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간 한국전쟁 5】
한국전쟁기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마을에는 반드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마을이 좌익마을이든 우익마을이든,혹은 좌우익으로 나뉜 마을이든,그 마을이 그러한 성향을 띠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 인물은 대체로 지식인이거나 문중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거나 지주처럼 경제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좌익마을의 경우에는 대체로 사회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 지식인은 대체로 식민지시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해온 경우와 해방 이후 좌익운동을 해온 경우로 나뉜다.
좌익마을의 경우 좌파 쪽 지식인들이 마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두 가지 배경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농촌 마을 주민들의 교육 수준이 낮았던 상황에서 배운 사람들이 갖는 권위가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 증언자는 "원래 좌익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내가 봐도 똑똑하더라라고 다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고 그렇게 훌륭하고 똑똑하니까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옳은가 보다 이렇게 인정을 하는 것이지"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지식인들이 마을에서 갖고 있던 권위를 잘 설명해준다.
문맹률이 높은 농촌에서 고등보통학교 혹은 전문학교를 나온 이들은 지식인으로서 마을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배경은 당시의 농촌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지주와 소작인 혹은 머슴 간의 봉건적인 관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한 증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들 입장에서 좌익분자들 빨갱이 말이 맞지.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 살자 그러니 없는 사람들이 왜놈들 밑에서 있는 사람들 밑에서 학대받고 쌀 한 말 갖다 먹으면 일을 엿새씩 해주고 이런 세상을 겪은 사람들은 다 공산주의자 옳다고 했지"
농촌의 불평등한 현실은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의 정당성을 확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에 이들은 북쪽 국가권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현실적인 힘까지 갖게 되었다.
마을의 우파 쪽 지도자로서는 지식인보다는 일제강점기하 혹은 해방 이후 면장을 지낸 인물,경찰로 일하거나 우익청년단에서 활동한 인물,그리고 재지지주나 마름(혹은 농장 관리인)등을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 면장을 지낸 이들의 대부분은 우익 쪽 입장에 있다.
인민군 점령기,혹은 인민군 퇴각기에 면장의 경력을 갖고 있던 이들의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친일파 혹은 친이승만파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면장 출신과 함께 우익 지도자로 가장 부각된 인물은 우익청년단 단장과 관련자이다.
우익청년단은 1946년 하반기부터 농촌사회에서 가장 힘있는 집단이 되었고 이는 전쟁 발발 전까지 이어졌다.
우익청년단 주요 간부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 피란을 떠났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큰 곤욕을 치르거나 학살당했다.
인민군이 철수한 뒤 피신했다가 마을로 돌아온 우익청년단 간부와 단원들은 마을의 중심 세력으로 복귀했다.
이들은 부역자 그의 가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들만큼 힘 있는 자들도 없었다.
마을의 또 다른 우익 지도자로는 지주계층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직접 우익단체에 참여한 경우도 있고,아닌 경우도 있지만 계층적 특성상 우익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들 지주계층이 마을 내 소작인들에게 갖는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재지지주들 가운데에는 소작인들에게 소작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집까지 빌려주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이러한 소작인들은 해방 직후에도 상당수 있었고,이들은 마을 내에서 지주의 가장 강력한 권력기반이었다.
물론 한국전쟁기에 이들 가운데 지주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지만,오히려 지주를 보호하려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지주층은 국가권력보다는 자신의 경제적인 힘을 기반으로 마을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농촌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작은 공동체를 이르고 살아왔다.
대부분의 마을이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특히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동체적 성격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마을 공동체도 완전히 고립된 우주는 아니었다.
이웃한 마을들과의 관계가 있었고 군현이라고 하는 국가기관과의 관계도 있었다.
각 마을 간에는 신분에 따라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었고,그러한 위계질서에 따라 마을 간의 관계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군현의 기관과는 주로 조세 수취를 매개로 관계가 설정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국가권력의 마을에 대한 개입은 조세 수취의 공동납부를 강제하는 수준이었지 마을 내부의 문제까지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 마을은 그 나름의 성격에 따라 각각 질서와 규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신분제와 지주제,그리고 친족관계 등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마을 공동체의 전통적인 질서와 규율은 20세기 들어 신분제의 이완과 함께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1930년대 들어 신교육이 농촌 사회까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신분의식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마을 내의 위계질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1930년대에 신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서서히 마을의 전통적인 지도자들,즉 종손,한학자,지주 등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찬승 지음,돌베개 출판
<마을로 간 한국전쟁>에서 요약한 글입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