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2
1월16일[연중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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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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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V_RaCCz-0I (김광두 고스마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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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예수님 시대 단식과 관련해서 바리사이들은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의 규정에 따르면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의 날에만 단식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름 엄청 열심한 사람들이었던 바리사이들은 일년에 한번 속죄의 날 단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매주 두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란 사람들은 더 자주 틈만 나면 단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은 단식에 있어서는 전문가였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식을 자주 하다 보니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갔고 횟수를 늘려갔습니다. 건강하게 단식하는 방법도 연구하고 계발했습니다.
사실 일주일에 두번 단식, 이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대단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 단식에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단식을 많이 할수록 거룩한 사람,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니 바리사이들 입장에서는 한심할 지경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한 얼굴로 애써 단식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니 단식과는 완전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잔치집에 가면 어김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잔칫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굶주린 배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잔치집에서 말씀도 선포하셨고 치유와 기적을 계속해나가셨습니다.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바리사이들은 마침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코 복음 2장 18절)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동시에 알쏭달쏭,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2장 19~20절)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 잔치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지금 이 시기는 당신의 사명이 이루어지는 기쁨과 축제의 순간이기 때문에 단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축제에 초대받았다면 통상 어떻게 처신해야 바람직할까요? 잔치에 온 사람이 아무 말도 않고 울적하거나 뚱한 얼굴 하고 있다면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인상을 빡빡 쓰고 있다면 축제 주최측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축제에 왔다면 기쁜 행사이니 만큼 축제를 마음껏 즐겨야겠지요. 애써 마련한 음식을 행복한 얼굴로 맛봐야겠습니다. 축제에 온 사람들과 포도주 잔도 기울이며 담소도 나눠야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잔치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단식 시기의 적절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조만간 신랑을 빼앗길 날,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는 단식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게 되면, 너무나도 당연히 혼인잔치나 축제는 재개(再開)될 것입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남아있는 삶을 최대한 만끽해야겠습니다. 기쁨과 감사, 찬미와 사랑의 날로 하루하루를 장식해야겠습니다.
참된 단식과 관련해서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1. 이웃을 사냥하는 말을 단식하고 상냥한 말을 사용하십시오.
2. 슬픔을 단식하고 감사로 채우십시오.
3. 화를 단식하고 인내로 채우십시오.
4. 비관주의를 단식하고 희망으로 채우십시오.
5. 걱정을 단식하고 하느님을 신뢰하십시오.
6. 불평을 단식하고 단순함을 묵상하십시오.
7. 스트레스를 단식하고 기도하십시오.
8. 쓰라림을 단식하고 기쁜 마음을 지니십시오.
9. 이기심을 단식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10. 원한을 단식하고 화해하십시오.
11. 의미없는 말을 단식하고 침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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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왜 그리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며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단식과 관련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촌철살인의 한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이요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르코 복음 2장 19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시대는 슬픔과 비탄의 시대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네 하루하루가 만만치 않다 할지라도, 끝도 없는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축제를 만끽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백세 시대, 장수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네 인생 참으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가끔 제 나이를 떠올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제 치과 치료 갔을 때도 간호사 선생님께서 “아버님 이쪽으로 들어오세요!”라고 할 때 화들짝 놀라며 당황해했지만, 즉시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오면서, 나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남은 날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날수를 따져봐도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가 소중한 나날들, 보물처럼 아까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설렁설렁, 흥청망청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던 그 순간들이 안타깝습니다.
순간순간이 감사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이었는데, 왜 그리 인생을 심각하게 살아왔는지. 왜 그리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며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왜 그리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보냈는지...
얼마 남지 않은 날들, 눈물 대신 미소를, 비탄 대신 축제 향유해야겠습니다. 매일 주님의 존귀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매일 그분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일 매 순간은 축제의 순간이어야 마땅합니다.
슬퍼할 일이 있다 할지라도 즉시 마음을 바꾸어먹어야겠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런저런 원치 않은 병고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갖은 시련과 고통이 우리 삶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거듭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나가야겠습니다.
순간순간 주님 자비에 의탁하고, 거듭거듭 우울감을 떨치면서 우리 삶을 찬양과 축제의 삶으로 엮어나가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 마지막 순간까지 어여쁜 꽃 한 송이 피워 나가야겠습니다.
미운 사람들, 정말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상처만 남긴 사람들 생각일랑 흐르는 강물에 모두 모두 떠나보내고,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세월, 감동과 축제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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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RllQxFnt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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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었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속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 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돼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단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한껏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길들이 있듯이 누구나 다 각자의 길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완덕으로 향하는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내가 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부르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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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추운 겨울 아침 산보 길에는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 손을 따뜻하게 하는 워머(충전식이라서 편합니다.), 모자, 장갑, 소소한 물건을 담아 어깨에 메는 가방 그리고 손수건이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산보하면서 콧물이 나기 때문에 손수건은 도움이 됩니다. 손수건에 대한 기억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면 앞가슴에 하얀 가제 손수건을 달았습니다. 그때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던 것 같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는 색이 들어간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예쁜 그림이 있는 여학생들의 손수건도 있습니다. 손수건은 수건돌리기라는 게임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하얀 손수건은 항복의 표시가 되기도 했고, 위생병들에게는 평화의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얀 손수건은 헤어지자는 이별의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하얀 손수건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손수건은 사랑하는 이를 환영하는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랜 동안 방황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만일 나를 받아준다면 고향 마을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나무 가지에 노란 손수건을 가득 매달았습니다.
신앙인에게 특별히 생각나는 손수건이 있습니다. 바로 베로니카의 손수건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로니카는 오랫동안 하혈하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세리 자캐오의 아내였다고 합니다. 자캐오의 아내는 세상의 것에만 빠져있는 남편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남편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밖에 모르던 남편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집과 가족이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의 아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의 길 6처에서 베로니카 성녀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음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새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어린아이의 콧물을 닦아 주는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과는 결별한다는 이별의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노란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명한다는 하얀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위생병이 보여주는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베로니카의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헐벗은 이들에게, 가장 굶주린 이들에게,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내미는 사랑의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손수건과 같은 삶을 살아서 주님을 모시는 새 부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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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묵은 나’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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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8-20)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면 안 된다.”입니다. 당시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아직 오시지 않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 즉 언젠가 오실 메시아를 잘 맞아들이기 위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이 이미 세상에 와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식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단식하면 안 된다.”입니다.> 그런 단식을 하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믿거나 믿기를 거부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는데도, 그의 제자들은 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아마도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기대감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흘려들었거나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믿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이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 때에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바로 음식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루카 24,41-42)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잠도 못 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또 그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금육과 단식을 합니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짓고 예수님을 떠나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신랑을 빼앗길 날’은 ‘신랑을 잃는 날’이 됩니다.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갈 때, 우리는 회개와 보속의 의미로 단식을 하게 됩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 말씀은 “오래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라.”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고, 또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굉장히 오래된 것들이지만, 절대로 바꿀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율법’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규정들과 실천 지침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지키는 일에 집착했고, 그러다가 하느님의 계명들과 계명들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잘못된 신앙생활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바로 버리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끝까지 잘 지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은 지키고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바리사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에도 그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잘 지켜야 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지혜롭게, 또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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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논쟁은 모든 복음서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논쟁 안에서도 전해집니다. 오늘 복음은 서로 대조되는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제자들, 헌 옷과 새 천 조각, 헌 부대와 새 포도주입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식은 유다교에서도 일상적으로 행하던 일들이었고 신앙을 지닌 이들이 실천해야 할 덕이었습니다. 또한 단식은 회개와 속죄를 위한 표지로 구약 성경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이 무엇인지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6,16-18 참조). 초기 교회에서도 단식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 디다케』에서는 신자들이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도록 권고합니다(8,1 참조). 지금은 금요일에만 단식하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해 왔습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많은 경우에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혼인 잔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로 기쁨과 풍성함이 그 특징입니다. 신랑,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기는 기쁨의 시기이면서 구원의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비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시간은 옛것과는 구분되는 구원을 위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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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최의정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제가 신학생 때,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영성생활의 핵심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데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제가 찾아야 할 과제이겠습니다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라틴어 격언도 있거니와, 매일 같은 일상이 되풀이되는 우리에게 과연 새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것의 반대는 낡은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좋습니까? 낡은 것이 좋습니까?”
만일 누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새로운 것이 좋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고, 낡은 것이 좋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그래도 새로운 것이 좋다고 말씀하실 분이 더 많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새로운 것이 주는 그 무엇을 기대하기 때문이지요.
과거의 낡은 것들이 자아내는 좋지 못한 것들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낡은 것을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 또는 우리 삶의 한 부분에서 아직도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듯이, 낡은 것들에 익숙해 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광야생활을 불평하고, 과거 노예살이 할 때가 그립다고 하듯이 말이지요.
오늘 복음말씀은 단식에 관한 예수님과 사람들의 논쟁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의 태도를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단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는 그 잣대를 갖고서 예수님을 꾸짖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그러했으며, 바리사이들은 더욱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유다인으로서 이 물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상 못 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잔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충만함을 뜻합니다. 일찍이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혼인한 신랑, 신부의 관계로 표현했고,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과 그분의 지체인 우리 교회의 관계를 신랑, 신부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또한 묵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날이 다가왔다.”(묵시 19, 7)며 하느님 구원이 가까웠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끌고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 자유와 기쁨, 믿음과 희망, 생명과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 곧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우리는 새로운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지녔던 낡은 사고방식, 낡은 습관을 과감히 버리고, 이제 하느님 나라에 들기에 합당한 새로운 생각,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서,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새로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으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매일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지만, 우리가 진정 복음의 정신에 물들어 있고, 복음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하루하루가 늘 새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늘 새롭습니다. 그 새로움을 요구하시는 예수님 앞에, 복음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 지녔던 낡은 습관을 아직도 지닌 것은 아닌지, 거기에 대해 아직도 미련이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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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환 히폴리토 신부님]
어떻게 보면, 편견으로 산다는 것은 나름 괜찮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편견이 있다는 것은, 나름 자신만의 어떤 기준점이 되는 지점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고, 그때 그때 판단을 내릴 때 별 어려움이 없이 자연스럽게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편리함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거나 다가가기 위해서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조금 불편한 과정들을 거쳐야 하고, 조금 노력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게다가 때로는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때도 있으므로 우리는 솔직히 편리한 쪽에 쉽게 섭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하지요. 물론 젊은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이렇게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이가 갈수록 새로운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별반 대수로울 것도 없고, 어제의 삶도 오늘과 다를 바 없고, 내일의 삶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작년도 그렇고 내년에도 그럴 거라고 여깁니다. 새로운 것이 없으니 기억할 것도 없고, 시간의 단절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흘러가다가 보니 빠르게 지나간다고 합니다. 미동도 없고 사건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세월이 더디게 가는 이유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새롭게 탐색해야 하고, 하나하나가 신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구도 많고 하고 싶은 에너지도 많기 때문에 이를 감당하기에는 시간은 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시간에는 늘 많은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감성 하나하나 마음에서 피어나고 아주 세세히 작은 것까지도 기억하면서, 어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건 바로 내가 새로운 시각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지나치는 삶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 회개하며 산다는 것, 신의 뜻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바로 이 새로움으로 옮아가는 과정입니다. 믿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입니다.
귀의한다는 표현도 결국에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신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면서도 편협해 간다면 그건 아마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이 결국 자기 생각과 편견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면, 결국 신앙한다는 것은 자기를 끊임없이 만드는 과정의 반복이 될 것입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가 예수님 때문에 자유로와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그분을 만나고서도 자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편견으로 가득 찬 생각과 눈빛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은 이들은 자신의 시선이 아니라 그분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내려놓은 이들에게 찾아왔습니다.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나 자신을 던지는, 그 바다에서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되는 소금인형처럼 머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는 것은, 세례를 통해 과거의 자신은 죽고, 내가 쌓아온 내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새로 옷 입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과정을 넘어 자신을 완성하고, 진정한 삶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세례를 받은 신자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에게 속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요?’라고 하니까. ‘세례를 받기 전에는 그냥 살았으면 됐는데, 이제는 예전 같으면 그냥 했을 것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리고 마음에 걸려서 불편해졌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서 불행해졌습니까?’라고 물으니, ‘그건 아닙니다. 불편한 행복입니다.’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부산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불의한 편안함보다는 불편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 안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진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고 물어간다면, 분명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진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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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로움>
마르코 2,18-22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움>
참된
새로움은
이제까지와는
다름이 아니라
이제까지보다는
더 나음입니다
이제까지보다는
더 착함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믿음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바람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사랑함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올바름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보듬음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보살핌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베풂이요
이제까지보다는
더 살림이요
그리하여
새로움은
그저
이제까지와는
같지 않음이 아니라
어느 모로 보나
이제까지보다는
더 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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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 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 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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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자신과 대통령이 같은 고향으로 잘 아는 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연락하세요?”라고 묻자, 바쁘신 분인데 어떻게 연락이 되겠냐고 하십니다.
종종 지위 높은 사람과 친분이 있으면 마치 자신이 높은 사람이 된 양 행동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친분이 현재에는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거의 인연을 내세워서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친분이 그를 높여줄까요?
허세만 부린다면서 오히려 멀리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신부님 옆에서 복사 섰었다는 이야기부터 본당 봉사활동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금은요?”라고 물으면, “요즘은 바빠서 미사에 나가지도 못하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주님과 전혀 가깝지 않은데, 과거의 인연으로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과거에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바로 지금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라고 하면서,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담아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 역시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모습에 실망만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께 적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큰 죄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글을 통해 ‘쓰담쓰담 묵상집’의 마지막 장을 적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교구장 주교님의 인사 명령에 따라 갑곶성지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내일부터 제 후임 신부가 이 묵상집을 이어서 쓸 것입니다.
2003년 12월에 와서 3년 동안, 그리고 2015년 1월에 와서 7년 동안을 갑곶성지에서 살았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은 저였지만 순교자들의 보살핌으로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제 갑곶성지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 포도주 같은 저는 떠나고, 새 포도주와 같은 신부님께서 이곳을 맡아주십니다.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부님이시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안심하며 떠나겠습니다.
아무쪼록 새롭게 갑곶성지를 운영하고 발전시키실 신부님께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1월 16일부터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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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되는 단식>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사람들은 주님과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지 묻는데 주님께서는 왜 단식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단식해야 한다고, 고정관념이랄까 강박 관념이랄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왜 단식해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지 않은 그들의 허를 찌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허를 찔리지 않으려면 단식을 왜 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여 단식의 정신을 새롭게 알아야 하고 새로운 단식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단식의 정신이란 사랑의 단식입니다. 사랑처럼 고루한 것이 없지만 사랑처럼 새로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새로운 얘기가 아니고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하는 타령이지만 사랑할 때 타성에 젖어 고루한 방식으로 하지 않고 새롭게 하며, 무엇보다 사람이 매일 새로워져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넘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할 것입니다.
매일 새로워지는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단식도 사랑에서 비롯된 단식을 하고, 단식이 그저 단식이 아니라 사랑이 되는 단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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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 사랑의 예수님 -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 참 무궁하지만 저는 최고의 선물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영원한 롤모델(role model)이자 소울메이트(soul mate)인 예수님을 꼽고 싶습니다. 이에 두 선물을 추가한다면 성경과 미사를 더하고 싶습니다. 이 셋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사랑의 예수님, 파스카의 예수님이라 고백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 역시 참으로 신적이자 인간적인 전인(全人)이, 현인(賢人)이, 자유인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이면서 신적인 예수님의 진면목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기전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마르2,8)
여기서 영은 직관과 정서와 의지의 자리, 곧 인간의 내면을 대표하는 하느님과 곧장 연결되는 부분을 뜻합니다.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통찰하시는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이렇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바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히브리서에 소개되는 우리의 대사제 예수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주제는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입니다.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참으로 은혜롭고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의 정체가 잘 고백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하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4,14-16)
얼마나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대사제 예수님인지요! 바로 우리는 이 말씀대로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이 되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결론과도 같은 후반부 말씀도 은혜로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히브5,7-10)
얼마나 감동적이며 공감이 가는 인간적이면서 신적인 예수님의 모습인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명칭이 바로 신적이며 인간적인 예수님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인간적일수록 신적일 수 있으며 이래야 날로 주님을 닮아 비로소 자비롭고 자유로운 참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대사제 예수님이 친히 당신 사제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매일 미사를 주례하십니다. 새삼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 역시 고난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요, 마침내 우리도 완전하게 되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인 주님께 도달하리라는 점이 우리의 자랑이자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이나 고난을 순종을 배우는 겸손의 계기로 삼아 영적 성장의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순종해야 하고 배워야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신적이며 인간적인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에 대한 일화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단식이 지고의 가치라도 되는 듯 단식의 잣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재단하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어찌하여 당신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쾌한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주님이신 당신과 함께 혼인잔치같은 인생축제를 즐기라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고,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어 시끄럽게 하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이신 당신과 함께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의 때가 되면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단식 경쟁, 금욕 수행 경쟁보가 무익無益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에 담긴 지혜,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단식 자체의 수행을 잣대로 삼을 것이 아니라 사랑의 예수님 당신을 잣대로 삼아, 주님이신 당신과 함께 할 때는 축제인생을 맘껏 즐기라는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주님의 처신입니다.
이제 꼰대짓은 그만두고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 과감한 발상의 전환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하라는, 결론하여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는 것이며,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으로 새 부대의 마음에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아내라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세상 삶의 고수高手라 할만한 어느 분(신수정 KT부사장)의 인터뷰 기사내용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모두 우연에 맡기라는 것이 얘기는 전혀 아니예요. 크럼볼츠 교수는 ‘계획된 우연’이란 표현을 써요. 그는 성공에 있어 행운의 요소는 크지만, 행운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행운을 부르는 다섯가지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호기심, 낙관성, 끈기, 융통성, 위험 감수성이예요.”
성령의 선물같은 행운을 부르는 다섯가지 요소는 발상의 전환에 그대로 포함되는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대사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새부대의 새날, 새마음 안에 새포도주의 복음을 담아 주시어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복음적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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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없."(마르2,19)
'기뻐하는 새 부대가 되자!'
오늘 복음(마르2,18-22)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2,18) 라는 사람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2,19-20) 그리고 이어서 새것과 헌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2)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삶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은 부활의 삶인 기쁨의 삶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제와 영원히 부활하기 위해서, 기뻐하기 위해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의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그렇다면 기쁨의 반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단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 주님과 더 하나가 되기 위해서, 더 기뻐하기 위해서 하는 수단이요 도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단식) 속에 있어서는 안 되고, 기쁨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기쁨(새 포도주) 안에 머물기 위해서, 노력(단식. 새 부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례시기로 볼 때 지금은 예수님의 삶과 땀(공생활)을 묵상하는 시기, 곧 예수님과 함께 하는 연중시기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기쁨의 시기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주님, 세상을 떠난 박해순(마리아) 자매와 신미조(마리아) 자매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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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HQbadoQfj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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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마르 2, 21)
새로워지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감출 수 없습니다.
새로워져야 할 대상은
바로 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새로워져야 할
바로 그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잔치도 단식도
새로워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란
새롭게 태어나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새로워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삶입니다.
빼앗기고 잃어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기울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기워야 할지를 아는
신앙생활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삶을 다시
꿰매고 깁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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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생명의 오늘입니다. 오늘을 기쁘게 살도록 우리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은 새 포도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 포도주 앞에서 모든 생명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새 포도주의 시간입니다. 새 포도주와 함께 할 때 향기롭고 빛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 또한 새 포도주처럼 삶의 참뜻을 깨우치는 마음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도 새로워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새 부대의 삶이란 주님께 순종하는삶입니다. 오늘도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향해 용서와 화해의 포도주가 되어 다가오십니다.
그 어떤 힘 있는 권력보다도 더 강력한 힘은 따뜻하고 아름다운마음입니다. 단식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 포도주로 새로워지면 모든 것은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담는 새 날 새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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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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