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12월 8일은 일본군의 진주만(眞珠灣) 공격 70주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직접 전투 참가를 꺼려 온 미국은 이 기습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 왔습니다. 1937년에 시작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전은 소위 ‘대동아(大東亞)전쟁’으로 확대되어, 태평양 전역에 걸쳐 미국 주도의 연합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일요일인 1941년 12월 7일 7시 55분에 시작하여 두 시간 계속된 일본 공군과 특수 잠수함의 공격으로 하와이 진주만기지에 있던 미국 태평양함대 군함 20척과 비행기 164대 그리고 병력 2천4백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잔주만 공격과 동시에 시작된 육해군 공동작전으로 일본은 그로부터 3개월의 짧은 시간에 동남아 여러 나라의 연합국 중요 군사기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버마(미얀마) 등 식민지를 장악하는 전과를 올리고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당시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며칠에 한 번씩 ‘전승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며 시가지를 행렬했으며 밤에는 초롱불을 들고 거리를 누비기도 하였습니다. 싱가포르의 영국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마닐라에 주둔하던 미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I shall return(나는 돌아올 것이다)"이란 유명한 고별사를 남기고 호주로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한 일본 신문이 이번에 보ㄷ한 바와 같이, 개전 전의 미국은 항공기 생산에서 일본의 6배, 철강은 20배, 석유 생산은 740배라는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전세(戰勢)는 곧 뒤바뀌고 개전 3년9개월 뒤인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습니다.
그렇게 맞선 두 나라가 진주만공격 70주년 기념일을 맞이한 표정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국에 조기를 걸게 하여 이 ‘치욕의 날’을 잊지 말도록 당부하고,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전국의 애국자가 “미국의 생활 방식을 수호하기 위한” 부름에 호응하여 나라를 지켰다고 찬양했습니다.
진주만 현지에서는 일본 기습이 시작된 7시 55분에 맞추어 기념식을 열어 100여 명의 생존자를 포함한 3천여 명의 인사가 희생자의 넋을 달랬습니다. 생존자 중 작년에 90세로 작고한 한 분은 유언을 남겨 기념식 전날 아직도 해저(海底)에 남아 있는 자기가 근무하던 군함 ‘유타(Utah)’호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예년과 같이 공식적 성명이나 행사는 전연 없었습니다. 다만 유력 일간지 아사히(朝日)신문만이 일본은 진주만에서 세 가지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그 사설은 국가는 위기 상황에서 “단순한 해결을 성급하게 구하지” 말고 둘째 위기 시대에는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세 번째로 세계로 눈을 돌릴 때 국제문제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좁은 시야(視野)의 외교논리를 피하여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로 지금, 강대화(强大化)하는 중국의 의도를 어떻게 보고,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축(再構築)하느냐가 이 나라의 사활(死活)문제로 떠올랐다”고 말한 이 신문은 어느 미국 역사가가 ‘전략적 우행(愚行)’이라고 말한 진주만공격 70주년에 이 세 가지 교훈을 새삼 가슴에 새긴다고 글을 마쳤습니다.
다만 일부 지역의 민간단체에 의하여 양국 희생자 위령제나 평화운동 등 모임이 있었다는 보도는 70주년이라는 매듭의 해 역사적 의의를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주만공격은 우리 민족의 광복을 재촉한 일제의 단말마적 우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전의 우세로 화평협상에서 고지를 점하겠다는 요행을 바란 그들의 승부수는 일본국민뿐 아니라 착취당할 대로 착취당한 우리 민족에 한층 더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인적자원 고갈로 수십만의 우리 젊은 남녀 노동력을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탄광에 강제징집한 일제는 끝내는 4천3백 명의 동포 대학생을 학도병으로 강제 입대시키고 수많은 장정을 징병으로 끌어가고, 심지어는 그들의 결사대인 ‘가미카제(神風)’특공대에 편입시킨 동포까지 있었습니다.
유리한 전황(戰況)만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이나 라디오는 국민을 완전히 오도하고 전쟁과 관계없는 국내 자연재해나 연합군 공습 피해조차도 보도관제 대상이 되어 세상은 정보의 암흑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전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 말기 3년 동안 매년 한 번씩 서부, 동남부, 중부의 순서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매번 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지만 일절 보도가 없었습니다. 지난 3월의 동일본 대지진의 경우를 생각할 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보도관제였습니다.
서양의 식민지를 해방하여 동양민족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수립한다는 미명으로 일제가 붙인 ‘대동아전쟁’이란 이름은 전후 연합국 점령당국의 사용금지령으로 ‘태평양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우익 매체나 인사들은 아직도 이 이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민주 헌법은 채택되었지만 침략 전쟁에 대한 그들의 사과는 독일의 전쟁범죄 사과와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중국 난징(南京)대학살사건, 종군 위안부문제, 교과서 개정문제, 독도 영유권문제 등을 생각할 때 개전 70주년을 맞은 태평양전쟁의 전후처리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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