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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7주일설교 요한복음6:16-21
본문: 요한복음6:16-21
제목: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오늘은 요한복음6:16-21의 말씀을 가지고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전 요즘 넷플렉스를 통해 “더 초즌:선택받은 자”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사 복음서에 있는 내용을 따뜻한 눈길로
그려주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보통은 1시간 30분 정도의 영화로
예수님의 생애를 만들었는데
40-50분 정도 길이로 시리즈를 만들어서
7개의 시즌으로 한 시즌당 8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사건이나
말씀을 거의 다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넷플렉스는 4시즌만 올라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의 장면
그리고 사람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그때마다 제 눈에서 눈물이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고 있는데 제 눈에 눈물이 흘렸습니다.
그냥 그 자체가 은혜이고
감동이고 뜨거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번처럼 감동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날 때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는 장면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이
그런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 기쁨을 누리기 위해
오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1.호수로 가로질러 가고 있는 작은 배
오 천명이 되는 사람이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뒤로 하고
호수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 배 한 척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 배는 육지에서 십 여리쯤 나갔을 때
곧 호수 한 가운데 쯤 왔을 때
폭풍우가 그들을 덥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호수를 건너가라고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들의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원하는 것은
왕이 되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사랑과 충성을 보낸 것은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나 무리들이나 생각이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좀 더 알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에 대한 생각은
무리들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제자들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기대감 때문에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예수를 믿으며
무슨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까요?
그들과 우리는 좀 다를까요?
아마도 상당수의 신자들이
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것을 해결해 주고
그러한 물질의 기초 위에 새로운 사회체계를
가져다주는 것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그래서 하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거듭나는 삶 그래서 성령과 물로
살아가는 삶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잘못된 무리들 중에서
제자들을 그 위험 지역에서 내보내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날이 어두워지고
바다가 흉흉해지자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다른 것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가라고 하니
그들은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풍랑이 일어서 앞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배를 잘 다루는
여러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려는 방향에서 역풍이 불었기에
돌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셨기에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군분투하며
앞으로 가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노를 저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만 할 뿐이었습니다.
아니 낙망된 마음도 있었고
두려움으로 그들은 떨고 있기도 했습니다.
아 이러다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그들의 마음을
하늘과 땅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놀라움과 기쁨과 황홀한 꿈에 빠져서
어찌할바 몰랐던 시간이 있었는데
이렇게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저녁을 맞이할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하루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2.예수님이 배 안에 안 계신 것이
무슨 문제인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저희끼리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들은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것과 풍랑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같이
배에 타고 있을 적에도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8:23-27).
물론 그때 예수님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잠든 예수,
이는 ‘거기 있지 않은 예수’와 같다는 뜻일까요?
우리의 삶에는 오늘도 내일도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아니면 계시기는 한데 그분과 우리가
아무런 교제 없이
그분이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라와 나라 사이에 그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전쟁이 일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그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분명 하나님을 믿고 있을텐데
왜 그렇게 전쟁을 오래토록 그렇게 지독하게 할까요?
말로만 하나님을 믿지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시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너와 나 사이에 그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다툼과 미움의 물결이 높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문제가 발생하고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불안이 일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있다면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지금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참 평안을
그분이 주시는 안전과 질서와 은혜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니 계신 분일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니 계신 분일까요?
아닙니다.
분명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하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과 난리가 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그것은 분명 그분의 아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아니 계신 것은 그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우리 있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이 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본문은 그러한 이야기 나오지 않지만
마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홀로 육지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없음으로
풍랑 속에서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에게 달려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바다를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전쟁터에 있어도 사람들에게 우겨쌈을 당할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에워싼 저 어둠 속에서 그 어둠을 헤치며
서둘러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그들을 물위로 걸어서 찾아온 예수님을
제자들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에 다가오는 예수님을 보고도
말 한마디도 못하고 겁에 질렸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그들 곁으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 위에 걸어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7-8m 물을 뛰어 건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큰 호수를 그것도 5-6km를 걸어서
오는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왔지만
그들은 낮에도 그의 말씀을 들었고
지난 밤도 같이 잠을 잤으며
그분과 함께 식사를 했던 주요 선생이신 예수님을
허깨비 보듯 했습니다.
허깨비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 같은데
없는 것을 말합니다.
무한 경쟁을 부르짖는 자들 틈에서
예수님은 다툼이 없는 세상을 말씀하십니다.
‘무한 사랑’을 이야기 하십니다.
눈이 보이는 것만 보면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고집하는
현실주의자로 자처하는 환상주의자들 눈에는
예수님이 무한 사랑, 무한 베풂은 허깨비 놀음이요
기껏 잘 봐 줘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안의 현실에 감당할 수 없는 풍랑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그렇게 풍랑을 뚫고 다가오는 스승의 모습은
풍랑의 두려운 모습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무지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그 무지가 두려움을 키운 것입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면 아 예수님이구나 해야 합니다.
그런 분이기에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들의 두려움을 깨뜨려 주었습니까?
사나운 바람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한 목소리!
“내다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잘 아는 목소리 늘 들었던 목소리
예수님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들의 무지와 두려움을 찢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나운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두려움이 사라지며 불안이 사라지며
염려가 사라지며 고통이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 믿는 자가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인간의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만
하늘 소리에는 오직 참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참 극적인 순간입니다.
아니 참 아름답고 꿈길같은 순간입니다.
분명 그들은 호수 중간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는 순간에
배는 육지에 도착하였습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두려워 떠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였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배가 육지에 순간적으로
쉭 하고 빨리 도착하였다는 말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아니면
맘에 드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 할 때 어떻습니까?
몇 시간을 이야기 했는데
전혀 그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모릅니다.
제자들이 오병이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꾸다가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에 죽을 뻔 하다가
예수님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다가
바다를 건너 그들에게 다가온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을까요?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니 배가 이미 육지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것이 순간으로 느껴지는 때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예수님과 만남
기쁘게 영접했던 순간
그 경험이 곧 우리로 영원을 살게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과 기도하면서
그분과 동행하면서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 왕이 되기에 충분하신 분입니다.
무리가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그냥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중에 그런 의심을 한 자도 있겠지만
분명히 보았습니다.
왕 정도가 아니라 자연 위에 계신 주님
자연을 넘어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주님을 영접하고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아픔 외로움과 고통
무엇 때문입니까?
왜 풍랑이 두렵고, 왜 고난이 힘들고
왜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없기에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계신 줄은 알지만 교제가 없고
그분을 내 마음에 주장자로 세우지 못하고
그분을 따라 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이 땅은 고해라고 합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면 기쁨이 옵니다.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평안의 바다가 되며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함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분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분 옆에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 교제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떤 상황 중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기는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영접하지 않고 그 안에 살지 않고
그분의 힘으로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의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
그분과 함께하는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서 살아가는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 주님을 음성을 듣고
영접하여 기쁨으로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갔던 제자들처럼
성도님들도 지금 여러분의 처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살게 됨으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