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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
옛날은 가고 없어도 2018년 10월 4일. 19시. 더 라빌 에메랄드홀
내 인생에서 전무후무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다.
10년 전 딸의 권유로 시작한 노래공부가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이 지나 이 자리에 와 있다. 정확히는
10년 6개월이 되었다.
2008년 4월 어느 날, 딸에 이끌려 강동역 근처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한 것이 시작이다.
내 음역이 바리톤이었는데 늘그막에 성악을 시작하면서
조금은 건방지게 아니 터무니없게 렛슨 선생님한테 테너로
하고 싶다는 부탁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을 것 같다. 세계적인 테너들도 60 중반이 되면
테너를 바리톤으로 내려 연주활동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는 그런 것을 몰랐었고, 노력만하면 될 것으로
생각해서 테너로 하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10년 세월이 흘러 개인 콘서트를 하게 이르렀다.
옛날은 가고 없어도... 작은 제목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이다.
귀하를 초대합니다.
늦게 시작한 성악 공부가
올해로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채웠습니다.
이쯤에서 하나의 매듭을 맺고 싶어
식사 대접을 겸한 조촐한 콘서트를 준비했사오니
편한 마음으로 즐겨 주십시오.
부디 참석하시어 힘찬 에너지를 주시기 바랍니다.
일시 : 2018년 10월 4일 19시
장소 : 더 라빌 2층 에메랄드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73번지)
9호선 봉은사역 1번 출구. 150m
좌석 및 식사 준비를 위해 참석 여부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8년 8월 1일 하남에서 김상연드림
올해가 아내 김주은의 칠순이 되는 해인지라 딸과 사위와
함께 의논한 결과 주인공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연 초 더 라빌과 계약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비밀로 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주인공과 친한 인사들을
초청해야하므로 적절한 시기에 본인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계약 후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 넷이 있을 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주은의 대답은 한마디로 ‘노!’였다.
우여곡절 끝에 내용과 형식을 달리하여 내용적으로는 주인공은
당연히 김주은이 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각자 연구하기로 했다. 그것이
리플렛에 나오는 초대의 글 말미와 콘서트에서 인사말
마지막에 한 줄을 표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내용의 모든
것은 두 줄에 담겨 있지만, 손님들은 칠순과 연결 지어
생각하기는 어려운 대목이다.
형식은 당연히 김상연 콘서트였다.
프로그램의 선곡은 김주은을 생각해서 신경을 썼다.
1,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2. 옛 생각
3. Der einsame Hirte. 외로운 양치기(연주곡)
4. The entertainer from movie “Sting”(피아노 김나희)
5. 강이 풀리면(반주 김나희)
6. Besame mucho(연주곡)
7. Can’t help falling in love(연주곡)
8. Una frutiva lagrima from Opera “L’elisir d’amore”
9. 여행(낭송자 최영채)
10. E luce van le stelle from Opera “Tosca”
11. 앵콜 : O sole mio. 얼굴.
12. 끝 인사.
리플렛 인사말 : 딸의 권유로 시작한 노래 공부,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이 되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냥
저의 변화를 바라본다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조용필이나
도밍도, 파발로티와는 비교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제 곁을 지켜준 아내 김주은에게 이 공연을 바칩니다.
2018년 10월 4일 김상연 올림
콘서트를 마치고 귀가해서 속도 허전하고 하여 맥주 한 캔과
막걸리 한 병을 사와 마시면서 아침에 주은에게 전하려 했던
편지를 낭독하였다.
* 사랑하는 주은에게 *
주은!
1976년 가을. 우리는 명동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다음 해 2월 서두르듯이 우리는 결혼을 했고....
그리고 40년이 지났네요.
꽃다운 그 명동의 아름다운 여인은 올해 칠순이 되었습니다.
못난 남편 때문에 당신은 지금까지 40년 이상 고생만 하셨습니다.
속마음과는 달리 사랑의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이 나에게는
많은 후회를 남기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방법이 서툴고 모자라더라도 이해심 많은 당신을 믿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으로 써도 몇 권이 되겠지만,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부르게 될 노래들은 모두 당신을 위해 심사숙고 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주은!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2018년 10월 4일 못난 남편 상연 드림.
나는 5시 30분부터 악단, 사회자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는 약간의 허기를 채우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고, 나머지
분들은 맛있게 포만감을 즐겼다. 음식은 비교적 괜찮았다.
5시 50분. 안내를 맡은 김상우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나는
지하2층
주차장으로 내려가 6시 40분까지 휴식을 취하고 올라와
홀에 앉아 있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무대 앞쪽으로
나갔다. 턱시도 차림의 내 모습을 보고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과 이용의 ‘잊혀진 계절’의
연주가 끝나고 사회자 멘트가 나오고... 나는 첫 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5번 테이블에 앉은 상태로 시작하여
무대 앞으로 나갔다. 노래가 끝나고 이어서 손님들에게 인사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멀리는 강원도 양양, 원주에서... 충청도 천안, 태안에서...
인천, 용인, 수원에서 오셨고, 교양시, 양주시 동두천에서도
오셨습니다. 가깝게는 삼성동 이웃동네에서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어제 바다 건너 베트남에서 오신 분도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딸의 권유로 시작한 노래 공부,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이
되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지금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은
딸 김나희, 사위 원재광,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렛슨을 받을 때마다 고성방가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준 손자 원김유진에게 사랑을 보냅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나다.친구 없이 사는 것만큼 무서운 사막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응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친구들에게 뜨거운
우정과 사랑을 느끼며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지도해 주신 선생님을 소개 합니다.
먼저 성남문화원에 김정진 선생님, 송파문화원에 성희승 선생님.
서울대학교 김성재 선생님. 세 분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사회를 맡으신 건국대학교 소치형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저의 변화를 바라본다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조용필이나 도밍고, 파발로티와는 비교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제 곁을 지켜준 아내 김주은에게 이 공연을 바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조용필이나 도밍고, 파발로티와는
비교하지 마시고... 그냥 변화된 저를 바라본다는 마음으로
들어주시면 합니다.
지금껏 제 곁을 지켜준 아내 김주은 여사에게 이 공연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노래는 옛 생각입니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느 날, 대방동에 살던 때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가곡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 노래의 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그 음악에 취해서 한참이나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기억이다. 그 후 그 상점 근처에 서서 음악을 듣는 때가
가끔 있었다. 우리 집엔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상점 주인은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일 때부터 성당 복사생활을 시작하여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계속 되었다. 2학년 때부터는 성가대에
들어가 수녀님께 성가를 배웠다. 그 시절 성가대 누나들이
부르는 이태리 가곡이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La Spagnora’ ‘Santa Lucia’ ‘O sole mio’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끔 그 노래들을 흥얼거릴 때가 있다. 우리 가곡
‘가고파’ 도 그때 멜로디를 익힌 노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서울대학교 피아노과를 나오신 이종애
선생님이 음악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교무실에서 이종애
선생님과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요지는 대학을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고, 내 목소리가 매력적이고 감미로운
미성이어서 성악을 전공하면 좋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의견이었다.
그 시절 음악시간에 내 선창으로 친구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곤
한 것이 상담까지 이어진 것이다.
성악공부를 계속해 왔지만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약 4년 전부터다. 가장 먼저 배우게 된 곡이 푸치니
투란도트에 나오는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마라)였는데,
이 노래는 멜로디와 오페라 줄거리와 그 노래의 가사가
너무 맘에 들어서 내 요청으로 처음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나중에 ‘Superstar K 7’이란 TV프로 제작에 오디션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전국적으로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 프로였나 보다.
나는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오디션을 했다. 예약은 딸과 사위가
해서 먼저 줄을 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사진! 날도 덥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었다. 이유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늙은이는 거의 없다.
렛슨 받을 때 아리아를 배우지는 않아도 집에 혼자 있을 때
유튜브에 들어가 세계적인 테너들의 유명한 아리아를 들으며
감탄하곤 하였다.
평생 음악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의 깊은 맛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그 친구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오페라와
우리의 가곡은 그 시절만큼이나 그 깊이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우리 가곡의 수준이 낮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우리 가곡이야말로 우리의 민족 정서에 걸맞아 서정성이나
그 깊이는 우리들이 그 노래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졌다.
지금 나는 아리아 10여 곡과 우리 귀에 익은 이태리 가곡.
우리 가곡 등을 렛슨 시에, 또 문화원에서 배우고 있다.
이렇게 내 생활은 음악과 아주 밀접해져 있다.
음악과 자전거 타기. 산에 오르는 일. 책과 친하게 지내는
일이 내 생활의 큰 트랙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인생철학을 논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 나는 어떤 지인이 나를 보고 ‘지킬 앤 하이드’같다고 한다.
언제는 고상티스트 하다가도 가끔 술잔을 앞에 놓고 말할 때는
삼류철학자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결 같은 것은 좋지만
상황에 따라 재미있게 사는 방법도 괜찮지 않은가 하고
역설하면 크게 잘 못된 것일까...?
이번 콘서트에서 선곡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아까 기록된 여섯 곡이다. 먼저 두 곡은 세미클래식.
두 곡은 우리 가곡. 그리고 마지막 두 곡은 오페라 아리아다.
석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했다.
많이 듣고, 흥얼거리고, 렛슨 시에 선생님한테 지도를 받고,
발성을 연습하고... 반주 팀과 일주일에 한 번 맞추는 일이 계속 되었다.
한강변을 걸으며... 산을 오르내리며.... 자전거를 타면서도
늘 콘서트에서 부를 곡들을 들으며 흥얼댔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소리를 내느냐이다. 그게 잘 되는 날도... 안 되는
날도 있다.
기분이 저조할 때는 노래가 전혀 되지가 않는다. 부를
생각도 안한다. 집 사람과 사소한 일로 다투는 날이면
그날은 노래하고는 이별이다.
기분이 좋은 날이라고 해서 소리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니다.
몸의 컨디션이 매우 중요하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을 좋은 컨디션으로 마무리가 되는
날은 드물다. 더구나 앵콜 곡 O sole mio 마지막 부분을
쉽게 소화하기는 어려웠다. 여섯 곡을 부르면서 에너지가
소진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핸디 캡을 메우는 일은
중간에 많이 쉬는 일이지만,
무작정 많이 쉴 수도 없는 일.
10년이란 긴 시간을 렛슨을 받으며 노력을 하였지만,
세계적인 테너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음악이론의 받침도 없는 사람이 그것도 60대 후반에 성악이란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수를 두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테너들이 있다. 그 옛날에는 카루소, 스테파노,
코렐리 등이 있고, 근자에는 플라시도 도밍고,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발로티, 독일의 카우프만 등의 테너들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들의 노래를 감상하노라면 같은 노래일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분위기에서 부르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모두 표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을 닮고 싶지만, 그것은 희망일 뿐이다.
좋아하는 것과 닮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그들의 음역을 터치하고는 있지만, 그 음색이나 파워와
에너지 넘치는 연주는 따라 할 수 없는 성역?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냥 듣고 행복한 마음으로 감탄할 뿐이다.
지난해부터 생각한 연주 계획이 지난 연초 ‘더 라빌’을 답사하는
것으로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딸과 사위와 같이 답사를
하므로 구체화되었고, 4월 초에 계약을 함으로써 오랜 구상이
실천으로 바뀌었다. 그때만 해도 많은 시간이 남은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서서히 프로그램에 넣을 곡목을 생각하기도 하고 불러보기도 했다.
한두 달 지나면서 곡목이 정해졌지만....
9월 초까지 완전한 프로그램이 정해질 때까지는 수 없이
곡목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내가 하고 싶은 노래보다는
손님을 위해 곡을 정해야 된다는 딸의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 가곡 위주로 할 것인가...? 오페라 아리아 위주로 할 것인가...?
가요는 몇 곡이나 넣어야 할 것인가...? 등 정말로 곡을 정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앵콜을 포함해서 10곡이
되었다. 인터벌을 두고 불러보았다. 많이 힘들다. 성악발성으로
부르지만 목에 데미지를 느낀다. 그날의 컨디션이 최상이라
예상을 해도 10곡은 무리하고 생각해서 획기적으로 6곡으로
줄였다. 또 곡목이 바뀌고 최종적으로 결정이 된 것이 9월 초.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컨디션이 좋은 날은 거의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검단산으로 갔다. 산 밑에 자전거를 매어두고
산을 오르면서 또 하산을 하면서 핸폰에 저장된 노래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기록적인 8월의 더위 속에서도 계속했다.
내 훈련 방법이 최고일 수는 없겠지만, 체력도 키우면서
노래공부도 되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문화원의 선생님이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음악 비전공자인
사람의 박자감은 늘 앞으로 나가야하는 발목을 잡았다.
그것은 공연이 코앞으로 왔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악단들하고 리허설을 할 때마다 비통한? 대목이다.
늘 공연생각으로 하루를 지내는 날도 가끔 있었다.
그냥 즐기는 마음으로 하자는 생각이 들 때는 괜찮았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서 여유와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는 스스로의 최면을 거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중 9월 중순 성남문화원 종강연주에서 도니제티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Una frutiva lagrima’(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송파문화원 종강연주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를 불렀다.
이어서 선생님의 평이 이어진다. ‘젊은 테너들도 표현하기
어려운 아리아를 너무나 잘 불렀다’는 게 선생님의 평이다.
그보다 더한 극찬은 없다.
그날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고, 콘서트에서 오늘처럼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세계적인 테너들도 60대 중반이 되면 바리톤으로 내려
연주생활을 이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2년 전인가...?
도밍고가 잠실종합체육관에서 공연을 할 때도 바리톤의
음역으로 연주를 했었다. 나는 그때 25만원을 들여 2층
구석자리에 앉아 감상한 적이 있다. 그것도 명색은 A석이다.
앞으로 한 번 더 연주 기회가 온다면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에
나오는 ‘그대의 찬손’(Chegelida manina)를 부르고 싶다.
그게 남은 희망이다. 그것도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실려서...
희망으로 끝이 날 공산이 크지만, 꿈은 꾸고 싶다.
이번 콘서트는 내 인생에서 전무후무한 이벤트였지만,
만족스러운 공연은 아니었다. 평소에 부르던 실력이 100%
발휘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미흡한 부분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아주 약간의 여유가 부족함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스 부룩스가 한 말이 생각난다.
“삶은 결함 있는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싸운다는 표현에 큰 매력을 느낀다.
흥분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품격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지난함을 이겨내야 인간은 도약한다는 것이다.
품격유지의 방법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독서를 통해서... 산책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예술을 통해서... 종교생활을 통해서...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더 나은 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어떤 힘은 무엇일까...?
“분명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의욕일 터,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등을 밀어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도 무라카미가 말한 대로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만나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오늘을 잘 살아야하겠지.
나는 일생을 통해 많은 경험들로 점철이 되어 있다.
한참 대학입시 공부에 몰입해야할 고3 여름방학 때
가족을 속이고 가출을 하여 6개월을 부산 대구 등지로 방랑을 했다.
친구 따라
강남에 간다는 것을 따라 하는 경험치고는 너무도 엉뚱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지를 넘나들었던 많은 경험 중에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을 나는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경험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대여섯 번이나...
같이 근무하던 전우가 피습당해 시신으로 실려 올 때의
그 슬펐던 경험과 그를 화장터에서 그의 뼈를 골라
도자기에 담던 일도 세 번이나 있었다.
맹호 9호 작전에서 탱크부대 전원?이 전사하는 참사가
있었을 때 연병장에 늘어선 까만 시체 70구 정도를
한꺼번에 본다는 것은 전장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다. 산 정상에 있던 어떤 중대에서 총기사고가
있어 헌병인 내가 조사를 위해 헬기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헬기에서 내렸으나 중대 막사가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그 중대 막사는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하에 있었던 것이다.
야전 중대원들은 비참한 생활 속에서 죽음을 전제로 달러를
벌어야 했다. 그 시절의 그 경험도 50년이 지나 추억이 되었다.
제대 후 학교에 복직하면 무난한 사회생활을 엮어갈 수 있는
내 인생은 사표를 제출하면서 교사자격이 박탈되었고, 그 후
실직자로서의 여러 해 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렵게 다시 시험을 치러 얻은 교사자격증으로 복직(처음엔
강사 자격)함에 따라 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었을 때,
남의 돈을 빌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수년 동안 갚느라
머리털은 다 빠졌다.
결혼해서도 몇 년이나 집사람 모르게 그 빚을 갚느라 고생도
많았다. 늘 밤늦게 귀가하는 나는 집사람에게 오해도 많이 받았다.
교사시절 지리산 종주와 설악의 공룡능선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산 120 ~ 130개의 산을 휘젓고 다닌 경험 또한 나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다. 여름이면 스쿠버 다이빙하느라 필리핀
바다에서 살았던 몇 년간의 생활도 나에겐 소중한 경험의 하나다.
막판에 명예퇴직을 하고 수련원 영업을 하던 9년 반의 생활은
제 2의 인생을 경험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고 모두 인간이
아니었고, 인간미 넘치는 우정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나를 또 다시 태어나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30대 후반 허리 디스크 수술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 칼을 댔고,
수련원 영업을 하던 중 위암 수술로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도 영업은 계속 이어졌다. 돈은 필요할 때 꼭 있
어야하는 물건이었다.
12월 말에 분당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내차를 몰고 갔다.
그날은 창동에서 덕소 세양청마루 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날이어서
내차를 내가 몰고 입원하러 갔던 것이다. 12월 28일 입원하여
수술 후 1월 5일인가 퇴원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의 위로금은
퇴원비에 상당한 도움이 되어 그분들에게 너무 감사했다.
입원 시 72kg의 체중은 57kg으로 떨어졌고,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체력은 100m도 걷지 못하는 정도의 바닥이었다.
아파트 3층까지 계단을 한 번에 오르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수술 1년 반 만에 친구들과 한라산 정상을 밟은 것에 대해
친구들은 놀랐고 내 체력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각고 끝에 두어 달 만에 아파트 20층을 오르내릴 수 있는
다리 힘을 길렀고, 그 참에 수련원 영업은 3월 초부터 계속
되었다. 돈을 벌어야하는 이유가 연금은 쥐꼬리만 했고,
딸 나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에 입학을 한 상태에서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
차를 몰고 하루 종일 서울과 수도권을 헤매었고. 인천과
양양을 하루에 왕복하고 귀가하면 밤 12시가 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 시절 집사람은 심한 우울증으로 가정의
행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돈이 뭔지? 집사람을 먼저
살려야할 것을 나는 그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돈도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아무튼 내 인생은 다양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강조하고 싶다.
지금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지금 하라!
Do it now!!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지금 하라.
바다가 보고 싶다면 그곳으로... 친구를 보고 싶다면 지금 친구를
만나러 가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거든 바로 지금 하라!
집사람의 우울증이 계속 되면서....
우리 세 식구는 모두 우울증에 걸렸고, 나도 심한 정도의
우울증이란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 여러 차례 자살을 생각하곤 하였다.
산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악이나 지리산에 가서 적당한? 곳을 택하면 남들이
볼 때 자살이 아닐 수도 있었다.
긴 산행을 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난 결론은 내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 가정의 암울함이 내가 죽음으로써 해결되는
게 아니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버리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으로서 택할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나는 그래도 쉽게? 우울증을
극복을 하고 그 암울한 터널을 빠져나왔다. 한 번은 집사람
주은과 딸 나희, 애지중지하던 애견 에코마저 모두 병원에
입원하던 날, 정말로 나는 난감했다. 영업을 하고 지쳐
돌아오는 밤에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모든 힘이 빠져나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프레임’을 그 시절 읽었더라면 더 빨리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을....
우여곡절 끝에 딸은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대학병원의
인턴, 레지던트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 한의학회에 논문을 발표하여
한의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최고의 논문상’을 받아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업적이 있어서인지 대학병원에서
‘최고 의사상’을 받기도 했다.
서한집에 ‘진정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곧 긴
여행을 시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뒤 늦게 시작한 자전거 타기와 여행을 이끌어 준
친구들에게 더 없이 고맙다. 홍재황 친구를 비롯한 잔차팀
모든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10 년간의 성악공부! 2018년 10월 4일의 콘서트는
내 인생에서 전무후무한 경험이 될 것이다. 가족들에게
감사함은 물론이다.
제아무리 출중한 실력이 있다하더라도 혼자 할 수 있게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더불어 콘서트에 오셔서
열 열한 박수와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모든
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단 한 번의 메시지로 초대장을 띄워 200명 넘는 손님이 오신
것에 나는 만족한다. 비록 돈도 없고, 사회적 출세도 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콘서트에 낭송 된 시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손님을 초대하여 대접을 한다는 본연의 뜻이 전도되어
오히려 내가 대접을 받게 상황의 모양새가 조금은 무겁게 자리한다.
오시는 것만으로 감사한데,,,.
과한 축하 금 쑥스럽고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콘서트는 내 생각으로는 성공적이 아니었다. 평소 하던 대로
노래했다면 흡족했을 것을.... 그렇지 못해 못내 아쉽다.
딸이나 집사람. 손님들도 하나 같이 잘했다고 박수를 주었지만,
내 스스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 된 것을 어찌하랴. 먼 훗날이 되면 이것 또한
그리운 추억이 되겠지! 그러나 한 가지 흡족한 부분이 있다면
초대된 손님들의 훈훈한 분위기가 너무나 가족적인 것이었다.
박수도 환성을 지르는 것도 너무 좋았다. 나도 우리 가족도
손님들도 모두 흡족한 대목이다.
그 많은 경험이 이제 와서는 승화되어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 고별사
식사는 잘 하셨는지요?
박수 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오늘 제 인생에서 하나의 매듭을 맺은 것 같아서 스스로
만족합니다. 모든 게 오늘 저에게 박수를 주신 여러분들
덕분이라 생각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헬렌 니어링이라는 미국 작가를 좋아합니다.
그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나오는 그의 평생
동료이자 남편인 스코트 니어링에 대한 표현이
지금도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스코트의 나이는 ‘서리가 내렸으나 온화하고 원기 있는
겨울 같은 것’이었다. 스코트는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원기를 잃지 않고 한결같은 자세로 살아왔다.
그의 칠십대는 노령이 아니었으며, 팔십대는 노쇠하지
않았고, 구십대는 망령이 들지 않았다.
스코트의 삶처럼 여러분들의 앞날에 건강과 행복이
같이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인사를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번 콘서트는 내 인생 막바지에서 가장 큰 이벤트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 성공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는 데 의미를두고 싶고 또 다른 경험(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다.
* 내겐 남겨진 버킨리스트가 있다.
혼자 또는 친구 몇 명과 같이 무동력으로 우리나라 산하를 누비는 일.
내가 이미 올랐던 산 중에서 다시 오르고 싶은 10여개의
산을 다시 오르는 일. (그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히말라야 트래킹은 접었다.)
집사람과 무인도 같은 섬에 몇 달간 살아보는 일.
읽고 싶은 책을 싸들고 산중 깊이 칩거하며 최소한
6개월 간 살아보는 일.
80 전에 이번에 했던 콘서트를 조금은 다른 형태로
해보고 싶은 것 등이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하고 싶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희망과 꿈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하루와 일주일. 한 달을 규모
있게 잘 살아야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시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의 품질은 무한하게 쓰고 싶다. 최근에 내가 살아온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 한다’는 조지 무어의 인생명언의
참뜻을 알기 위해서라도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
다시 한 번 이번 콘서트를 위해 도와준 가족 모두와 현장에서 박수를 주신 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평소 내가 좋아하는 시
‘여행’을 다시 한 번 여러분들과 음미하고자 한다.
여행
길을 선택해야만 했을 때 나는 서쪽으로 난 길을 택했다.
길은 유년기의 숲에서 성공의 도시로 이어져 있었다.
내 가방에는 지식이 가득했지만
두려움과 무거운 것들도 들어 있었다.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재산은
그 도시의 황금 문으로 들어가리라는 이상이었다.
도중에 나는 건널 수 없는 강에 이르렀고
내 꿈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들고 강을 건넜다.
여행은 내가 계획한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비를 맞아 몹시 피곤해진 나는 배낭의
무거운 것들을 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나는 숲 너머에 있는 성공의 도시를 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난 목적지에 도착했어. 온 세상이 부러워할 거야!’
도시에 도착했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있는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목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들여보낼 수 없어. 내 명단엔 당신의 이름이 없어.’
나는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내 삶은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걸어온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곳까지 오면서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을.
도시에 들어갈 순 없었지만
그것이 내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강을 건너고, 비를 피하는 법을 스스로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그것이 고통을 가져다줄지라도.
나는 알았다. 삶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 이상임을.
나의 성공은 도착이 아니라 그 여정에 있음을.
낸시 함멜
2018년 10월 9일 하남에서 상연.
축하 메시지 중 몇 개를 실어본다.
아버지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을 선사한 따님이
정말 장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이 에너지로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어제 붉은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았어요.
기쁜 날 감동의 물결이 넘쳐 집에 오는 내내
울컥했어요....
3. 10월 4일은 평생에 잊지 못할 감동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 선배님의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이어진 삶!
본받고 싶습니다.... 세상의 어떤 공연보다 더욱
감동적이고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4. 감동과 행복을 함께 만들어 주심에 행복했어요.
~~ 처음 느껴보는 순간들이 감동에 눈물이 흐르는
이유가 있겠죠!
5. 선배님! 어제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너무 멋진 무대롸 행복한 가족의 모습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이었습니다. 선배님의 인생 최고입니다.
6. 성공한 콘서트! 감동 그리고 칭찬. 그리고 부러움.
이러한 주위의 분위기를 전하며...
7. 선생님, 흥분을 가라앉히기 쉽지 않아 잠을 설치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렇게 특별하고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콘서트는 제 평생 처음입니다.
시간 내내 미선이와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 오셨을 지에
대해 상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많은
게스트들을 보며 또 한 번 감동했고요.
지금처럼 늘 행복하세요. 다시 한 번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을 상상하며... 지연 엄마.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하여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첫댓글 친구 호선으로부터 자네의 음악 발표회가 있었다는 소식들었다
같은 하늘아래가 아니라 참석은 못했지만 긴글읽으면서 자네의 어려웠던모든것을 이겨내고 오늘을 있게한 친구의
끈기에 박수로 환영한다.
그리고 친구 사모님이 이제 70이셔?
우리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구나 그도 첨안 사실이고~
한마디로 애썼다
기홍! 반갑네!
잘 있지? 콘서트 타이틀이 '옛날은 가고 없어도'...
옛날 얘기를 안 할 수 없어 하다 보니 할 소리 안 할 소리 많이 했네.
마누라도, 딸도 아직 모르고 있던 이야기들도 있지.
이 내용을 이메일로 딸에게 보냈다네. 아직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또 아버지가 고생한 단면도 지금이라도 알려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서 많은 얘기를 써 내려갔다네.
읽는 사람이 조금은 지루할 수는 있겠지만, 마누라와 딸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네.
호선이는 부인 장정임씨가 아파서 지금 병원에 있어.
수술을 하고 지금도 입원 중인가 보네.
위문을 가려고 병원이 어디냐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아
머물러 있지. 마누라 엊그제 중국 여행가면서 꼭 위문을 가라 당부했는데...
콘서트 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어. '김상연 콘서트 이은호 편집'을 치면 볼 수 있으니
무료한 시간에 보면 될 거야. 실패작은 아니어도 성공작도 아니야. 평소 실력만 나왔으면 되었을 것을...
그날의 컨디션과 여유로움 같은 것이 관건임을 !!
그대가 있었기에 너무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었다오!!!
집사람과 함께 희수 나이에 그 엄청난 일을 해 낸 당신의 그 열정과 집념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오.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 이었었오. 많은 것을 생각케 한 행복한 뜻 깊은 시간이었답니다.
그 날이 있기까지 헌신적인 사랑과 수고가 있었기에 애쓰신 어부인님과 훌륭한 따님 김나희 원장님께도 박수를 드립니다.
그 자리에 초대해 준 배려에 깊이 감사드리며 변함없는 미래를 향한 소망을 품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매진하여
우리 친구들의 귀감이 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주기를 기대하며 감사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화이팅!!! 입니다 요~~~
과찬 고맙네. 앞으로 더 잘 살라는 응원의 메시지로 받겠네.
'삶은 결함 있는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다'라고 한
데이비드 부륵스의 말처럼 오늘보다 내일의 내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오늘을 살아야겠지. 지금까지 나는 진국을 닮으려 했으나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군.
그래서 그냥 나대로 살기로 했어. 어떤 위인을 똑같이 닮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더군.
잘 봐 주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정독했어요
얼만큼 후런 하셨을까???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지나치거나 빼먹기를 한다는 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아직도 못다한 말이 있을까? 쫌 궁금합니다요 ~~~
이별의 노래를 바리톤이 부른 것을 음악 자료실에 옮겨 보았습니다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것을 기어코 해낸 상연님의 토종 악바리 근성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기대가 큽니다
콘서트가 있던 날. 임자씨와 함깨하지 못 해 아위웠습니다.
내 인생에 이벤트임에는 틀림없지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난 후에 늘 아쉬움과 작은 후회는 남는 것! 부족했던 부분이 떠올라 2~3일 간은 가슴 한켠 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니 그런 마음의 상태가 바람직하게 바뀌게 되었답니다.
본문에 쓴 것처럼 내게 남은 버키리스트는 몇 가지 안 되지만,
꼭 하고 싶은 것들입니다. 글쎄... 모두 다 할 수 있을까....?
늘 변수가 작용하는 게 인생인지라 그 결과는 나도 모를 일!
희망을 늘 품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김상연 하고 싶은 얘기는 또 남아있습니다.
아니 빠뜨린 이야기들이 있다는 얘기.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많지요.
하고 나면 나도 듣는 사람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