 우예 마산대표를 다 쓴단 말이고. 그때부터 내 인생은 조져뿐기다. 마산대표도 몬 하는 기 무신 성공이고 성공은."
남자는 밑그림만 덩그러니 남은 문신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섯 개의 직사각형은 오광을 그리려 한 것이라고 했다. 부적처럼 가슴에 품으면 없던 끗발이라도 세울 수 있으리라는 남자의 희망은 공허한 몇 가닥 선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미륵암에 다녀온 이후 두어 번 문신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문신을 해줄 수가 없었다. 김 사장만 아니었다면 며칠째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생수와 고기만 먹으며 지냈을 것이다. 김 사장은 때로 이런 식으로 불시에 손님을 데리고 와 문신을 요구하곤 한다. 그가 데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추잡한 문신을 교정하거나 하루를 꼬박 바늘을 쥐어야 할 복잡한 그림을 원한다. 심지어 자신의 성기에 사무라이의 검을 그려 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그런 무리한 요구에도 난 거부할 수가 없다.
김 사장은 내게 바늘 다루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이다. 엄마가 떠나고 한복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김 사장을 만났다. 김 사장의 쇳덩어리 같은 팔뚝에 새겨진 푸르스름한 자국을 보았을 때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철공소에서 용접을 하는 사람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쇠의 비릿함과 땀내가 섞인 그런 냄새. 김 사장의 팔뚝에 그려진 칼은 아름다웠다. 김 사장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엄마가 바늘을 가지고 옷감에 수를 놓았다면 나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 수를 놓겠다. 김 사장은 내 탈피를 도와줄 빛이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마산대표의 '?_'자는 글자라기보다는 작은 액자처럼 보인다. 육체에 새겨진 글귀는 그걸 새겼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노력'이나 '저축'과 같은 글귀가 그렇다. 한번 열심히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살을 파는 아픔을 이겨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으로 문신에는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 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 넣는다. 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했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 넣는다. 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남자는 거울에 몸을 비춰보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 문신을 마치고 나가는 남자의 어깨가 든든해 보인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바닥에 어질어진 바늘과 염료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염료통과 피를 닦아낸 거즈를 집어 든다. 그때 초인종이 길게 두 번 울린다. 김 사장이 무언가를 놓고 간 모양이라 생각하며 문을 연다.
801호 남자다. 남자는 문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혹시 나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천천히 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오도록 길을 비켜 준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로 간다. 그리고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내가 문을 닫고 옆에 앉기까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매일 다니는 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어. 승강기에서 내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가면, 아침 출근을 하면서 길 건너에서 같은 노선버스를 타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눈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언어는 깊은 사색에서 금방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아채듯 입을 연다.
"당신을, 봤어. 전쟁기념관에서."
"……승강기 안에서 당신과 마주쳤을 때 당신한테서 지독한 화약 냄새를 맡았어. 난 매일 화약 냄새를 맡고 포탄 소리를 듣지. 때로 폭격기 소리를 들으러 모니터가 있는 방에 가기도 해. 그곳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느껴. B29폭격기에서 바람줄기처럼 떨어지는 폭탄 소리 말야."
"왜 폭격 소리를 듣지?"
"나는 전쟁이 좋아. 전쟁은 강하거든. 강함은 힘에서 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힘이야."
"여긴 전쟁 따위는 없어."
"난 당신이 뭘 하는 지 알아.가끔 당신을 찾아온 남자들이 벨을 두 번 눌러야 문을 연다는 것도. 일요일에 신문 배달부나 외판원이 한 번만 누르는 벨소리에는 절대로 문을 안 열어."
"나를 염탐했나? 또 뭘 알지? 나에 대해?"
남자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들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한 표정이지. 왜 그런 표정인지도 알아. 지난달에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가 내게 팔뚝에 새겨진 장검을 보여줬어. 그 사람도 알고 있는 거야. 무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당신처럼, 아름답게 생긴 사람들은, 문신을 하지 않아."
"아름답다고? 내 모습을 봐. 죽은 사람처럼 하얀 이 피부 좀 보란 말야. 내 피부는 선천적으로 너무 하얘서 쉽게 타지도 않아. 구릿빛 피부를 만들어 보려고 하루 종일 선탠을 해본 적도 있어. 그런데 발갛게 달아오르기만 하지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제자리야. 나는 언제나 허약하고 소심해 보여. 난 그게 싫어."
그는 눈을 지릅뜨고 나를 쏘아본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옅은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연한 갈색을 띠는 그의 눈은 꼭 고양이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의심을 잔뜩 품은 눈. 순결을 바치기 직전에 소녀가 가지는 그런 눈. 그는 오래된 치부를 드러내듯 조심스럽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 고참들은 내가 곱살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심한 얼차려를 주곤 했어. 난 정말 꿋꿋하게 이겨냈지. 그런데, 어느 날 내 옆에서 잠자고 있던 고참이 내 바지를 벗기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
"그때 난 알았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거세를 하거나 강해지는 것.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라 생각해? 강해지는 것밖에 없어. 넌 그걸 해 줄 수 있잖아.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 줘. 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
"이건 처녀막처럼 한 번 상처가 나면 다시 봉합할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네 몸에 붙어 있을 텐데 그래도 하겠어?"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그의 손은 막 삶아 낸 고기지방처럼 따뜻하고 보드랍다.
불판 위에 두툼한 쇠고기를 얹는다. 차가운 육질이 뜨거운 불판에 닿자 차사삭 소리를 내며 움츠러든다. 한쪽 면이 익은 고깃점을 뒤집으면서 내심 슈크림이 잔뜩 든 빵을 떠올렸다. 아주 민감한 한숨을 내쉬게 하는 부드럽고 달콤한 슈크림빵. 전화가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님의 죽음을 알려왔던 문형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문형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처럼 뜸을 들이고 있다. 나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문형사의 말을 기다린다. 어금니로 질긴 떡심을 잘라낼 때 문형사는 엄마의 죽음을 전했다. 엄마는 자살했다. 사체는 금정산 계곡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시체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는 시신을 인수해 가라고 문형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명부(冥府)를 읽고 있는 저승사자의 것 같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더 넣는다. 얄팍하게 썬 마늘을 고기 사이에 올린다. 기름이 불 위로 떨어져 방안 가득 단백질 탄내를 풍긴다. 육즙을 흡수한 마늘을 입속에 넣는다. 덜 익은 마늘이 혀끝을 아릿하게 자극한다. 마늘을 씹으며 바위에 찢긴 엄마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상처투성이 여자의 하얀 알몸만 떠오를 뿐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미륵암에서 가져온 엄마의 침낭과 바늘쌈을 찾아본다. 그곳에 다녀온 이후 바지주머니 속에 꼭꼭 박아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침낭 안에 든 엄마의 머리카락을 보면 생각이 날 듯도 하다. 침낭 끈을 푼다. 침낭을 거꾸로 들고 내용물을 털어낸다. 침낭에서 짧은 머리카락과 바늘이 쏟아졌다. 머리카락은 엄마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짧고 거칠어 보인다. 검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닥으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집어 올린다. 그것은 스님의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면도칼을 들고 스님의 머리를 깎는 엄마를 상상한다.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스님의 어깨를 살짝 누르듯 짚고 한 손으로 이발을 하는 엄마. 면도칼 끝에서 스님의 머리카락이 스르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아주 고즈넉한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모아 침낭에 넣었을 엄마의 섬세한 손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찻상을 가운데 두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는 엄마와 스님의 모습처럼.
엄마는 왜 죽이지도 않은 스님을 죽였다고 했을까? 그리고 왜 스스로 목숨은 끊은 것일까? 엄마가 가장 아끼던 일제 바늘쌈을 펼친다. 1호부터 20호까지 금빛 머리를 빛내며 꽂혀 있는 바늘들. 손가락 끝으로 아주 미세한 곡선의 감촉을 느끼며 바늘을 뽑아든다. 갑자기 모든 신경 세포가 한꺼번에 바늘 끝으로 몰린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바늘들을 들여다본다. 스무 개의 바늘은 전부 뾰족한 바늘 끝이 잘려져 있다. 바늘은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채 철사처럼 뭉뚝했다. 엄마는 일부러 바늘 끝을 잘라 낸 것이다.
'바늘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어 봐. 가늘고 뾰족한 바늘 조각은 내장을 휘돌아다니면서 치명적인 상처들을 만들지. 혈관을 따라 심장에 이르면 맥박을 잠재우며 죽음을 부르는데, 아무런 외상도 없어."
엄마의 생생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게 두 번 벨을 누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나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발소리와 문 앞에서 내쉬는 깊은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 하나를 그려 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tanb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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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가 천운영의 등단 작품입니다.(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미경 속을 들여다 보는듯 하군요. 이 글을 보며 작가는 남자일까 ...여자일까를 상상하며 읽었습니다. 이런글 보면 작가들이 소름돋도록 무서워요.
소설들은 왜이렇게 다 아프게 다가오는지.. 올려주셔서 놓치지 않고 덕분에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