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97]“기죽지 마라-우리가 백기완이다”
오는 15일이면 백기완 선생님 2주기이다. 벌써 2년? 최근 ‘여럿이 함께’(38명) 그분을 기리며 쓴 글들을 모아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펴냈다. 『기죽지 마라 -우리가 백기완이다』(301쪽, 돌베개 2023년 2월 6일 펴냄, 19000원)가 그것이다. 출판사 대표가 책이 나오자마자 이 시골에 사는 이름없는 후배에게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따끈따끈, 서점에도 뿌려지지 않았을 것같다. 신영복 선생님을 독점하다시피 펴낸 양질의 인문출판사이다. 내가 무어라고? 새삼 고맙고 행복하다. 백 선생님과 관련된(?) 서른여덟 분들의 활동가들이 각각의 추억과 일화를 통해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 자신들의 각오를 다지는 글들이다. 몰입해 읽을 책은 이런 것이 아닌가싶다. 백, 기, 완, 이름 석 자를 가만히 불러본다. 왠지 가슴이 먹먹하게 저려온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언젠가는 잠드신 모란공원을 찾아 깊은 절을 하리라. 마지막 페이지의 사진(2007년 창경궁에서 채원희님이 찍음)을 보니 가슴이 짜-안하다. 남겨놓고 가는 수백, 수천, 수만명의 중생들에게 ‘잘 있어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다.
백 선생님의 ‘직업’을 무엇이라 할까?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해방통일운동가, 민중운동가, 우리말 살리기운동가, 시인, 수필가…. 허나 그분에게는 어떤 직업도 맞지 않다. 그저 ‘영원한 재야투사’ ‘불쌈꾼 할아버지’라 하면 족하거늘. 불쌈꾼은 혁명가를 이르는 멋진 단어이다. 그가 한살매(일생) 주창한 ‘노나메기 벗나래’가 무엇인지 아시는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며,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르게 잘 사는> 게 노나메기이고, 벗나래는 세상이니, 공자가 말한 <대동사회大同社會>을 이름이리라. 노나메기 벗나래를 위한 노력, 투쟁 그리고 쟁취가 그렇게 어렵던가. 수많은 희생을 딛고 유구한 역사가 흘러갔고, 지금도 흘러가지만, 통일, 노동, 해방 등 뭐 하나 속시원하게 이뤄지는 것을 보았는가. 그 소용돌이 속에 백선생은 사방팔방 어디에나 ‘푸르른 청년’으로 사셨다. 2021년 마침내 고문 후유중과 급성폐렴으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가슴이 쿠웅 무너져 내린 사람들이 무릇 기하였을까. 그만큼 큰 족적을 남겼고,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곧바로 ‘노나메기재단’이 설립되었으리라. 위인偉人, 인물人物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렇게 큰 법이다.
누가 뭐래도 선생님은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은 탁월한 웅변가였다.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그것을 사자후獅子吼라고 부른다. 선생님만의 등록상표(트레이드 마크라고 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인 사자갈기 머리. 빗은 손가락이다. 어떤 이는 ‘선동가’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중용中庸을 벗어난 사람’이라고 할 것이지만, 아니다. 그분이 남긴 피끓는 저작들을 보라. 참글이자 진짜 우리말, 우리글이다. 언어조탁사가 따로 없다. 물론 좋은 의미의 ‘구라’도 굉장하다. 하여 ‘재야구라 3인방’ 중의 첫손가락이라고 하지 않던가. 썰說을 풀어내도 딱 이렇게 했드렸다. “옛날 천년 가뭄에 사람들은 다 죽고 마지막 남은 굴뚝새가 비를 부르다 목이 마르니까 굼벵이가 지렁이 오줌으로 ‘따끔한 한 모금’을 빌려줘 가지고 비를 부르는 소리가 얼마나 슬펐던지 모든 미생물들이 다 펑펑 울어 눈물이 비가 되어 천년 가뭄을 이겨냈다”고 한다.
깡다구, 결기를 빼놓고 선생님을 말할 수 있을까? 80kg 거구의 민중운동가가 손톱이 다 빠지는 고문을 당하여 45kg가 되었다. 생각있는 젊은이들이 '중개' 한 마리 고아드리지 않았으면 그때 돌아가셨을 선생님이기에, 죽는 날까지 ‘꼰대’가 되지 않고 치열하게 노동자들의 벗이 되고 동지가 되고 '길목버선'이 되었다. 책 제목처럼 “이제 우리 모두 백기완이다”는 ‘백기완정신’으로 선생님을 되살려내야 할 판이 아닌가. 아아- 그 형형한 눈빛, 두 주먹 불끈 쥐고 ‘산 자여 따르라’던 선생님, 하찮은(?) 유행가 구절에 눈물을 쏟으며 끝내 부르던 노래, 노래, 노래들.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라” 하신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2주일에 걸쳐 온 힘을 모아 힘겹게 쓰셨다는 네 글자를 아시는가? “노, 동, 해, 방”이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 땅에 끝끝내 온전한 투쟁정신으로 한 세기를 풍미한 사람이 어디 흔한 일인가. 그 추운 겨울날 23차례에 걸친 촛불집회 맨 앞자리를 개근皆勤하셨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백절불굴百折不屈’ 심산 김창숙 선생님이 생각난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각오, 언제 어디서나 “이놈들!”하고 고함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평생 해오셨다고 증언하는 민중들의 증언을 모은 것이 이 책이다.
아울러 “나도 백기완이기에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책이기도 하다. 3주기 되는 내년초, 또 이런 백 선생님 책이 나올 것이다. 이번에는 예술가 동지들의 글을 모아보자. 선생님이 얼마나 뛰어난 예술인이었는지도 알려야 한다. 또한 대부분 선생님이 만들었을 듯한 ‘우리말 모이(사전)’도 펴내야 한다. 아무렴. 그렇게 해야 말고. 잊지 않아야 사람이다. 우리 진짜 눈 감기 전에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것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 말이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절대로, 결코) 기죽지 말고, 두 눈깔 똑바로 뜨고, 고개 빳빳이 들고, 생명 아닌 것과 싸워야 한다.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고, 나도 잘살고 너도 잘 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벗나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굽이굽이 때마다 선생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찍어준 채원희님과 노순택님도 고맙다.
꼴에 신성한 주례를 몇 번 선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인용하는 축시가 선생님의 ‘시집 장가가는 벗에게’였다. 그중의 한 대목이다.
“(전략)
그러게 우리 모두 시집 장가간다는 말 따위는 이제
때려치우고 저 끝없이 열린 땅 사랑과 꿈이 영그는 나라
그것을 무엇이라 했던가
그렇지 한없이 열린 곳 저치나라 저치 간다고 했겠다
그렇지 주저앉으면 아랫목이 썩는 게 아니라
엉덩이가 썩는 법이라
시집 장가를 가느니 세상을 일구고 역사를 일구는
사랑과 이상이 꽃피는 고장 저치를 가자 이 말일세.
(후략)”
여기에서 ‘저치’는 한없이 열린 땅 대륙의 나라, 저 바다 건너로 사랑과 꿈을 찾아 끝없이 달려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집 장가를 간다는 말보다 우리 옛 조상들은 ‘저치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저치 나라 저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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