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철학 중간고사 대체 과제
2022101235 철학과 김나현
강의시간에 ‘태극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고, 무극은 인식할 수 없다.’, ‘무극은 태극의 무한함을 표현한 것이다.’와 같은 내용을 들었을 때, 이와 비슷한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태극 개념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어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 『송명 성리학』 (진래 지음, 안재호 옮김)책의 주돈이 편(p.77~97)을 보면, “태극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혼돈 상태의 근원 물질을 가리키고, 무극은 혼돈의 무한을 가리킨다. 근원 물질 자체로서 태극은 형체가 없고, 무한하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는 말의 의미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p.88 첫 번째 문단에서)
처음으로 이 인용구를 보았을 때는, ‘태극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고, 무극은 인식할 수 없다.’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태극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근원 물질이라면, 무극과 마찬가지로 태극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극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오행을 이뤄 만물을 이룬다는 설명을 보고 나서 이 말이 틀린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위 문장은 우리가 태극의 무한한 변화를 모두 인식할 수 없지만(무극), 태극 변화의 결과물인 만물은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태극과 무극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태극을 서양 철학적 개념으로 보면 ‘이데아’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설명을 듣고 나서 앞에서 언급했던 기시감, ‘비슷한 설명을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의 답을 찾아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이 책에 쓰여 있는 의지와 이념을 구별하는 설명이 묘하게 무극과 태극의 관계성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와 이념은 언뜻 같아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의지는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것이지만, 이념(이데아)은 주관의 인식 대상이 된다. 즉, 이념 또한 하나의 객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념이 비록 인식의 대상이 되지만, 의지와 가장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이는 의지의 객관화의 모든 단계 중 본질적인 것만이 이념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지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그 객관화의 단계에서 가장 순수한 이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태극의 무한한 변화(무극)에서 태극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무극과 태극의 관계가 의지와 이념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이유이다.
첫댓글 범주가 없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개념은 내포와 외연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한정된다는 것이지요. 우주라고 할 때는 우주 아닌 것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내포와 외연을 가진 개념으로 성립하게 됩니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어떤 것의 개념을 명석판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받은 우리의 인식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메리카노만 마셔온 사람이라면 "커피=아메리카노"라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라떼와 카푸치노가 커피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떼와 카푸치노도 커피의 한 종류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인식 속에서는 라떼와 카푸치노가 커피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동양철학의 전통에서 우주의 본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송대에 들어와서 불교와 도교의 비판에 맞서기 위해서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하면서 모든 것이 생성되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태극을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우리 인식을 넘어선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