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디두모 도마
요한복음 20:19-29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린다. 세계교회가 이어온 부활절 인사를 해보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꼭 9년 전 고난주간에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아직 그 슬픔의 여운이 가지시 않아 마치 엊그제 같이 느껴진다. 여전히 애통해하는 가족들과 또 남의 일이 아닌 모든 국민들의 마음 위에 하늘의 위로가 같이 하시길 빈다.
죽음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누구나 겸손한 인생일 뿐이다.
1)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애통해하였으나, 다만 죽음 앞에서 정성껏 장례 하고자 하였다. 안식 후 첫날, 날이 새기를 기다릴 새 없이 무덤으로 달려간 배경이다. 그는 향품을 발라 드리려고 하였는데, 놀랍게도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부활주일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지난 주일 설교 제목을 ‘그 여자, 막달라 마리아’라고 붙였다. 오늘은 그와 대비하여 ‘그 남자, 디두모 도마’이다. 조금 도발적이다.
물론 여자와 남자를 대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막달라와 도마의 입장을 비교하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격정적이고 따듯하다면, 이성적인 도마의 경우, 차라리 냉정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도마는 누구인가? 그 이름은 베드로나 요한과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다. 영어식으로 베드로는 피터, 요한은 존, 그리고 도마는 톰이다. 도마는 본래 토마스(Thomas)인데, 줄여서 탐(Tom)이라고 불린다.
성경에서 그를 “디무모라 불리는 도마”(24)라고 부른다. 디두모는 헬라어로 쌍동이란 뜻이다. 실은 도마도 쌍동이란 뜻이니 같은 두 단어가 중복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억하는 도마에 대한 가장 큰 특징은 쌍동이가 아니라 ‘의심 많은 도마’라는 인상이다.
부활하신 저녁,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제자들이 문을 닫아 걸고 숨어있는 곳에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문안하셨다. 일상적인 인사이다.
평강, 곧 ‘샬롬’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헤어질 때, 이웃을 방문할 때 등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일상적인 인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신 부활 인사는 마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듯 일상의 회복처럼 느껴진다. 죽음조차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것이 평화의 인사가 주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샬롬으로 인사한다. 그들은 아랍 사람이지만 평화의 인사는 샬롬의 어원에서 왔다. 히브리어와 같은 발음과 의미를 갖고 있다.
“야랍바 쌀라미 암테르 알라이나 쌀람/ 야랍바 쌀라미 임 라 쿠쿠바나 쌀람”(평화의 하나님 평화를 내리소서/ 평화의 하나님 평화를 내리소서)
색동교회는 앞으로 대림절 예배 찬송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그 제목이 ‘평화의 하나님’(알라이나 쌀람)이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의 평화를 전하시고, 이어 상처 입은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일깨우신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그리고 주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 위해, 성령이 필요함을 강조하시며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그리고 나서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를 요약하면 ‘평화, 성령의 임재, 용서와 화해’이다.
2)
그런데 마침 제자 중 한 사람인 ‘그 사람, 디두모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 오늘 초점을 맞추려는 인물은 바로 도마인데, 그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 모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19)는데, 도마는 어디에 있었을지 궁금하다. 함께 모여 위험을 피한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는 홀로 밖에 있었다. 도대체 위험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거리에서 그는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뒤늦게 도마가 들어오자, 다른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마는 귀를 의심하였다. 도마의 직선적 성격으로 보면 사실 규명이 우선이었다.
여드레가 지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그때에는 도마도 그 장소에 있었다. 도마에게는 얼마나 큰 놀라움일까? 도마는 이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었지만,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한 바 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만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다. 처음 오셨을 때 이미 다른 제자들 모두에게 보여주셨다. 이를 확인한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알고 기뻐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다. 예수님은 도마 자신의 말을 상기시키시면서, 도마가 원하는 대로 당신의 상처를 살펴보라고 권하셨다. 이번에는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그래서 도마에게 ‘의심 많은 자’란 불명예스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도마의 경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의심하는 인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물론 그것은 편견이다. 이미 복음서는 도마를 가리켜 용기 있고, 실천적인 인물로 평가해 왔다.
도마는 ‘실증적인 인물’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는 비판적인 인간이었고, 반골이었다. 한마디로 칼 같은 사람이다. 그가 한 의심은 더 올바르게 이해하고, 신뢰하려는 과정이었다.
교회의 전통은 도마를 의심하는 불신앙적 인물이 아닌, 정확한 믿음의 소유자로 이해하고 있다. 도마는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어서, 실제적인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 결과 도마는 장차 목숨까지 걸 만큼 참 믿음을 얻는다. 남보다 더 많은 신앙적 노력과 더 깊은 경건을 실천한 덕분일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한 후 도마는 이렇게 고백한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도마를 보자. 도마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다른 제자들은 망설이고 두려워했지만,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으려고 생각할 만큼 스승을 사랑하였다.
예를 들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하셨을 때 모두가 겁을 먹었다. 이전에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는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도마는 단순한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물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진리를 이끌어 내어 실천하고 있다. 그리하여 진정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도마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유명하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도마의 의심은 의심을 위한 것이 아니다. 더 잘 믿기 위해, 더 구체적인 믿음을 얻으려는, 강렬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주님을 바르게 따르기 위해, 더 멀리 보기 위해, 더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날을 벼리던 제자와 같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도마의 의심보다 더 복된 믿음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29).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보다 더 복된 방법은 ‘보지 않고 믿음’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사실 우리 모두는 한 번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예수님 말씀처럼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으로 믿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를 닮아가는 일, 배우는 일, 믿는 일은 어렵지만, 그러나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사랑을 서로서로 전염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이웃과 세상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염려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3)
부활하신 주님에게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파송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흩어졌다. <도마행전>이란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계 선교를 위해 자신들이 갈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그 결과 도마는 인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도마는 인도 대륙의 첫 복음 전도자였다. 주후 52년경 인도로 건너가, 72년 경에 순교했다고 전한다. 현재 인도 남서부 해안의 케랄라, 타밀나두와 남동부 도시 첸나이(마드라스)에는 도마의 선교사역을 기념하는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평생 인도에서 일하고 있는 이옥희 선교사가 있다. 그는 신학교 시절부터 도마가 인도에 왔다는 사실을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인도인들의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도에서 에큐메니칼 코워커로 일하면서도 사도 도마 기원을 주장하는 인도교회들에 대해서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마드라스 도마 유적지와 코친의 유대인 거리와 유대인 회당을 방문하면서 생각은 수정되었고, 케랄라 여기저기서 시리아 정교회 교우들과의 만남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친 부근에 있는 10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카다마탐 시리아 정교회의 웅장한 모습 앞에서 소리 없이 살아있는 진실에 눈을 떴다.
그는 말한다. “이제 도마교회는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2,000년을 살아 온 도마의 교회가 자랑스럽다.” 도마 십자가는 끝의 네 면에 두 개의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봉오리로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도마의 십자가가 인도 국화인 연꽃으로 장식되었다는 것은 도마가 인도의 사도라는 뜻이 분명하다.
인도 성도마교회에 도마의 무덤이 있다. 이러한 사도적 기원의 교회를 말토마(성도마)교회라고 부르고, 남인도 교회의 200만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자신을 가리켜 ‘성 도마의 크리스챤’이라고 부른다.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된 믿음을 실천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보지 않고 믿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모두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길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심으로 가능하다고 일깨워 준다.
과연 내 의심은 더 바른 믿음으로, 또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를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경건하게 신앙적 실천을 지속하는가?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믿음(믿음으로 구원)에서 성화(거룩하게 되어감)로’ 변화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도마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생생한 믿음이었다. 신앙은 이미 굳어진 존재가 아니라, 바로 되어가는 과정(Becoming)이다. 현재 진행형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거듭남, 새로워짐, 거룩하게 됨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내 믿음을 위해 성령이 도우신다.
참 부활 신앙을 가지려면 인간의 이성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의심과 이성은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22)고 당부하셨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할 때마다, 내 삶이 흔들릴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부활신앙을 통해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