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그림
-혼탁한 세상에 홀로 선 군자의 꽃, 연꽃 [이순미]
등록일
2009-06-29
연꽃은 진흙에서 자랐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속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생명의 빛을 상징하거나 극락정토의 화생(化生)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여 관심을 받으며 다양한 미술품의 대상으로 다루어져왔다.
석도, <애련도(愛蓮圖)>, 종이에 수묵담채,
46x77.8cm, 중국 광주미술관소장
특히 송대(宋代) 철학자로 연꽃을 사랑했던 주돈이(周敦?, 周濂溪, 1017~1073)가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은 더러움에 물 들지 않고 속이 비어도 곧으며 향기는 먼 곳에서 맡을수록 맑기에 군자를 상징한다”라고 한 이후부터 동양의 선비들에게 연꽃은 ‘군자의 꽃’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선비들은 연꽃을 가까이서 감상하기위해 정원에 못을 만들어 이를 가꾸었고, 시문과 그림을 통해 연꽃의 절개를 표현하였다. 따라서 선비들의 연꽃그림은 연꽃처럼 고결한 삶을 살고자 한 자신의 마음이 담겨있다.
명말유민화가 석도(石濤, 1642~1707)는 연꽃그림에 주돈이의 「애련설」을 써넣고, 혼탁한 세상에 살더라도 연꽃처럼 고결하게 살고자 했던 자신의 염원을 담아내었다. 명 황실의 후예였던 그는 당시의 혼란 속에서 연꽃처럼 깨끗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개성있는 연화도를 그렸다. 즉 연꽃에 자신을 의인화하여 자신의 뜻을 강조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 역시 연꽃의 속성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고자 노력하였다. 이들 역시 연꽃을 가꾸고 감상하며 시문과 그림을 통해 연꽃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였다.
주돈이가 연꽃을 감상하는 내용의 <염계상련도(濂溪賞蓮圖)>는 뜰의 연못 정자에서 활짝 핀 연꽃을 감상하는 인물을 담고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염계상련도>가 대표작이며,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혼탁한 세상에 살지만 연꽃처럼 맑게 살고자했던 조선 선비의 모습으로 정선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정선, <염계상련도>, 종이에 수묵담채, 30.3x20.3cm, 우학문화재단소장)
심사정, <홍련도>, 비단에 채색,
29.6x20.7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그러나 연꽃그림은 인물이 등장하기보다는 대부분 새나 연지(蓮池)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많으며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김홍도(金弘道, 1738~1817년 이전) 등 많은 화가들의 그림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심사정의 <홍련도(紅蓮圖)>는 갈대와 새를 배경으로 활짝 핀 연꽃을 그렸는데, 몰골로 부드럽게 그린 초록 연잎을 배경으로 서있는 붉은 색의 연꽃은 도도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집안의 몰락으로 선비로서의 포부를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고고하게 우뚝 선 연꽃에 고결한 자신의 마음을 의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배경에 보이는 한 포기 갈대, 한 송이 연꽃, 한 마리 물새 등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화사하게 채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져 화가의 무거운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외에 연지나 새 등 일체의 배경을 생략하고 오로지 연잎을 배경으로 우뚝 선 연꽃만을 화면 가득 표현해 선비의 고결한 삶에 대한 지향하는 바를 강조한 작품이 있어 주목된다.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은 연잎을 배경으로 서있는 연꽃만을 담고 일체의 배경을 생략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당시의 연꽃그림과는 다른 화풍으로 연꽃에 함축된 상징성이 더욱 강조된 것이다. 이윤영의 연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조선시대 선비들이 염원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윤영은 명문 가문 출신이었으나 평생 출사(出仕)하지 않고 연꽃과 빼어난 돌을 사랑하며 군자처럼 살고자 노력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다. 그는 절개를 상징하는 국화나 매화 등 많은 꽃들 가운데 연꽃을 벗할 만한 덕을 지닌 군자의 꽃으로 품계하였다. 진흙에서 나왔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우뚝 선 연꽃은 혼탁한 세상과 타협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평생 연꽃을 사랑해 직접 가꾸었고, 시문과 그림을 통해 연꽃의 군자적 삶에 대한 자신의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었다. 그는 20대에 지금의 서울 서대문에 위치했던 서지(西池) 근처에 살았다. 서지는 당시 아름다운 반송(盤松)이 많아 반송지(盤松池)라 불리기도 했지만 여름이면 연꽃으로 절경을 이루어 문인들의 풍류장소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그는 서지에 직접 연꽃을 키우기도 하면서 연꽃이 필 무렵이면 이인상(李麟祥, 1710~1760) 등 절친한 벗들과 운치있는 모임을 가지면서, 시문과 서화를 제작하며 연꽃의 고결한 삶을 지향했다. 이러한 모임은 평생동안 지속되었고, 그는 연꽃에 자신의 뜻을 의탁한 그림을 그려 모임을 기념하였다.
이윤영, <연화도>, 종이에 수묵담채,
38.0*26.3cm,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소장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소장 <연화도(蓮花圖)>는 군자처럼 살고자했던 이윤영의 의지를 연꽃에 의탁해 맑게 그려낸 그림이다. 연잎을 배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배치하였는데, 연꽃 뒤의 수초 이외엔 일체의 배경이 생략된 간결한 구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연꽃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당겨져 표현되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화면은 깊이감이 커지고 확장되었다. 연꽃이나 잎맥 등은 물기 많은 담묵의 필선으로 간결하게 그렸으며 연잎 등은 수채화처럼 맑게 채색하였다.
이윤영은 왜 화면에서 배경을 생략하고 연꽃만을 강조하였을까?
이윤영은 평소 상징성이 강한 소재를 즐겨 그렸다. 그는 오랜 세월 변치 않아 높은 절개를 상징하는 괴석이나 소나무 등을 화면 가득 표현하길 좋아했다. 상징성 강한 소재들을 화면 가득 강조한다면, 그 안에 내포된 상징성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즉, 소재를 화면 가득 묘사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뜻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었던 것이다. 연화도 역시 연잎과 연꽃만으로 이루어진 간략한 구도에 간결한 필치로 요점만을 담아내 자신이 지향한 군자의 삶의 모습을 부각시킨 것이다. 혼탁한 세상과 결탁할 수 없었던 이윤영은 진흙 속에서도 깨끗한 자신의 모습을 지켰던 연꽃을 평생 사랑하며, 연꽃에 자신을 의인화하여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연꽃을 통한 군자적 삶에 대한 이윤영의 소망은 20대의 이른 시기부터 확고히 성립되어 평생 동안 지향했던 바였다. 다음의 글에서 우리는 이윤영이 진흙에서 피어났음에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을 혼탁한 세상과 타협할 수 없어 홀로 서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파악하고, 연꽃에 대한 애튼한 마음을 통해 절개있는 군자의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연꽃처럼 고결하게 살고자 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염원과 상통하는 것이다.
“연꽃은 사람들에게 품평(品評)을 많이 받아왔다네…염계(濂溪)선생께서 처음 군자의 꽃으로 생각하셨지만 그 뒤에 다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네…연꽃의 푸른 잎과 붉은 꽃, 하얀 뿌리와 검은 열매는 대개 사시(四時)의 기운을 겸비한 것이고, 반드시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천중(天中)의 시절에만 꽃을 피우는 것은 대개 그 꽃이 오행의 성품을 겸하고 중화(中和)의 덕을 온전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하물며 연(蓮)의 열매는 염제(炎帝)의 경전에 보이듯 생명을 연장하는 상약(上樂)이고 향기는 난초와 같이 맑으며 줄기는 대나무와 같이 비어있고, 잎은 파초나 오동잎처럼 크고 금을 녹인 듯 광택이 난다네. 또 그 꽃은 마치 모란처럼 풍성하고 다듬은 옥과 같이 고결한데 잔 물결에 씻겨 스스로를 깨끗이 하기까지 한다네. 진흙에서 나왔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아 염계 선생의 찬양을 홀로 받아 군자와 벗할만한 덕이 있다고 하였으니, 저 국화의 서늘함과 매화의 청초함 같은 일개 절목에 어찌 비할 수 있겠는가(胤之曰 蓮之爲花受評於人多矣 然從古無一人識蓮之眞 而其稱美者惟佛之徒爲盛 至濂溪先生出而始爲君子之花 是後復無深愛之者 雖草木之類 至德之難 如此哉 元靈遂披宋人花經 見其落置之三品 嗟惜不已 伯玄曰蓮花固當在上等 而梅與菊可相配乎 元靈曰 雖以花之淸遠孤潔 猶當遜美於蓮花耶 胤之曰 夫蓮之碧葉朱花白本玄實備四時之氣 必開花於夏秋之交天中之節 蓋花之兼五行之性 而全中和之德者也 況蓮實著於炎帝之經 爲延壽之上藥 且夫馥淸似蘭 莖通類竹而其葉比蕉桐之大 以光澤如溶金 其花若牧丹之性 而高潔如削玉 至如濯連自潔決出泥不染 爲周夫子之所獨賞 而友德於君子則若夫菊冷梅淸 豈一節之可比哉. 이윤영, 『丹陵遺稿』권 12, 「西池嘗荷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