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스님]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스님
"염불로 살아온 삶…염불하다 가고 싶다" 염불 좋아 13살때 남고사 입산 15살 때 운허스님 따라 봉선사 강원 졸업 후 오로지 염불수행 일응스님 문하서 동교소리 사사 후진 양성 조계종의례체계 정립 ‘50년 한길’ 기록영상작업 진행
2023-07-14 봉선사=박봉영 기자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염불원, 봉선사 주지를 지낸 염불원장 인묵스님의 주석처다. 범음범패 전통을 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염불이 좋아 출가한 이후 한 평생 종단의 의례문화와 의식체계 연구와 정립에 힘쓰며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다. 봉선사가 ‘교종본찰’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염불원을 둔 이유는 종단의 의례의식을 대표하는 어산어장(魚山魚丈)이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불이 좋아 출가한 인묵스님은 염불과 범패를 평생의 수행으로 삼아 의례 연구, 종단의 의례체계 확립 등에 힘쓰며 조계종단의 의례를 대표하는 어산어장(魚山魚丈)에 올랐다.
염불이 좋아 출가한 인묵스님은 염불과 범패를 평생의 수행으로 삼아 의례 연구, 종단의 의례체계 확립 등에 힘쓰며 조계종단의 의례를 대표하는 어산어장(魚山魚丈)에 올랐다.
오로지 한길만 걸어왔다. 염불을 좇아 출가했고, 평생 염불 연구에 정진했다. 종단의 의례사를 논하고자 하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명사,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스님의 삶이 그렇다.
15살이던 1972년, 개운사 대원암 강원의 큰어른 운허스님의 손에 이끌려 광릉내 봉선사로 왔다. 운허스님은 염불을 하고 싶다는 어린 사미를 월운스님에게 맡겼다.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선명한 말씀. “은사갈이는 하면 안돼. 경전 먼저 공부해야 한다.”
참 많이도 변했다. 5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당시 봉선사에는 나이 어린 사미승이 여럿 있었다. 광동학교가 봉선사 아래 사하촌에 있을 때, 모두 그곳에 다녔다. 하지만 인묵스님은 그마저 가질 못했다. 절집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사미승들은 지금 단 한명도 사중에 남아있지 않다. 실은 그 이유 때문이란걸 인묵스님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곱게 다린 교복 빼입고, 고무신 대신 구두 신고, 걸망 대신 가죽가방을 메고 싶던 나이였다.
인묵스님은 월운스님의 뜻에 따라 광동학교 대신 봉선사 홍법강원에 입학했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법주사 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사집, 사교를 마친 뒤 봉선사 강원으로 돌아왔다. 대교반에 해당하는 경반을 이수하고서야 출가 때 다짐했던 염불공부를 시작했다.
인묵스님은 조계종 범음범패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어장이다. 무형문화재 작법무 보유자였던 부친 일응스님으로부터 사사하고 조계종 의례체계를 세운 공로자다. 지금 조계종의 범패는 개운사를 중심으로 한 동교소리(東郊, 서울 동쪽의 범패)가 주축이다. 조계종의 유일한 범패 보유자였던 운공스님이 중심이었고, 운공스님 입적 후 인묵스님에 의해 맥이 계승됐다. “맛이 다르다”고 표현하는 지역별, 종단별 범패의 특성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조계종 범패의 맥을 계승하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다.
인묵스님의 동교소리는 부친 일응스님이 전주 범패를 기반으로 했기에 호남의 소리가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묵스님은 봉선사와 서울 무학동 송림사를 오가며 일응스님으로부터 범패와 작법을 배웠다. 배우고 익히기를 20년, 비로소 조계종 범패가 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고종 송암스님의 맥을 잇는 범패가 여전히 종단 내 양립한 상황을 놓고 보면 조계종 범패의 자존심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학을 길러내 조계종단 범패의 맥을 잇고자 하는 노력도 이어졌다. 1997년 교육원 산하 어산작법학교를 세우고 길러낸 졸업생이 200명이 넘는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에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강단에 섰다. 덕분에 일반 스님들도 행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재의식이 활성화, 대중화될 수 있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종단 내에 어산종장이 여럿 나온 점 역시 성과로 꼽힌다.
그러나 불교의례 중에서도 전문적 영역에 해당하는 범패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고 있는 추세와 의례 간소화 또는 축약화는 범패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인묵스님은 “요즘은 조건이 좋은데도 배우고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후진 양성이 어렵고, 의례 시간을 줄이려다보니 본질이 왜곡될 우려도 안고 있다”며 “범패를 비롯한 불교내 무형유산을 올바르게 전승하기 위해서는 꼭 풀어야할 과제”라고 했다.
염불을 평생의 공부로 삼아 살아온 인묵스님에게 의례의식을 가벼이 여기는 듯한 승가의 풍속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전문적인 범패를 잘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염불 조차 하지 못하는 스님들이 있다며 “율조가 멋드러진 염불 정도는 아니라도 온 정성이 담긴 염불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신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며 “옛 것은 전승하되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아야 하고, 의식이 살아야 종교가 산다”고 강조했다.
인묵스님은 요즘 영상기록을 남기는 중이다. 범패 분야가 워낙 방대해 수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기대하는 것 없이 염불하며 살아온 평생의 삶, 조계종단 의례체계를 세우고 후학들을 길러내며 의례를 전승 발전시켜온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돌아보더라도 시줏밥 부끄럽지 않은 삶이다. “염불이 좋아 출가했고 평생을 염불수행으로 살았으니 염불하다가 가는 것이 마지막 원”이라고 했다. 영상기록은 지난 50년의 삶을 담는 작업과 다름 아니다.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스님.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스님.
인묵스님은
조계종 어산어장. 호남 범음과 서울 범음의 계보를 이은 부친 일응스님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염불소리를 듣고 자랐다. 13살 때 전주 남고사로 입산, 삼학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 1년만에 삼학스님이 입적하자 개운사 대원암에 주석 중이던 대강백 운허스님 손에 이끌려 봉선사로 가 월운스님을 법사로 입실건당했다. 봉선사 강원과 법주사 강원을 거치며 대교를 마치고 염불을 배웠다. 일응스님으로부터 범음범패를 사사하고 염불을 평생 수행으로 삼아 정진해왔다. 양주 회암사 주지, 동두천 자재암 주지,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주지 소임과 더불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조계종 어산작법학교장, 조계종 의례위원장 등을 거치며 조계종단의 의례의식 정립에 진력해왔다. 지금은 봉선사 염불원장, 재심호계위원 등을 맡고 있다.
[불교신문 3777호/2023년7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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