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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의 어원은 무엇인가?
경기도 구리시 지명&동명 유래
구리시의 어원은 무엇인가?
1914년 3월 1일 부, 군, 면 폐합 때 부령(府令) 제111호로 당시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과 구지면(九旨面) 그리고 노해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구지면의 '구'자와 망우리면의 '리'자를 합하여 구리면(九里面)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현 구리 지역의 옛 명칭인 '구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 구리시의 옛 명칭은 구지(龜旨,九旨)였다. 그 구지(龜旨)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1530년 조선 중기인데 그 이전의 책에서는 구지라는 명칭을 찾을 수 없다. 한편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는 '구지(九旨)'라 표기되어 있다. 즉 '구지'의 한자 표기는 '구지(龜旨)'가 일반적이었지만 '구지(九旨)'라는 표기도 아울러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구지'의 어원을 살펴보면 육지가 강이나 바다로 돌출한 지역을 '곶'이라 하는데 구리지역은 한강과 왕산내로 둘러싸인 곶으로 볼 수 있다. 곶이 고지로, 고지가 구지로 변하여 이에 해당하는 소리를 한자로 '구지(龜旨)', '구지(九旨)'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리의 유래
땅에 이름이 붙는 유래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지세 즉, 생긴 모양 또는 방향에 따라 지어진 것이 있고, 그 고장에 특징적으로 많이 나는 식물, 동물 또는 특산물에 따라 지어진 것이 있다. 또한 그 지역에 많이 사는 성씨에 따라 지어진 것도 있으며,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지명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한 지명에는 땅의 이름은 물론이고 바다의 이름, 내(川)의 이름들까지 포함되어 지표상의 모든 이름이 그 대상이 된다. 지명은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지리학 및 어원학 등의 학문에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고유지명은 대체로 신라의 삼국통일 후 한자화되었다. 그런데 지명의 유래를 살피는 데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지명에는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화하면서 고유지명의 근원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에 맞게 다시 만든 것이 많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새말'이라는 고유지명이 있을 때 그 유래를 따지지 않고 이를 한자화할 경우 '새롭다'는 의미의 신(新)자를 넣어 신촌, 또 '쇠'라는 의미의 금(金)을 넣어 금촌, 또 '사이'라는 의미의 간(間)자를 넣어 간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와 지리적인 형세가 반영되어 있는 이러한 고유지명의 유래가 일제에게는 소중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편의대로 한자화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의 주변에서 일고 있는 고유지명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구리'라는 명칭은 1914년 3월 1일 부, 군, 면 폐합 때 부령(府令) 제111호로 당시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과 구지면(九旨面) 그리고 노해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구지면의 '구'자와 망우리면의 '리'자를 합하여 구리면(九里面)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현 구리 지역의 옛 명칭인 '구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 구리시의 옛 명칭은 구지(龜旨,九旨)였다. 그 구지(龜旨)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1530년 조선 중기인데 그 이전의 책에서는 구지라는 명칭을 찾을 수 없다. 한편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는 '구지(九旨)'라 표기되어 있다. 즉 '구지'의 한자 표기는 '구지(龜旨)'가 일반적이었지만 '구지(九旨)'라는 표기도 아울러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구지'의 어원을 살펴보면 육지가 강이나 바다로 돌출한 지역을 '곶'이라 하는데 구리지역은 한강과 왕산내로 둘러싸인 곶으로 볼 수 있다. 곶이 고지로, 고지가 구지로 변하여 이에 해당하는 소리를 한자로 '구지(龜旨)', '구지(九旨)'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산,천,고개의 유래
산의유래
::: 아차산 :::
구리시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두 가지 표기가 나타난다. 지금의 '아차(峨嵯)'와 음과 뜻이 똑같은 명칭은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 처음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이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차산은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며 마을사람들은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과 유사한 명칭은 『경기지(京畿誌)』양주조에 화양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설명한 데서 나타난다. 이 악계산은 아차산과 같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아차산 서쪽 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와 '아단'의 뜻은 일반적으로 '작은' 또는 '아들'로 보고 있다.
::: 검암산,구릉산 :::
동구릉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동구릉이 있다 하여 일 반적으로 구릉산이라 부르지만 「건원릉비」에는 '검암산(儉巖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는 '검암산(儉岩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소나무가 울창한 산의 색이 검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주변 마을사람들은 금암산(錦岩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릉산이라는 명칭은 아홉 개의 능이 모두 들어선 이후의 명칭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천의 유래
::: 왕숙천, 왕산내 :::
왕숙천은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신입리에서 발원하여 구리시 북쪽으로 흘러 동쪽을 감싸고 돌아 한강으로 합류한다. 이 역시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즉, 태조가 묘자리를 구하러 와서 냇가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하여 '왕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사료적인 근거는 없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숙천은 '풍양천(豊壤川)'으로 나타나 있다. 『경기지』양주조에는 왕숙탄(王宿灘)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동지지』에는 '왕산천(王山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사람들은 대대로 왕산내로 부르고 있다.
고개의 유래
::: 망우리고개 :::
구리시와 서울특별시 경계에 있는 고개로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이다. 역사적인 일화에 의해 붙은 이름으로 조선 태조가 말년에 이 고개를 넘어 현 건원릉 자리에 자신이 묻힐 묘자리를 정하고 난 후 근심을 잊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조실록』권31, 9년 12일 임인조와『세조실록』권41, 13년1일 기묘조에는 망올리(亡兀里·芒兀里)라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망우(忘憂)의 유래는 후세인들이 지어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숫돌고개 :::
두레물골 서쪽에서 갈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 주위에서 숫돌이 난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다.
동의 유래
갈매동
조선시대부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는 양주군 노원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원면의 담터와 구지면의 사노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갈매리라 하였다. 이때 구리면의 한 리가 되었으며 1979년 갈매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갈매동이 되었다. 마을 주위의 산의 모습이 칡과 매화와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갈매동 북북서 방향에 불암산이 있고 북동족 방향에는 진접의 테미산이 있다. 풍수지리적인 해설에 의하면 목마른 말이 화접리에 있는 샘말의 물을 먹는 형국인 '갈마음수'형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마가 갈매로 바뀐 것이라는 설도 있다.
::: 담터, 장기(墻基) :::
삼화농장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동 6, 7, 8, 9,통 지역을 말하며 북쪽과 서쪽으로 둘러싼 작은 야산들이 마치 마을을 담으로 둘러싼 듯하여 붙은 이름이다.
::: 범데미, 범더미 :::
갈매초등학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동 4,5동 지역을 말한다. 옛날 서울로 넘어가는 고개에 범이 자주 나타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동에서 남양주시 퇴계원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1950년대에는 길을 경계로 남쪽에는 2~3채의 집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구리농협 갈매지소를 비롯하여 약 40여 호가 들어서 있다.
::: 섬말.도촌(島村) :::
갈매초등학교에서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암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마을을 좌우로 둘러싸고 흘러 마치 섬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운데섬말이라고도 하며 약 30~40호가 모여산다
동구동
1986년 1월 1일 시 승격과 함께 조례 제87호에 의하여 사노리와 인창리 일부를 합쳐, 동구릉의 이름을 따서 동구동이라 하였다. 행정동 명칭이다.
::: 사노동 :::
시 승격 당시 개편된 7개 법정동 중의 하나이다. 안말, 두레물골, 양지말, 언제말 등 네개의 마을이 원래 사노리였다. 태조의 건원릉을 만들 때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 살았다고 하는데, 이때 지금의 안말에 박씨, 두레물골에 추씨 양지말에 주씨, 언제말에 엄씨 성을 가진 4명의 노인들이 부역이 끝나고 그대로 눌러 살아 사노리(四老里)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옛 족보 또는 옛 비문에는 사노리(沙老里)로 표기되어 있어 그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건원릉 부역민의 일부 사람들이 마을에 남았다는 것은 사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사노'를 네 명의 노인들과 연관시킨 것은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지금은 여덟 개의 마을로 되어 있다.
::: 두레물골 :::
안말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에 단 한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물을 마을사람들이 모두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두레는 그 어원이 '두레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돌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의 장례에 부역으로 동원된 추씨가 정착한 곳이라 전해진다.
::: 안말, 내동, 응달말 :::
두레물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웃말과 아랫말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의 동구동 5통 지역이 웃말이었고 14통 지역이 아랫말이었다. 지금은 약100여 호가 모여 산다. 태조의 장례에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박씨가 남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 양지말 :::
두레물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을 향해 양지바른 곳에 있다. 태조건원릉을 조성할 때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주씨가 남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 언제말, 언촌 :::
양지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태조 건원릉의 조영에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엄씨가 남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 최촌(崔村)말, 간촌(間村) :::
베틀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중엽부터 최씨들이 많이 살아 최촌말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에 간촌으로 바뀌었으나, 아직까지 최촌말이라는 말이 남아 있다.
::: 동구릉 :::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아홉개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동구릉의 옛 명칭은 [영조실록] 33년 5월 18일 무신년조에 "호랑이가 동오릉(東五陵)에 들어갔으므로 군문(軍門)에 명하여 잡도록 하였다"는 데서 처음 나타난다. [여지도서]에는 '육릉동'이라 표기되어 있고 1842년경 간행된 (경기지)에 있는 지도에는 '칠릉'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구릉'은 능이 새로 생길 때마다 시기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동구릉으로 명칭이 정착된 시기는 1855년으로 추존왕 익종의 묘를 용마봉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9개의 능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인창동
구리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 북쪽에 있는 동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구지면의 동창리(東倉里)와 인장리(仁章里)의 각 일부를 합쳐, 인장리의 '인'자와 동창리의 '창'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궁말, 동창, 간촌이 합쳐 인창동이 되었다. 법정동 역시 인창동이지만 일부가 동구동과 교문동으로 포함되었다.
::: 동창, 창말, 창동:::
동구릉 주위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쪽 방향으로 약 30리 지점에 있었던 동창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동개, 웃말, 아랫말, 샛말을 모두 합쳐 동창이라 부른다.
::: 베틀고개 :::
간촌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왕숙천이 넘쳐 흘렀을 때 이 고개에서 배를 타고 피하였다하여 배탈고개인데, 이것이 후에 베틀고개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배탈'에 대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 배를 탈 수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금 이곳에는 구리시에서 처음으로 남양주시 공무원 주택이 들어섰고, 영세한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교문1, 2동
예로부터 양주군 구지면 지역으로 '교문'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문동(里門洞)과 백교리(白橋里) 전부, 인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교의 '교'자와 이문의 '문'자를 따서 교문리라 한 데서 유래한다. 1986년 시 승격에 따라 7개 법정동의 하나로 교문동이 되었다. 또한 옛 이문안, 한다리, 아천동 등을 포함하여 6개 행정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95년 교문 1,2동으로 분동되었다.
::: 아천동 :::
예로부터 양주군 구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아차동(峨嵯洞) 과 우미천리(牛尾川里) 전부, 토막리(土幕里)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아차동의 '아'자와 우미천리의 '천'자를 따서 아천리라 하였다. 1986년 1월1일 조례 86호에 의해 7개 법정동의 하나로 아천동이 되었다. 당시 행정동으로는 교문동에 속했으며 현재는 교문1동지역이다.
::: 딸기원 :::
교문사거리에서 망우리로 넘어가는 고개 좌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설 때 딸기밭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덕고개(德 峴) :::
지금의 교문사거리에 있던 마을이다. 옛날 전염병이 돌면 병에 걸린 사람을 덕에 매달아 놓은 고개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곳을 윗덕고개라고 불렀고 지금의 전화국 근처를 아랫덕고개라고 하였다.
::: 도리미 :::
샛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이 마을 앞을 돌아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옛날 이곳에서 질그릇을 만들었다 하여 도리미라고도 한다. 1956년에 발간된 [경녕군파(敬寧君波) 선원이씨세보(璿源李氏世譜)]에 있는 지도에는 '도림(桃林)'이라 표기되어 있다. 마을 앞을 돌아갔다고 하는 길은 지금은 없어졌다.
::: 박 촌 :::
샛다리 북쪽과 안골의 남쪽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밀양 박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박씨 성을 가진 호수는 옛날에는 16호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0호 정도만 남아 있다.
::: 백교(白橋), 한다리 :::
아치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는 '한교( 韓橋)', 규장각에 있는 고문서에는 '일교(一橋)', 1912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구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백교'라 표기되어 있다. 1956년에 발간된 [경녕군파 선원이씨세보]에 있는 지도에는 '대교(大橋)'라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을 한자말인 '한(漢)', '대(大)' '일(一)'자 등으로 대신 쓴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곳의 원 지명은 한다리인데 일제시대에 '흰다리'라고 하여 이것이 다시 '백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한다리'가 옳은 지명이라고 한다.
::: 아치울 :::
아차산 동쪽 골짜기 가운데 가장 넓고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구리시와 서울시 광장동 간 4차선 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60여 채의 집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수백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옛날 아치울에는 응달짝, 양지짝, 웃골 등의 소지명이 있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는 아차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 우미내(牛尾川) :::
아차산의 대성암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서울특별시의 워커힐에서 구리시로 들어오면서 처음 나타나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너머말, 양지말, 건너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너말, 양지말이 있던 자리에 K1기지가 들어섰고 너머말만 남아 있다. 지금도 이 너머말을 우미내로 부른다. 우미내는 이 마을 주위의 산이 바위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나무가 잘 자라고 소나무 움을 베어내도 잘 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1912년에 발행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우미천리'라 표기되어 있다.
::: 이문안 :::
아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골짜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리(里)를 표시하는 문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문의 본래 뜻은 커다랗게 동네 어구를 가로막아 낸 문을 가리킨다. 이문을 세운 목적은 도적떼를 막기 위한 것이며, 마을 앞에 방책과 출입문을 갖추어 세우고 밤에는 통행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안골, 박촌(아랫말), 샛다리, 도리미, 가능골, 갈매지 등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 동사골 :::
K1기지에서 북쪽 산자락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3~4채의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새로 마을이 조성되고 있다. 동산 너머에 있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 미암(米岩) :::
대성암 뒤편에 있는 바위 구멍이다. 전해져 오는 얘기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수도할 때 천공미(天供米)가 나온 구멍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시루봉 :::
윗골 북쪽에 있는 아차산의 봉우리이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남양 홍씨에게 내려 준 사패산(賜牌山)이라고 한다. 봉우리가 시루처럼 넓다 하여 시루봉이라고 하며, 한다리에 살던 내시와 남양 홍씨들 간에 땅 싸움이 벌어져 시위봉이라고도 한다. [경녕군파 선원이씨세보]에 있는 지도에는 '태자봉(太子峰)'이라 표기되어 있다.
수택 1, 2, 3동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택리(水澤里), 인장리, 평촌리 각 일부, 미음면, 수변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택리라 하였다. 1986년 1월 1일 조례 86호에 의해 7개 법정동의 하나인 수택동으로 바뀌었다. 시 승격 당시 법정동 수택동은 행정동으로는 수택동에 속했으나 1996년부터 행정동 개편에 의해 수택 1동에 속하게 되었고 동시에 수택동 일부, 교문동 일부, 토평동 전 지역을 포괄했던 수평동은 수택2, 3동으로 개편되었다. '수택'이라는 명칭은 옛부터 왕숙천이 범람하면서 만들어진 여러 개의 늪이 있어 수누피, 수늪이라 불려왔다. 북쪽으로는 남양주시로 가는 8차선 도로가 나 있고 동쪽으로는 왕숙천이 흐른다. 수택동지역은 구리시의 중심 번화가로 옛 마을로는 수누피, 검배, 이촌 등이 있었으나 , 지금은 그 형태를 찾을 수 없고 현대식상가와 주거지로 변하였다.
::: 토평동 :::
조선시대부터 양주군 구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지면 평촌리, 토막리, 수택리 각 일부와 미음변 수변리, 석도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토막리의 '토'자와 평촌리의 '평'자를 따서 토평리라 하였다. 1986년 1월 1일 조례 86호에 의해 구리시 7개 법정동의 하나로 토평동이 되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수택3동에 속한다.
::: 수평동 :::
시 승격 당시 구리시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6개 행정동 가운데 하나로 1986년 1월 1일 시 승격에 따라 토평리 전부와 수택리, 교문리 일부 지역을 합쳐 수평동이라 하였으나, 1996년 행정동 개편에 따라 동명이 폐지되고 수택2, 3동으로 개편되었다.
::: 검 배 :::
구 구리시 보건소 주위에 있던 마을이다. 원래는 크고 검은 바위가 있어 검배라 불렸는데 일제 때 신대촌으로 바뀌었다. 일제시대 때의 신대촌(새터말)은 새말(신촌)과 구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구말은 안말 또는 너머말 등으로 불렸다. 현재 이러한 소지명들은 다 없어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 지역을 검배라고 부른다.
::: 돌 섬 :::
벌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미음면에 속한 마을이었느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법정동 토평동에 속하여 구리면 관할이 되었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석도(石島)'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름 그대로 돌이 많은 섬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 벌 말 :::
돌섬 북서쪽 들판에 있는 마을이다. 이름 그대로 벌판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자로는 '평촌(坪村)'으로 표기한다. 벌말의 서쪽마을을 아랫말이라 하고 동쪽마을을 웃말이라고 한다.
::: 수누피, 수늪 :::
수평동사무소(현 수택2동사무소)주위에 있던 마을로 '원수택'이라고도 한다. 지명으로 보아 이 지역이 옛 수택동의 중심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누피 가운데 있던 마을을 '가운뎃말'이라고 하였다.
::: 이촌(李村) :::
일화제약 주위에 있던 마을이다. 전주 이씨들이 모여 살아 붙은 이름이다. 이촌마을에는 술막, 그렁둔지(기롱둘기) 등의 소지명이 있었다.
::: 장자마을 :::
벌말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장자늪과 관련된 마을은 아니다. 1970년대 중랑교의 제방둑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생긴 마을이다.
::: 장자늪 :::
꼼장늪 남서쪽에 있는 늪이다. 잘 알려진 관련 설화가 있는데, 돈에 인색한 장자(부자)가 살던 집터로 동냥 온 중에게 쇠똥을 퍼주고 천벌을 받아 늪으로 변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